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땐 명망 높은 교수, 돌아올 땐 처자식 죽인 살인자
패륜행각 의한 은둔생활, 지칠 대로 지친 후 눈물로 후회
내연녀와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부인과 어린 자식까지 무참히 살해한 전직 교수가 9년 만에 돌아왔다. 떠날 땐 명망 높은 교수였지만 돌아올 땐 은신생활에 지친 살인자일 뿐이었다. 9년 전, 아내에게 불륜행각을 들킨 이 남성은 이혼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부인을 살해했다. 자신의 범행이 들통 날까 두려웠던 범인은 끝내 6살짜리 아들까지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범행 후 내연녀와 일본으로 건너가 오랜 은신생활을 했던 범인은 불법체류자 신분이 적발되면서 9년의 도피행각을 마무리했다. 패륜행각에 의한 은둔생활로 지칠 대로 지친 범인은 뒤늦게 눈물로 후회를 했다.
지난 1999년의 마지막 날, 서울시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는 의문의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피해자는 두 명. 30대 여성 박모 (당시 32세)씨와 그녀의 6살배기 아들이었다.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피살 당한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 채 나란히 누워 있었다. 범인은 범행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불로 시신을 덮은 뒤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유력한 용의자는 이들의 남편이자 아버지인 모 대학 교수 배모(45)씨. 그러나 배씨는 이들이 숨진 다음날부터 종적을 감췄다. 이후 9년 동안 ‘모자살해사건’은 베일에 가려졌다.
9년 만의 송환
그리고 9년 후인 지난달 24일, 사라졌던 배씨가 국내에 송환되어 경찰조사를 받으면서 미스터리는 풀렸다. 역시 범인은 배씨였다. 7년간 이어온 불륜관계가 들통 난 뒤 이혼을 하려했던 배씨는 이 문제로 아내와 다투다 아내와 아들을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다.
사건의 발단이 된 것은 1992년. 당시 배씨는 모 대학교에서 조교로 일을 했고 입학준비생이었던 박모(38·여)씨를 만나게 된다.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던 이들은 이내 애인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때도 배씨는 결혼을 한 상태였고 이들의 사랑은 ‘불륜’이란 꼬리표가 붙을 수밖에 없는 비정상적인 관계였다.
그렇게 7년여를 만나오던 이들을 방해한 것은 배씨의 아내 박씨였다. 우연히 남편에게 내연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 비밀스런 오랜 만남이 발각된 뒤에도 배씨는 적반하장이었다. 오히려 이혼을 요구한 것.
그러나 순순히 이혼요구를 들어줄 박씨가 아니었다.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남편에게 뒤통수를 맞은 아내로서 이혼하자는 남편의 뻔뻔스런 요구가 달가울 리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문제를 놓고 싸우는 날이 잦았다. 내연녀 박씨와의 사이도 벌어질 위기였다. 언제 이혼을 할 거냐는 내연녀의 압박은 또 다른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국 배씨는 아내를 살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사건 당일인 1999년 12월31일, 노원구의 자택에서 이혼문제로 싸우던 아내의 목을 졸라 숨지게 했다.
배씨의 파렴치한 행각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내를 살해한 사실이 들통날까 두려웠던 배씨는 옆방에 있던 아들(당시 6세)을 집 밖으로 데리고 나와 놀이터 등을 돌아다니다 오후에 귀가해 아내 옆에 눕힌 뒤 머리에 비닐봉지를 씌워 숨지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다. 그는 범행 사실을 숨기기 위해 시신 위에 이불을 덮고 식용유를 뿌려 불을 지르기도 했다.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배씨는 범행 다음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던 내연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배씨는 애인에게 ‘아내와 아들을 죽였다’고 털어놨고 3~4일 후 국내에 들어와 도피자금을 만들었다. 그는 은행 대출 등으로 1억3천만원 정도의 자금을 만든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본으로 도망쳤다고 해서 그의 죄가 가려진 것은 아니었다. 경찰은 수사 결과 배씨를 처자살해의 용의자로 지목했고 지명수배를 내렸다. 배씨가 재직했던 서울 소재 S대는 2000년 5월 배씨를 교수직에서 직권면직했다.
배씨가 이처럼 일본에서 내연녀와 함께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사이 한국에서는 2002년 3월 배씨의 처가에서 배씨를 상대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재판부는 “피고는 원고들에게 1억1천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는 동안 배씨는 일본에서 식당 종업원과 주방장 등의 직업을 갖고 은신생활을 했다. 한때는 이름 있는 대학의 교수님이었지만 아내와 자식을 살해한 살인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녹록치만은 않았다.
최근에는 타인명의로 작은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굴곡진 9년간의 도피행각은 현지 경찰에 불법체류자 신분이 적발되면서 끝을 맺게 됐다.
뒤늦은 후회의 눈물
결국 그는 지난달 24일 국내로 송환됐다. 서울경찰청 외사과는 배씨와 내연녀 박씨의 신병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인터폴로부터 인계받았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입국 즉시 서울 노원경찰서로 인계돼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9년 전 배씨가 저질렀던 범행과 오랜 도피생활이 낱낱이 밝혀졌다.
경찰조사에서 배씨는 “언제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제대로 잠을 이룬 날이 없었다”고 털어놓으며 연신 후회의 눈물을 흘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후회는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서울 노원경찰서는 지난달 26일 배씨에 대해 살인과 사체손괴 등의 혐의로, 또 배씨의 애인 박씨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배씨의 도피를 도운 혐의(범인도피)로 각각 구속영장을 신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