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05.21 17:09
강력범죄를 범했음에도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원치 않는다면 형사 처벌할 수 없다? 바로 ‘반의사 불벌죄’ 이야기다. 최근 일부 가정폭력이나 연인 폭력은 물론이고 일반 폭행범을 대상으로 하는 반의사 불벌죄의 적용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죄질이 상대적으로 경미하거나 당사자끼리 해결하는 게 바람직한 범죄가 적지 않다는 점이 그 근거가 됐을 것이다. 물론 무려 70년 이상 지난 법 조항 하나로 피해자가 처벌을 바라는 의사표시를 하지 않아도 수사하고 기소하고 재판해 처벌할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가 처벌을 바라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거나 처벌을 바란다는 처음의 의사표시를 철회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다시 의사표시를 하면 공소를 제기할 수 없고, 공소가 제기됐을 때는 공소를 기각해야 한다. 아마도 이 조항의 원래 입법 취지는 ‘지나친 범죄화(overcriminalization)’로 인한 전과자의 양산을 방지하고, 합의를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화해시키려는 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이 법 조항의 원래 취지에 가장 적합하다고 볼 수 있는 ‘과실치상’과 같은 범행 의사가 없었지만 과실·실수로 범죄를 범했을 경우, 그 실수에 대한 책임의 하나
비교적 최근까지만 해도 대부분 경험적·임상적 연구서 마리화나 흡연이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미치는 심각한 부정적 영향은 물론이고 사회적, 직업적 방해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줬다. 이런 이유에서 대부분의 국가에서 마리화나 흡연 등을 범죄로 규정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1996년 캘리포니아주를 시작으로 제한된 의료용 마리화나를 합법화하고 있으며, 일부 주에서는 기호용 마리화나 이용까지 합법화했다. 이 같은 추세는 보건의료 전문가들의 ‘말기나 불치의 질병을 앓고 있는 자격을 갖춘 환자가 마리화나를 의료용으로 이용하면 형사처벌을 받지 않으면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마리화나에 대한 재분류 작업(Marijuana reclassification)‘을 시작했다고 한다. 마리화나 재분류는 범죄로 규제했던 것을 합법화(Legalization)하거나, 아예 비범죄화(Decriminalization)하자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여기서 마리화나의 합법화는 마리화나에 대한 모든 법률적 금지를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법률적 금지가 제거될 경우, 담배나 술처럼 일반 성인이 의지에 따라 마리화나의 구매나 소비가 가능하다
경제적 불평등이 범죄학에서 심각하게 다뤄질수록 “왜 교도소에는 가난한 사람으로 가득 채워졌는가” “형사사법제도는 약탈적인 기업 관행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지 않은 채 광범위한 해악을 야기하는 부유층을 처벌하지 않는가” 등에 대한 물음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사법제도가 상식 밖에서 작동한다고 여기는 몇몇 사람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명언이 현실을 반영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인식은 비단 국내에 국한되지 않는다. 실제로 미국서도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교도소로 간다(The Poor get Prison, the Rich get Richer)”는 말이 성행하고 있다. 이 같은 인식은 ‘범죄에 대한 강력 대응과 범죄와의 실제 전쟁의 통념(The Real War on Crime and the Tough on Crime Myth)’에 대한 하나의 해독제기도 하다. 즉, 형사사법제도서 작용하는 계측 편견을 보기 어렵게 하는 사회적으로 구축된 장벽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모든 범죄가 동등하게 처벌되지 않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사법제도가 가장 강력하게 대응하는 하류 계층이
일반적으로 같은 행동이라도 사람에 따라 비난과 책임이 다르다고 한다. 범행을 저지른 청소년에게 성인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 처벌하지 않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청소년이 심각한 가해자임에도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벌을 내리는 이유는 뭘까? 흔히 인간을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합리적이라는 게 철학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인간은 계산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통보다는 쾌락이, 손해보다는 이익이 되는 것을 합리적으로 계산해 선택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에 맞게,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면 당연히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대한 책임도 자신에게 있기 마련이다. 