서거 30주기 맞아 재평가 작업 ‘다시 보는 박정희’
‘독재자’ ‘친일인사’ 족쇄같은 이미지 떨쳐낼까
박근혜 3단 논법…‘박정희의 꿈=복지=박근혜’
서거 30주기를 맞아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기를 띄고 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학술적인 평가는 물론 유품전시회, 기념관 건립에 이르기까지 ‘박정희’라는 인물과 그 시대의 전반적인 사안에 대한 것들이 모두 주목의 대상이다. 박 전 대통령과는 대립각을 세워왔던 민주당도 논평을 통해 ‘박정희 재평가’를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논의는 더욱 활발해지는 모양새다. 정치권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이것이 박근혜 전 대표에게 미칠 영향까지 조심스레 따져 보고 있다. 박 전 대표가 정치를 시작하고 자리를 잡은 지금에까지 박 전 대통령이라는 이름은 짙은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시간 속에 박재되어 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조심스레 세월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30여 년만이다.
박 전 대통령은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경제 발전을 이룬 탁월한 지도자’와 ‘민주주의를 탄압한 독재자’로 극명하게 갈린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이뤄지지 않으면서 이 같은 시각은 굳어져만 왔다.
하지만 올해 서거 30주기를 맞아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평가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영남대 박정희리더십연구원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 앤 리서치에 의뢰해 ‘국가 발전에 가장 기여한 전직 대통령’에 대해 물은 결과 박 전 대통령을 꼽은 이가 75.6%로 나타났다. 72.8%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필요하다’고 답했고 74.9%가 박정희 기념사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따라 박 전 대통령을 기념한 사업이나 재평가 세미나가 속속 열리고 있다. 지난달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박 전 대통령의 유품 전시회가 열렸으며 아시아협력센터와 호주국립대 한국학연구원은 ‘박정희와 그의 유산-30년 후의 재검토’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었다.
시간 속에서 꺼낸
빛바랜 ‘박통의 추억’
민주당은 박 전 대통령 서거 30주기를 맞아 대변인 명의의 공식 논평을 내기도 했다. 이는 우상호 대변인 스스로 “10·26에 대해 그동안 정당이 논평을 낸 적이 거의 없다”고 했을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다.
우 대변인은 “오래된 역사에 대해 대개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그 행복했던 기억을 추억하려 하고, 가슴 아팠던 기억이 있던 사람은 같은 사건이어도 가슴 아팠던 기억을 더 부각시키려 하는 현상이 있다”면서 “대한민국에 있어서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이름이 바로 그러한 정점에 서 있다”고 말했다.
우 대변인의 논평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긍정적 시각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박정희 재평가’를 어느 정도 수용한 것이다.
지난달 26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치러진 박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서도 이전과는 다른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우선 정몽준 대표가 추도식에 참석했다. 정 대표는 한나라당 대표로선 처음으로 박 전 대통령 추도식에 참석한 것이다. 공식 논평은 내지 않았지만 막바지에 이른 10월 재보선 지원유세로 뒤로 하고 참석한 것.
이날 추도식에는 정 대표뿐 아니라 최병렬 전 대표, 박준규 전 국회의장, 주호영 특임장관과 김무성·유기준·유승민·유재중·이경재·이성헌·이해봉·홍사덕·허원제·허태열 등 친박계 의원 30여 명과 이규택 친박연대 공동대표, 남덕우·한승수·황인성 전 국무총리, 김기춘 전 법무, 노재현 전 국방, 고병우 전 건설, 김기형 전 과학기술처 장관 등 전·현직 국회의원 및 각료, 일반인 등 2500여 명이 참석했다.
유족을 대표한 인사말은 박 전 대표가 맡았다. 지난 몇 년간 동생 지만씨가 맡아 왔지만 올해는 30주기를 맞아 박 전 대표가 대신했다.
박 전 대표는 “아버지는 경제 성장을 위해 노력하셨지만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며 “삶의 질과 국격을 높여 국민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애국가를 들으면 가슴이 찡해지는 나라를 만드는 게 진정 원했던 일”이라고 회고했다.
