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구 전·현직 두목 총출동 현장스케치

2008.11.11 10:04:57 호수 0호

“낙화유수 큰형님! 아우들 왔습니다”

형님뵈러갑니다. 지난 2일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공원묘지에서 낙화유수 고 김태련씨의 2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1세대 주먹계 원로들과 전국 전·현직 보스들이 선영을 참배하기 위해 묘소로 향하고 있다.
돈 앞에선 의리가 없다. 선·후배간 우정도 사라진 지 오래.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어 서로 심장을 겨누기 일쑤다. 그저 ‘밥그릇’에만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신 조폭 얘기다. 사시미(회칼), 쇠파이프, 도끼 등 이른바 ‘연장’이 난무하는 조폭 세계엔 이제 더 이상 ‘낭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툭 하면 힘없는 서민들의 쌈짓돈 갈취를 목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는가 하면 오직 자신의 배만 불리기에 급급해 음모를 꾸미고, 이는 배신으로 너무나도 쉽게 이어진다. 비열한 조폭들이 판을 치는 요즘 1950∼60년대 주먹계를 쥐락펴락했던 ‘낭만파 야인’들이 자주 회자되는 까닭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1세대 주먹계 원로들과 전국 전·현직 보스들이 뜻 깊은 자리에 모여 돈독한 우정을 과시해 화제를 모았다.

고 김태련씨 2주기 추모식 주먹계 원로·현역 대거 참석
봉사하는 삶 살다간 고인 뜻 받들어 보육원 방문해 온정
‘야인’ 이정재·유지광 이어 ‘동대문사단’ 보스
서울대 출신 ‘인텔리 주먹’…‘원펀치’로 유명

지난 2일 오전 10시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한 야산. 주차장 입구에 검은색 정장 차림의 건장한 청년 30여명이 도열한 사이로 대형 세단들이 줄지어 도착했고,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삼삼오오 모인 이들은 어느새 2백여명에 달했다.



‘계파 불문’ 전국서 참석
 환갑에도 ‘형님’엔 깎듯

수북이 쌓인 낙엽에 달듯 말듯한 바바리코트. 매서운 눈초리를 가린 중절모. 그리고 축 늘어뜨린 목도리 등의 행색은 영락없이 ‘야인시대’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형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아우도 잘 지내는가.”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형님’에겐 깍듯했다. 여기저기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땅에 머리를 꽂는 인사법 또한 변함이 없다.

실존하는 협객인 ‘마지막 야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2년 전 작고한 ‘낙화유수’고 김태련씨의 2주기 추모식에서다. 고인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추모식엔 미망인 이부자 여사와 가족들을 비롯해 김씨가 몸담았던 이정재의 ‘동대문사단’과 유지광의 ‘화랑동지회’는 물론 김두한의 ‘종로파’, 이화룡의 ‘명동사단’ 등의 핵심 멤버들이 총출동했다.
낭만과 의리로 똘똘 뭉쳐 이른바 ‘협객’으로 불렸던 1세대 주먹계 원로들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두목급 현역들도 대거 참석했다. 왕년에 주먹계를 주름잡았던 ‘큰형님’들의 2세들도 눈에 띄었다. 이들이 모인 것만으로도 주먹계 전체가 술렁일 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한 원로는 “평소 낙화유수 큰형님을 존경하고 의지하던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후배들이 모두 모였다”며 “전국의 어떤 행사도 큰형님의 추모식만큼 계파와 나이를 뛰어넘어 이렇게 모이지는 않는다”고 단언했다.

이들이 선영 참배에 앞서 발걸음을 옮긴 곳은 인근의 아동보호시설인 광명보육원. 김씨가 생전 고집했던 ‘사랑·나눔·실천’의 뜻을 받들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경기 불황 여파로 도움의 손길이 뚝 끊겨 어느 때보다 을씨년스런 보육원에 반가운 손님들이 방문한 것이다.
보육원 관계자는 “매년 때마다 잊지 않고 방문해 아이들의 쓸쓸한 겨울을 훈훈하게 해주고 있다”며 “사실 처음 유명한 분들이라고 해서 조금 겁도 났지만 막상 만나보니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분들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광명보육원에 성금과 선물을 전달한 뒤 김씨의 선영 앞에서 모두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구슬픈 추모문이 야산에 울려 퍼졌다.
“형님 떠난 세상이 오늘 유난히 쓸쓸해 보입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립습니다. 형님….”
김씨의 추모식에 대한민국 주먹계 거물들이 빠짐없이 모인 이유가 있다. 또 이들이 김씨의 묘소가 아닌 보육원을 먼저 찾은 사연도 있다.
이날 추모식을 주관한 조병용 대한연합상사 회장은 “(낙화유수) 형님은 법보다 주먹이 앞섰던 시대적 배경으로 주먹계에 이름을 올렸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주먹을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며 “은퇴 이후엔 학원폭력근절과 소년소녀가장, 독거노인 등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 자그마치 20여년 동안 헌신했다”고 설명했다.