바로 고전주의 범죄학의 토대다. 성인이라면 처벌받아 마땅한 행위를 미성년자라고 처벌하지 않는 것은 미성년자는 자유의지에 따라 자기 행동을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할 만큼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같은 맥락서 성인이면서도 형사처벌이 마땅한 범행을 하고서도 처벌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정신이상 항변(Insanity defense)의 주장이다.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라면 형벌의 기본적 전제인 합리적 계산과 선택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이들에게 책임을 묻고 처벌
우리는 단 하루라도 각종 범죄에 관한 뉴스를 접하지 않는 날이 없을 만큼, 언론의 폭력 보도에 일상적으로 노출돼있다. 범죄 관련 보도를 접한 사람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작지 않다. 언론을 통한 범죄 묘사의 영향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만큼 중요한 주제인 동시에 명쾌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범죄와 관련한 언론의 폭력 묘사와 현실 세계서의 폭력성이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학계서 관심 갖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학계에선 언론을 통한 폭력성 노출이 대중의 공격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에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다만 범죄 행위의 노출이 대중에게 어떤 식으로 잠재적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대다수 범죄학자들은 ‘모방범죄(Copycat Crime)’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언론이 직접적으로 폭력을 야기하는지에 관해서는 별다른 논쟁이 없었다. 반면 언론의 폭력성이 미치는 잠재적인 영향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특히 영상매체를 통한 노출이 ‘둔감화 영향(Desensitizing Effects)’으로 작용해 어린이·청소년의 잠재적 공격성이 커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 같
누군가를 벌할 때면 죄에 상응한 처벌이라는 비례의 법칙을 주문한다. 그것이 아마도 민주국가의 법치주의고, 사법 정의를 실현하는 길일 것이다. 어쩌면 아주 간단하고 쉬운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또한 현실이다. 가장 기본적인 기준으로 우리는 소위 ‘양형 기준’이라는 것을 갖고 있는데, 이는 법원이 피고인의 형량을 결정할 때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죄의 무게를 정하는 측도이자 저울이다. 정해진 저울로 죄와 벌의 무게를 결정해 법원이 형벌을 선고함에도 논란이 빈번한 건 왜일까? 법원이 선고한 형량이 대중의 법 감정을 제대로 어루만지고, 충족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울질이 잘못된 걸까? 아니면 저울 자체가 잘못된 걸까? 법원은 사법 정의의 마지막 보루다. 사법 정의 실현은 법치가 우선돼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어쩌면 법치라는 건 기계적·기술적인 것이다. 법에도 눈물과 감정이 있어야 한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수긍할 수 있는 법치를 위해서라도 시민의 법 감정을 고려한 양형 기준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8명은 범죄자에 대한 법원의 형벌이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국민의 법 감정과 양형 기준 사이
범죄 피해자화, 즉 범죄 피해를 당할까봐 두려워하는 현상은 여성·노인 계층서 불균형적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통계상으로는 이들이 가장 빈번하게 범죄 피해를 경험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위험한 장소와 시간에 더 많이 노출되는 청장년층이나 청소년이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쉽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렇다면 여성이나 노인이 범죄 행위의 피해자가 될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음에도 범죄 피해자화에 대한 두려움이 더 높다는 것을 역설적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사전에 더 주의하고 조심하기 때문에 실제 범죄 피해를 겪는 빈도가 높지 않은 걸까? 범죄 피해자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여성이 느끼는 피해자화의 두려움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바로 여성에 대한 범죄의 특성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범죄에 대한 일반화된 두려움은 실제 피해 빈도에 비해 불균형적으로 높은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젊고 여성의 경우 범죄에 대한 두려움을 강간의 두려움이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하기까지 한다. 통계와 현실의 격차는 여성이 범죄 피해자가 되는 빈도가 낮음에도 두려움이 높은 이유가 될 수 있다. 배우자 폭력, 가정 폭력, 성폭력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