이어 “이것이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운 선진국으로 만들고 유지를 받드는 길”이라며 “저는 결코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랑스러운 우리 국민이 계시기에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아버지에 대한 많은 말들과 일이 있었지만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분들과 국민이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있는 걸 보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대통령이었는지를 증명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대신했다.
30주기 추모식
박근혜가 말하는 ‘박정희’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날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박 전 대통령은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면서 민족을 가난에서 해방시키고 경제 기적이라는 불멸의 공적을 이뤄 냈다”며 “이는 수십 년을 내다본 리더십과 국민의 저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록으로 보존하고 후대에 남기는 기념관 건립사업이야말로 빨리 추진해야 할 사업”이라며 “김대중 정부 때 약속한 사업인데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7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가급적 이명박 정부 내에 마무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근 외고 논란을 촉발한 정두언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의 ‘교육 개혁’을 되돌아봤다. 정 의원은 “아직도 학벌주의, 연고주의의 뿌리가 깊은 우리나라에서 ‘뽑는 방식’으로 수월성 교육을 추구하는 것은 너무도 하책”이라며 “교육은 잘 가르치자는 것에 있는 것이지 잘 뽑자는 데 있는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1969년 2월 박 전 대통령이 중학교 무시험·고교평준화·대입 예비고사제 등 ‘교육개혁’을 단행한 사례를 거론하며 “박 전 대통령이 왜 그런 결심을 했는지 늘 의문을 품어왔는데 요즘 이해가 간다”고 동조했다.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도 재차 거론될 것으로 보인다. 8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지난 8년 동안의 편찬작업을 마무리하고 식민지 시절 일제에 협력한 인사 4000여 명의 행적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의 발간 보고대회를 열 계획이다. 이 친일명단에 포함된 사회 지도층 인사 중에는 박 전 대통령도 포함돼 있다.
박 전 대통령이 거론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이가 있다. 박 전 대표다. 박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그는 박 전 대통령 사후 정치권에 입문했다.
정치권에서 자리를 잡고 ‘박근혜’라는 이름을 세우는데도 ‘박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것은 큰 영향을 미쳤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박 전 대표의 지지자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정치인으로 성장해가면서 ‘독재자의 딸’이라는 이미지가 종종 발목을 잡기도 했다.
지금은 유력 대권주자로 꼽히는 박 전 대표지만 정치의 출발선부터 박 전 대통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점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는 그에게도 음양으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독재자’ 이미지 벗고
복지 화두 전면에 띄운다
박 전 대표는 이를 적극 활용할 분위기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서 “아버지의 궁극적인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복지는 박 전 대표의 주요 화두다. 18대 국회에서 상임위로 보건복지가족위를 선택했으며 미니홈피에도 ‘모든 국민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선진 복지국가가 되길 바라면서’라고 적었다.
일부 정치전문가들은 “박 전 대통령은 18년간의 공과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면서 긍정적 업적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다”며 “경제 발전이라는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이 큰 향수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전방위적인 부분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지기 전이니만큼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과 연계시킬 수 있는 부분을 거론한 것”이라고 봤다.
이어 “박 전 대표는 오랜 시간 독재자의 딸’이라는 시선을 받아왔다”며 “재평가가 이뤄지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일부 희석되면서 박 전 대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공과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지면 박 전 대표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라며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일정부분 깨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박 전 대통령의 행적이 박 전 대표의 ‘원칙’과 ‘소신’이라는 정치적 이미지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중 한 인사는 박 전 대표가 이미 정치권에서 ‘박근혜’라는 자신의 이름을 세우고 있다는 점을 들며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박 전 대표가 박 전 대통령과 계속 연관 지어 생각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며 “가지치기를 해 나와서 뿌리까지 내렸는데 계속해서 한 나무에 있는 것처럼 바람이 불때마다 흔들리면 그 바람이 따뜻한 바람이든 차가운 바람이든 둘 다 좋지 못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냐”고 못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