‘종로파…명동사단…’
핵심 멤버들 모여

2006년 11월2일 뇌출혈로 별세(향년 75세)한 김씨는 1950∼60년대 낭만파 주먹계를 쥐락펴락했던 동대문사단의 돌격대장을 맡았다. 회칼과 쇠파이프가 아닌 주먹 대 주먹의 맞대결을 펼친 뒤 싸움에 깨끗이 승복하는 미덕을 지녔던 이 시대의 주먹들을 가리켜 ‘낭만파’라 불렀다.
김씨는 당시 김두한과 쌍벽을 이루던 이정재의 사돈이자 후계자인 유지광 계보의 좌장이었다. 동대문사단은 머리가 있는데다 깔끔함을 유지해 다른 주먹패와는 차별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동대문사단의 보스 이정재는 휘문고보를 나왔으며 유지광은 단국대 법대를 졸업했다. 이들은 군사정부의 재판을 받고 죽을 때까지 술,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김씨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울대 상대(52학번) 출신의 깔끔한 매너와 명석한 두뇌로 ‘인텔리 주먹’으로 통했다. 175㎝의 큰 키와 1백kg의 육중한 체구를 자랑했던 그는 말끔한 외모로 많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떨어진 꽃잎이 물에 떠내려간다’란 뜻의 낙화유수란 멋들어진 별명도 서울대 상대 시절 유유자적하게 산다고 해서 여학생들이 붙여줬다고 한다.

그는 1951년 부산 피난 시절 단국대 출신 장윤호를 만나면서 주먹세계로 뛰어들었다. 1962년 이정재가 군사정권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후계자인 유지광마저 정치깡패 혐의로 구속되면서 김두한의 ‘종로파’, 이화룡의 ‘명동사단’과 함께 ‘동대문사단’을 이끈 실질적 보스가 됐다.
싸움실력도 대단했다. 유도와 태권도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체중이 실린 ‘원펀치’로 유명했다. 그의 주먹 한방에 어지간한 주먹들이 모두 쓰러졌다는 후문. 또 ‘발을 손처럼 사용했다’는 말도 후배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5·16 직후 정치깡패로 군사재판 법정에 섰던 김씨는 석방후 군사정부로부터 전라북도 군산시장과 전국구 국회의원까지 제안 받았으나 “군사정권에 협력하기 싫다. 쿠데타 정권을 도우며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은 협객의 길과 다르다”며 거부한 일화 또한 유명하다. 이때 그가 진술한 내용은 주먹세계에서 어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는 절대 깡패가 아니다. 협객이다. 법을 어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시절이었다. 그래도 약한 사람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을 향해서만 주먹을 날렸다. 사람에 따라 내가 걸어온 길을 비난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한 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협객의 길을 걸어왔음을 자부한다. 다시 태어나도 협객의 길을 걷겠다.”

이후 주먹계에서 은퇴한 김씨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선행을 베풀었다. 세상을 떠나기 5년전 부터 당뇨 증세로 1백kg의 몸무게가 60kg으로까지 줄었을 정도로 고생했지만 봉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씩 투석을 하는 와중에도 양로원과 고아원을 돌면서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노후를 바쳤다.
광명보육원도 김씨가 설립해 운영했던 곳이다. 김씨의 묘소가 보육원 인근에 위치해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약자는 건드리지 않는다”
은퇴 후 남은 여생 봉사로


2002년부터는 정의사회실천모임 고문으로 활동하며 원로 주먹들과 함께 범죄추방운동을 벌였다. 틈나는 대로 소년교도소를 방문해 “한때 잘못으로 이곳에 왔다고 좌절하지 마라. 이를 악물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교화활동에 힘을 쏟았다.

특히 김씨는 자식들에게 한 푼의 유산도 남기지 않았다. 2004년 서울 마포구 상수동 자택을 비롯해 전 재산을 사회복지센터 건립기금으로 내놓았다.
조 회장은 “약한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의리를 지키고 협객으로의 도리를 다한 1세기에 한 번 나오기 힘든 분”이라며 “누구보다 애국심이 강했고, 남을 돕는 일도 자신의 공적을 알리기보다는 묵묵히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닌 큰형님이 주먹들 사이에선 협객의 표본이 되고 있어 후배들도 뜻을 받들고자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 송원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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