공직자의 행동은 소속 기관의 업무수행 평가는 물론이고 국민의 신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경찰은 제복을 입고 법을 집행한다는 이유로 국가권력의 상징으로도 여겨지기에 더욱 그렇다. 게다가 경찰은 시민 인신의 자유까지 제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기에, 경찰관의 사적인 행동에 큰 의미가 부여되기 마련이다.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경찰관의 비위나 일탈 행위가 더욱 우려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요한 범죄학 법칙 중 하나가 범죄의 원인을 밝히고 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법률을 위반하는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할 뿐 아니라, 어떻게 경찰관의 비위나 일탈을 방지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적어도 경찰은 시민의 권리를 다른 침해로부터 보호하는 유일한 목적을 가지기에, 그런 침해와 위반의 근원이 되지 않음으로써 그와 같은 진정성을 확인 및 유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곧 경찰관의 어떠한 일탈 행위도 경찰과 대중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기 마련임을 의미한다. 즉, 시민의 권리가 타인에 의해 침해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할 경찰관이 자신의 일탈 행위로 다른 시민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사인과 사인
드론이 주문한 음식을 배달하고, 택배도 대신한다. 과학기술이 우리에게 주는 편리함이라는 선물이다. 안타깝게도 그에 따른 청구서도 날아온다. 조용한 주택가서 사제 폭탄이 터지고, 차도에 철제 못이 뿌려지기도 한다. 누구의 짓인지 사람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이웃의 CCTV가 잡아낸 범인은 바로 드론이었다. 드론이 우리에게 편리함만 가져다주는 문명의 이기인 줄 알았으나, 안전을 위협하는 흉기로 둔갑하는 순간이다. 드론을 지나치게 이기로만 생각하는 건 아닌지 따져볼 일이다. 당장 경찰을 비롯한 법 집행 또는 형사사법 기관에서는 드론을 법 집행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몰두할 뿐 드론의 위험성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과학기술은 양면적 속성을 지닌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무한에 가까운 편리함을 준 대신 사이버 범죄라는 위험을 안겨줬듯이, 첨단 과학기술은 범죄의 해결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서 활용되지만, 동시에 범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드론 역시 마찬가지다. 드론은 범죄와의 전쟁서 훌륭한 범죄 해결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다만 사제 폭발물을 터뜨리고, 교도소 반입금지 물품을 들여보내고, 마약을 운반하고, 심지어 교도소 재소자를 탈옥시키는 데 이용될 수 있
얼마 전 미국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의 가짜 동영상이 나돌아 큰 소란을 빚었으며, 이전에도 선거 과정서 각종 가짜 뉴스가 나돌아 선거판을 흐리게 하고,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코로나19가 세계를 휩쓸었던 최근 몇 년간 각종 가짜 뉴스로 적지 않은 사람이 백신 접종을 거부하거나 머뭇거리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인명의 손상이 더욱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세계보건기구(WHO)서도 백신 관련 가짜 뉴스와 그로 인한 백신 저항이나 거부를 공중보건에 대한 가장 큰 위협으로 고려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가짜 뉴스는 대중들에게 공포나 우려를 초래하거나 또는 국가경제, 국가의 방위와 공중보건 능력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게다가 인공지능(AI)의 발전으로 가짜 뉴스는 이전보다 빠르고 쉽게 제작되고 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경찰청에서는 ‘가짜 뉴스(Fake News)’ 진단 앱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가짜 뉴스의 급속한 확산은 선거는 물론이고 재정시장, 소비행태, 신뢰와 진정성, 사회관계 등 거의 모든 것을 왜곡시키고 옳고 그름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일부 국가에서는 가짜 뉴스의 점증하는 영향을 차단하기
