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돈이 지방선거를 휘감고 있다.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공천 헌금 등 선거와 관련한 검은 돈거래가 심심찮게 적발되고 있다. 시장과 군수, 구청장 등 기초단체장부터 시·군 의원들 사이에서도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억원대의 돈이 오간 것. 각 당은 서둘러 집안단속에 나섰지만 이미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목청을 높였던 ‘클린공천’은 빛을 잃었다. 정치권도 이러한 ‘검은 거래’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지역 일꾼’들의 막강한 권한에 비해 소홀한 감시는 도처에 유혹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다는 이유에서다.
국회의원에 돈 건네고, 지방의회에서도 뒷거래
선거 끝나면 투자금 회수에 수천억 혈세 ‘펑펑’
지방선거를 앞두고 낯부끄러운 사건들이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 ‘검은돈’을 두고 추격전이 펼쳐지는가 하면 뇌물수수로 공천이 확정된 날 후보직을 사퇴하는 상황이 일어난 것.
지난 16일 펼쳐진 국회의원 보좌진과 현역 군수의 추격전에 정치권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날 오전 이기수 경기도 여주군수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모 커피숍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인 이범관 한나라당 의원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 사이 이 군수의 수행비서는 이 의원의 수행비서에게 인삼제품 홍보용 쇼핑백을 ‘기념품’이라며 건넸다.
돈·돈·돈 때문에
하지만 투명테이프로 봉합돼 있는 쇼핑백을 수상히 여긴 이 의원은 수행비서에게 이 군수의 차량을 추격하도록 지시했다. 이 의원은 또 비서관에게 전화해 경찰에 신고하고 함께 쫓도록 했다.
결국 이 의원의 수행비서는 성남시 분당구 경부고속도로 서울톨게이트 앞에서 이 군수를 붙잡았다. 그리고 경찰과 함께 쇼핑백을 뜯어본 결과 총 2억원에 달하는 5만원권 돈뭉치를 확인했다. 이 군수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으며 정확한 사건경위를 조사받고 있는 중이다.
이 의원은 이번 사건과 관련, “이 군수가 공천에 탈락할까봐 무리수를 둔 것 같다”며 “돌려주려고 했는데 군수가 달아나버려 비서관에게 쫓아가라고 지시했고, 혹시 이 군수 측과 충돌할까봐 내 비서관이 경찰에 신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당장 ‘검은돈 경계령’을 내렸다. 정병국 한나라당 사무총장은 “지난 4년 전 지방선거 때와 비교한다는 공천 헌금과 관련한 소문은 없다”며 “만약 공천 관련 금품수수 행위가 발생한다면 즉각 후보 자격을 박탈하고 검찰에 고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 사무총장은 또 “일부 지역에서 당협위원장들이 자기 입맛대로 공천을 하는 ‘사천 논란’이 일고 있다”며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실제 사천이 발생할 경우 강력히 대처할 것”이라고 집안단속을 강하게 했다.
민주당은 이 사건에 혀를 찼지만 지난 21일 김충식 해남군수 사건으로 한나라당과 같은 처지가 됐다. 이날 민주당 해남군수 후보로 공천이 확정된 김 군수가 공사업체로부터 1억9000만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게 된 것. 공천 확정의 기쁨도 잠시, 제보를 받고 출동한 경찰청 특수수사과의 압수수색으로 돈다발이 발견되자 김 군수는 후보직을 사퇴했다.
이 밖에도 지난달 말에는 현직 국회의원 보좌관이 기초의원 2명으로부터 억대의 공천헌금을 받아 적발됐으며 지방의원과 지방의원 예비후보자 사이에서도 공천을 위한 돈이 오가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지난달 29일에는 전북도청 기자실에서 “민주당 소속 익산시의회 한 의원이 지난해 4월 시의원 출마를 모색하던 당직자에게 7~8000만원의 헌금 준비를 요구했다”는 내용이 담긴 녹취록이 공개돼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해당 선관위는 진상조사와 함께 시의원 등 5명을 검찰에 수사의뢰했다.
‘클린 공천’을 강조한 여야의 목소리와는 달리 ‘돈 공천’ 관행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정치권 관계자들은 “지역에선 ‘공천 받으려면 기초단체장 예비후보는 수억원, 지방의원 예비후보는 수천만원을 내야 한다’는 식의 얘기가 공공하게 퍼져 있는 게 현실”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처럼 지방선거에서 ‘검은 돈’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전문가들은 지자체장들의 강력한 권한과 소홀한 유권자들의 감시를 지적한다.
이번 6월 지방선거에서 전국 동시선거로 선출하는 인원은 광역자치단체장·기초단체장·광역지역의원·기초지역의원·광역비례의원·기초비례의원·교육감·교육의원 등 총 3990명에 달한다. 이 중 시장·군수·구청장 등 230명의 기초단체장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사업을 계획하고 집행할 수 있는 의사 결정권과 예산집행권이 그것이다.
지자체의 한해 예산은 평균 3000억원, 일반시로 분류되는 성남시의 경우 1년 예산만 약 2조원이다. 여기에 인허가권과 공무원사권까지 쥐고 있어 ‘뇌물의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것. 지자체장에 대한 소홀한 감시는 이러한 유혹의 향기를 더욱 짙게 한다. 지난 2006년 선출된 민선 4기 지자체장의 경우 230명 중 97명(42.2%)이 각종 비리·위법 혐의로 기소된 것도 이 같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소통령’급 강력한 힘
권한이 막강하다보니 지자체장을 거쳐 국회의원에 도전했던 이전과는 달리 국회의원 출신 인사들의 지자체장 도전도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이달 초 중앙선관위 예비후보 등록 현황에 따르면 구청장과 시장 선거에 나선 전직 국회의원만 10여 명이 넘는다.
이와 관련 정치전문가들은 “지자체장 개인의 막강한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정비가 시급하다”며 “지금과 같은 상황으로는 지자체장 선거는 검은 돈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