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성희롱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 농도가 짙어지고 수법 또한 교묘해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성희롱 사실을 발설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데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당했을 경우 불이익이 돌아올까 봐 입을 닫기 일쑤다. 여기에 기업마다 부는 칼바람은 벙어리 냉가슴만 앓는 피해자들을 낳고 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었다 구조조정 대상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만연하는 직장 성희롱의 실태를 취재했다.
#1 모 회사의 여직원들은 출근길이 두렵다. 행여나 모 부서 A부장과 만나면 하루종일 기분이 찜찜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A부장의 몹쓸 손버릇이다. 그것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거나 인사를 하는 여직원의 귀를 만지는 것이다.
A부장의 손을 거쳐 간 여직원만도 10여 명. 아무리 싫은 내색을 비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에 수많은 여직원들이 불만을 토로해도 남자직원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그게 무슨 성희롱이라고 난리냐는 것. 결국 여직원들은 오늘도 A부장을 피해 다니기만 할 뿐 적극적인 어필은 하지 못하고 있다.
#2 28세의 직장여성 B씨. 그는 몇 달 전부터 사표를 가슴에 품고 회사로 향한다. 상사인 C씨의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듣고 난 후부터다. 입사할 때부터 유난히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던 C씨. 처음엔 아버지처럼 다정한 상사의 친절에 감동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B씨가 사는 동네로 찾아와 그를 불러낸 C씨는 다짜고짜 “사귀자”는 고백을 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C씨는 이후에도 수시로 B씨에게 개인적인 만남을 요구했고 급기야 “내 정부가 돼 주면 죽을 때 유산을 남겨 주겠다”는 제안까지 받게 된 것.
더는 참을 수 없었던 B씨는 강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C씨는 갑자기 돌변했다. 다정하고 친절한 상사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과도한 업무를 떠안기는 등의 방법으로 복수를 하기 시작한 것. B씨는 “성희롱에 이어 불합리한 대우까지 받으며 회사를 다닐 수는 없어 심각하게 퇴사를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3 D씨는 ‘메신저 성희롱’을 했다가 해고당했다. 그는 여직원 E씨에게 메신저를 통해 남자 성기사진을 보냈다. 사진을 보며 당황하는 여직원의 모습을 보려는 의도에서였다.
그 결과는 혹독했다. 얼마 후 자신에게 해고통보가 내려진 것. 뒤늦게 안 사실은 E씨가 사진을 받자마자 사진과 메신저 대화내용을 저장해 사장에게 넘겼다는 것. 명백한 증거 앞에서 변명조차 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성희롱 가해자란 죄명으로 짐을 싸야 했다.
직장 성희롱이 만연해가고 있다. 이 같은 사례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남자직원을 포함한 수많은 직장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성적수치심을 느끼며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사람인>이 여성 직장인 729명을 대상으로 직장성희롱의 실태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39.1%가 ‘있다’고 대답했다. 회식자리에서의 성희롱은 더욱 빈번했다. 절반이 넘는 52.3%가 회식 중 성희롱을 당했다고 답한 것. 성희롱을 당했던 상대는 51.2%가 직속상사를 꼽았다. 다음으로 임원급 상사와 동료 직원이 그 뒤를 이었다.
성희롱의 방식도 점차 진화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기기의 발달에 따라 성희롱도 달라지는 양상을 보였다. ‘삐삐’가 대중화됐던 시기에는 전화기에 대고 신음소리를 내 보내는 방식이 유행을 했고 휴대폰이 등장하고부터는 야한 문자메시지로 성희롱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메신저가 유행하자 야한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내는 성희롱까지 나타난 것.
이처럼 각종 방법으로 성적수치심을 당한 피해자들은 제대로 어필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성희롱을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린다는 것.
언어 성희롱에서 메신저 성희롱까지 진화하는 직장 내 성희롱
감원바람 불면서 성희롱 당하고도 속앓이 하는 직장인 늘어
특히 여자직원들은 “쉬운 여자로 보이니까 성희롱을 당하지”라는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속앓이만 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가해자보다는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며 자책하는 여성까지 있을 정도다.
또 다른 이유는 직장생활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한다. 윗사람의 잘못이나 허물을 공개하는 것을 꺼리는 우리의 문화가 성희롱 피해자들의 입을 막고 있는 것.
여기에 직장마다 불고 있는 구조조정 바람은 피해자들을 더욱 위축시킨다. 지금의 위기에 상사에게 찍혀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이 같은 이유들로 직장 성희롱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연되는 동안 피해자들의 고통은 커져만 간다. 정신과치료를 받을 만큼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직장인까지 생기는 것이 실정이다.
여기에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의 가족이나 동료들로부터 폭언이나 폭력에 시달리는 2차 피해까지 발생하고 있어 피해자를 두 번 울리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한국 성폭력상담소에서 4차례 이상 직장 성희롱으로 상담한 사례 41건 중 17건에서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희롱은 피해당사자뿐만 아니라 기업의 효율성을 저해시키기도 한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성희롱을 당한 직원은 업무실적과 만족도, 조직에 대한 충성도가 크게 약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결국 기업에 막대한 손해를 입힐 수 있는 요인이 된다.
이처럼 개인과 기업,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성희롱이 계속해서 만연하는 이유에 대해 한 직장 성희롱 방지 전문 강사는 성희롱을 바라보는 남녀의 생각 차이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강사는 “성희롱에 대한 교육을 하다 보면 야한 농담이나 야릇한 시선까지 성희롱이라 생각하는 여자직원과 달리 남자직원들은 신체접촉이 있어야만 성희롱의 범주에 넣는 것이 대부분이다”라며 “이처럼 성희롱에 대한 남녀의 시각차가 있는 한 성희롱은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직장 성희롱 대처법 <5>
피하지 말고 맞서라!
미국의 직업전문가 ‘히더 휴먼’은 직장 내 성희롱을 퇴치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음 다섯 가지 방법을 권한다.
■ 정면 대응하라
직장 내에서 성희롱을 당한 당신의 첫 번째 과제는 “나하고 잘 지내야 직장 생활이 편해”라고 추근 대는 상사를 맞상대해 문제를 해결해 내는 것이다.
■ 아군에게 도움을 요청해라
짓궂은 직장 동료 또는 상사와 맞서기가 겁나거나, 맞선 뒤의 영향이 걱정된다면? 회사 안에서 성희롱에 대한 이해가 비교적 잘 돼 있는 인사부나 익명의 전화 제보 시스템을 이용해 고발한다. 팀이나 부서의 책임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방법이다. 대부분의 경영진은 사내 성희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로 인해 조직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두려워한다.
■ 일지 작성은 필수
성희롱을 걸어온 시간과 날짜를 노트에 적어 둔다.
■ 외부에 도움을 청한다
회사 안에서 해결 못 한다면 외부로 눈을 돌려라. 관련 시민단체나 정부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면 해당 기관의 변호사나 전문 상담사가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 회사 정책에 이의를 제기해라
고용주에게 성희롱 문제 제기를 해놓지 않으면 회사 측은 성희롱 문제 발생 시 자기 방어만 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