형벌의 위협이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만든다는 생각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인간은 매우 이성적이고, 사고하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형벌을 경험하게 하거나 가할 수 있다고 위협함으로써, 그 고통을 다시는 감내하기 싫어서라도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극히 상식적인 이 같은 생각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억제(Deterrence)’는 일종의 신념에 가까운 것인데, 그 효과는 실제로 거의 없다. 이런 이유로 억제는 오히려 양형·형벌의 더러운 비밀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학계에서는 엄중한 형벌이 범죄를 예방하기는커녕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극단적인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 또 엄중한 형벌로 대중을 억제하려는 ‘일반 억제’는 물론이고, 이미 형벌이 확정된 범죄자가 장래에 또 다시 재범하지 않도록 하려는 ‘특별 억제’도 그 효과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토로한다. 소위 ‘한계 억제(Marginal Deterrence)’라는 것으로, 형벌의 엄중성은 실제로 억제 효과나 또는 재범을 낮추는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유일한 억제 효과는 형벌의 ‘엄중성(Severity)’이 아니라 형벌의 ‘확실성(Certainty)’
한때 ‘영웅은 태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논쟁이 화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저마다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웠지만, ‘시대의 영웅’이라는 말만 봐도 어쩌면 영웅은 태어난다기보다는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말처럼 말이다. 범죄학서도 비슷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범죄자는 태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논쟁이다. 범죄학에서는 이를 두고 ‘본성(Nature)과 양육(Nurture)의 논쟁’으로 이름을 붙이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물학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의 결합한 결과로 범죄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적으로 타고난 선천적 기질 및 성향과 범죄를 유발하거나 조장하는 범죄적 환경이 결합한 결과가 범죄 성향, 범죄성이라고 한다. 더 쉽게 말하자면 범죄성의 개인적 성향, 기질을 가진 사람이 범죄를 유발, 조장하거나 적어도 용이하게 하는 환경에 처하게 될 때 범죄 발생 개연성이 가장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생물학적, 유전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본성과 후천적인 사회적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양육 요인이 개인의 범죄성에 얼마나 책임이 있을까? 과연 생물학적 본성 요인이 범죄 행위 유발에 더 많은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소비 행태도 예외일 수가 없다. 대면 거래보다 비대면거래가 상거래의 중심이 됐고, 결과적으로 백화점에는 명품 브랜드만 남을 것이라는 과장 아닌 과장도 나온다. 이런 와중에 각종 무인점포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추세다. 상점주에게는 인건비 절감은 물론이고 24시간 영업이라는 달콤함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무인(無人)’이라는 특징이 누군가에게는 무주공산, 그야말로 주인이 없는 공공의 자산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바로 무인점포 절도 이야기다. 무인점포서 절도를 벌이는 이들에게 무인점포는 마치 달콤한 꿀이 가득한 꿀통처럼 갖고 싶고 싶은 게 가득한데도 아무도 없는 그야말로 무법지대가 된다. 한때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양심 냉장고’라는 프로그램이 일종의 양심 시험장이 됐듯이, 요즘 무인점포는 새로운 양심의 시험장이 된 것 같다. 양심 냉장고처럼 이곳도 양심에 따라 물건을 고르고 값을 치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양심 시험장이 우려스러운 이유는 또 있다. 무인점포는 신뢰를 기반으로 가능한 상행위다. 무인점포 절도가 성행하는 건 신뢰가 무너졌음을 뜻한다. 실제로 ‘Legatum’이라는 영국의 Think Tank서 발표한 ‘2023 번영 지수
재난과 사고로부터 근로자의 안전 담보를 최우선 가치로 제정된 ‘중대재해법’이 정치권과 재계서 뜨거운 감자로 부각되고 있다. 근로자의 안전을 위한 것이지만 기업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중소기업이나 사업장에 대해 일정 기간 유예를 허용했으나, 그 유예기간이 종료되면서 이를 더 연장하자는 주장과 당장 시행돼야 한다는 논쟁이 일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과 노동계를 중심으로 하는 시민단체에서는 이미 법이 적용되고 있는 대기업은 물론이고, 일정 규모 이하의 기업들에게 허용됐던 준비를 위한 유예기간이 끝났으니 이제는 모든 기업체에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여당(국민의힘)과 산업계에서는 준비기간이 짧고 기업 부담을 이유로 한 번 더 연장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산업 안전은 여야나 정파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를 대변하듯 세계 각국에선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근로자의 안전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게 사실이다. 이 같은 노력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 중 하나가 바로 영국을 중심으로 일부 국가들의 소위 ‘기업 살인(Corporate Killing 또는 Corporate Homicide나 Manslaughter)’이라는 범죄가 아닐
잊을만하면 접하게 되는 뉴스가 바로 ‘보험사기’ 범죄다. 보험사기는 선진사회의 불편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보험이 발달할수록 보험 사기꾼이 많아지곤 한다. 모든 사기 범죄가 마찬가지겠지만 보험사기는 경제질서를 불안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경제정의를 흔들리게 한다. 사법 정의와 경제정의를 한꺼번에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보험사기는 보험 과정을 속이고 사취하려고 행해지는 모든 행동을 말한다. 보험 청구인이 자신이 자격이 없는 어떤 혜택이나 이점을 취하려고 시도하거나, 반대로 보험사가 마땅한 어떤 혜택을 거부할 때 발생한다고 정의될 수 있다. 보험사 임직원이나 보험 청구인 모두가 보험사기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가장 익숙한 보험사기는 아마도 허위 보험 청구가 아닐까 한다. 이는 기만적인 의도를 가지고 신청된 보험 청구라고 할 수 있다. 보험사기는 오래된 범죄며, 그만큼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보험사에 접수되는 보험 청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매년 엄청난 재정적 손실과 부담을 초래하게 만든다. 보험사기는 의료보험·실업보험·생명보험·자동차보험·화재보험·상해보험 등 거의 모든 보험 분야서 발생하며, 무고한 사람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곤 한
최근 정치적 테러가 연이어 발생해 전 국민을 놀라게 했다. 테러건 아니건, 정치적이건 아니건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도, 용서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이번 정치인에 대한 폭력을 더 우려스럽게 바라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대중적 지명도가 높은 정치인이 폭력의 대상이었다는 점과 그 폭력의 동기와 폭력 행위자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단순한 폭력과 테러는 경계가 다소 애매할 수 있지만, 단순한 폭력이 사적 동기와 목적의 사적 행동의 결과라고 한다면, 반면에 테러는 사적이기보다는 상징성을 강조하는 개인 또는 단체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의 두 정치인에 대한 폭력을 우리가 정치적 테러라고 부르는 것은 물론 언론의 작명이지만, 정치인이라는 공인을 표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 상징성이 더 크고, 정치인과 가해자 사이의 사적인 관계와 동기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언론의 정치적 테러라는 표현은 틀리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같은 정치적 테러가 일어나는가? 다양한 설명과 이유가 있겠지만, ‘급진화(Radicalization)’를 하나의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세계 테러
올해는 세계 각국서 굵직한 선거가 치러진다. 대만에서는 얼마 전 총통 선거가 끝났고, 미국에서는 정당별 대통령 후보자 선출을 위한 선거가 한창이다. 한국에서는 오는 4월 총선이 예정돼있다. 흔히 선거를 두고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말하곤 한다. 아마도 보통·평등·직접·비밀·자유 4대 원칙에 따라 치러지기 때문일 것이다. 선거의 기본원칙을 지키는 것이 민주국가의 사명이기에 국가는 선거와 관련된 법과 제도를 엄격하게 집행하고 있다. 선거의 원칙은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기본을 지키지 않는 사례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선거가 끝나기 전부터 선거법을 위반하는 각종 행위가 적발되기 일쑤다. 선거법은 비교적 엄격한 편이어서 위법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처리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선거사범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흔히들 인간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라고 한다. 흉악한 범죄자조차 사고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보기도 한다. 사실 합리적·이성적이라는 건 인간이 계산할 줄 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범죄 행위를 포함한 모든 행동을, 그 결과 얻어지는 이익과 그로 인한 비용을 합리적·이성적으로 계
최근 경기 북부 지역서 연쇄 살인범이 다방 여주인 두 명을 연이어 살해한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물론 이 같은 유형의 잔혹한 범행이 처음은 아니며, 이보다 훨씬 더 경악스러운 범행이 심심치 않게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살인범이 두 명의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반성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연쇄 살인범이 거쳐온 시간과 삶의 방식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살인범이 살아온 삶의 궤적이다. 그가 지난 20여년을, 흔히 말하는 교도소서 형을 사는 수형자, 재소자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교도소는 유죄가 확정돼 자유형을 선고받은 범죄자를 수용해 다양한 처우로 교화시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다. 때 묻은 옷을 세탁소에 보내듯 범죄인이 교도소라는 세탁소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기대와 동떨어져 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교도소를 세탁소가 아니라 염색공장이라고 비난한다. 교도소에 들어갈 때보다 더 나빠지기가 더 쉽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렇다. 먼저 우리의 교도소가 너무나 큰 시설에 너무나도 많은 재소자를 수용하기에 제대로
최근 야당 대표가 공격받은 일로 세상이 시끄럽다. 정치적 의미와 결과는 차지하더라도 사건이 주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야당의 대표가 공격받은 대상이라는 점에서 사건 자체의 상징성이 작지 않지만,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 앞서 “왜?”라는 물음이 선행돼야 할 것 같다. 왜 그는 야당 대표를 공격했으며, 왜 그런 동기를 가졌으며, 그가 바라는 바는 무엇일까? 테러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연구가 있지만, 실무나 학문적으로 한결같이 동의하는 바는 테러범들이 과거에는 무작위적으로 폭력을 폭발시켰으나 이제는 테러가 무작위 폭력이 아니라 철저하게 표적을 선택한 작위적으로 계획된 폭력에 가깝다는 것이다. 테러범은 테러가 주는 상징성이 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불안을 고조시킬 수 있는 대상을 표적으로 삼곤 한다. 이런 점에서 야당 대표에 대한 테러가 자행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 같은 유형의 범죄를 어떻게 규정하는 게 옳은 걸까? 아마도 신념이라고 믿을 정도로 확신에 찬 범행이라고 규정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야당 대표를 공격한 사람은 왜 확신 범죄자가 됐으며, 무엇 때문에 확신적 신념을 가졌을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확신 범죄는 종교적·정
어느 유명 배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세상을 놀라게 했고, 부고를 접한 많은 사람들은 분노했다. 나아가 그의 죽음은 ‘공개 망신 주기’의 어두운 단면을 부각시켰다. 물론 이 유명 배우의 죽음이 공개 망신 주기가 초래한 비극의 유일한 사례는 아니다. 과거에도 유사한 사건은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수사기관의 수사를 받던 유력 기업인이나 정치인의 안타까운 죽음도, 어쩌면 공개 망신 주기에서 비롯된 비극일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이토록 치명적일 수 있는 공개 망신 주기를 공론화하려는 움직임은 지금껏 그리 부각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종종 목격하게 되는 어두운 사회적 그림자임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공개 망신 주기란 무엇일까? 미국에서는 공개 망신 주기를 ‘Public Humiliation’ 또는 ‘Public Shaming’이라고 표현한다. 보통은 범법자나 수형자, 특히 공적인 위치나 지위에 있는 사람을 불명예스럽게 만들거나 망신을 주는 형벌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형태의 형벌은 물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했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멍석말이’와 같은 사례가 공개 망신 주기의 과거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