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사후 정치 재개 움직임을 보여 온 ‘DJ의 후예들’ 사이에 분화의 조짐이 움트고 있다. 이들 중 이미 동교동계와 박지원 의원 사이에는 미묘한 균열의 기미가 나타난 바도 있다. 이어 동교동계 내부에서도 정치적 위치 선정을 두고 서로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 추모사업과 ‘DJ 정신 계승’을 이유로 기념사업회와 ‘행동하는 양심’ 등 크고 작은 모임들도 생겨나고 있다. 이에 따라 ‘DJ의 적자’를 둔 개인 혹은 집단의 경쟁구도가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정치권은 호남 지역의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이러한 움직임이 구체화 될 것으로 보고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사후 DJ후예들 ‘따로 또 같이’
동교동계 4월 김대중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 창립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 친노 진영이 추모사업, 정책연구, 가치계승 등을 이유로 재단, 연구소, 시민단체, 정당 등으로 분화했듯 김대중 전 대통령을 따랐던 이들 사이에서도 ‘하나의 뿌리’를 기반으로 다른 가지를 뻗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동교동계에서는 DJ의 추모 사업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권노갑 전 고문 등 동교동계 인사 20여 명은 지난달 25일 모임을 갖고 이달 중 김대중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를 창립키로 의견을 모았다.
뿌리엔 ‘DJ 정신’
가지마다 다른 목표
동교동계 좌장격인 권 전 고문과 DJ 차남인 김홍업 전 의원이 준비위 공동의장을 맡았으며 김옥두·남궁진·윤철상·장성민 전 의원 등 동교동계 인사들과 시민사회단체, 종교계 인사들이 참여키로 했다. 이들은 DJ 서거 1주기를 기점으로 회고록 출간, 1주기 추모행사 개최 등 다양한 추모사업을 벌인다는 계획이다.
DJ 참모들의 모임인 ‘행동하는 양심’이 목표로 하는 바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달 26일 창립대회를 열고 공식출범한 ‘행동하는 양심’에는 국민의 정부 시절 대통령 비서관을 지냈던 김대곤·조순용·기동민씨와 설훈·우원식·이인영 전 의원,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등 과거 김 전 대통령을 보좌했거나 그의 정치철학을 지지하는 시민단체·종교계·학계 인사 13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DJ 가치 계승’을 내걸고 지난 1월 시작된 ‘김대중 독서클럽’, ‘김대중 배우기 강좌’ 및 ‘김대중 청년 캠프’ 같은 사업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의 계승 작업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김대중 배우기’ 전국 순회강연, 학술심포지엄, 서거 1주기 추모행사를 진행하는 한편, ‘김대중 인권센터’ ‘김대중 리더십센터’ 등의 설립을 추진할 예정이다.
창립식에서 “김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이었던 만큼 그의 철학과 가치를 창조적으로 계승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이 특히 중점을 두는 것은 ‘젊은 세대로의 DJ 가치 계승’이다. ‘행동하는 양심’은 발기 취지문에서 “김 전 대통령의 철학과 가치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민주·평화·개혁세력의 단합과 연대를 지향하며, 젊은 세대들이 김 전 대통령의 정신을 계승·실천하는 주역이 될 수 있는 사업을 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들의 현실정치 참여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향후 ‘제2의 동교동계’로의 성장 가능성이 있는 젊은 참모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행동하는 양심’측도 “김 전 대통령의 사상을 계승하는 올바른 가치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좋은 정치를 해나가면 이를 지원할 것”이라고 밝혀 현실참여 의지를 시사했다.
40~50대 참모출신 인사들 ‘행동하는 양심’ 결성
한화갑 전 대표 ‘DJ 정신 계승’ 평화민주당 창당
‘현실정치’에는 한화갑 전 대표의 ‘평화민주당’이 더 적극적이다. 한 전 대표는 ‘DJ 정신 계승’을 들어 신당을 창당했다.
한 전 대표는 “18대 총선 이전부터 창당 권유를 받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종합한 후 창당을 결심했다”면서 “한국 야당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국민 지지를 끌어들여 평화적 정권교체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새로운 정당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소외당한 민주개혁세력에게 문호를 개방, 중도개혁정당을 건설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평화민주당은 이미 지난 1월 선관위에 창준위 결성신고를 마쳤으며 최재승 전 의원을 기획단장으로 창당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시도지부 창설 후 8일 중앙당 창당대회를 갖고 본격적으로 지방선거 체제로 전환한다는 계획이다.
DJ의 후예들이 여러 갈래의 길을 걸으면서 각 세력 간 배제와 견제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어느 모임도 DJ를 따랐던 이들을 온전히 품지 못하고 있는 것.
기념사업회에서는 ‘DJ의 복심’으로 불렸던 박지원 민주당 정책위의장과 한화갑 전 대표가 제외됐다. 동교동계 한 인사는 “박 의원은 민주당에서 주요 당직을 맡고 있고 한 전 대표는 신당을 창당했다”며 “이들이 참여하면 기념사업회가 정치집단처럼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가지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
‘행동하는 양심’은 당초 권 전 고문과 임동원·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이해동 목사, 한승헌 변호사, 박지원·신건 의원,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김성재 김대중 도서관장 등을 고문으로 위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임동원·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신건 의원,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가 고문, 김성재 김대중 도서관장이 상임고문, 이해동 목사가 이사장으로 참여했을 뿐 권 전 고문과 일부 동교동계 인사들은 이들의 법인 창립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성민 전 의원은 이와 관련, “과거 대통령을 모시던 사람들과 상관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 같고 어떤 목적과 동기로 모인 것인지도 몰라 동교동계 본류들은 다 빠졌다”고 전하기도 했다.
한 전 대표의 평화민주당 창당도 동교동계 내부에서 온전히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한 전 대표가 창당을 선언한 후 한광옥 민주당 상임고문은 “우리는 지금 이명박 정권의 중간심판과 한나라당과의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시기에 직면해 있다”며 “그런데 최근 일부 인사들이 신당을 창당하고, 또 그와 유사한 분열적인 창당의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한 고문은 이어 “이와 같은 일부상황은 매우 부적절한 움직임이며 그분들이 신중한 판단을 선택해야 될 것으로 판단한다”고 압박했다.
박지원 정책위의장도 한 전 대표의 신당 창당에 대해 “민주당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그는 또 “김대중·노무현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을 이번 지방선거에서 확실하게 심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대해 한 전 대표는 “호남지역 정서를 대변하고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인 평화통일을 지향하고자 평민당 재건에 나서게 됐다”면서도 “현재 동교동 사람 중 뜻이 맞는 일부만이 참여하고 있지만 중앙당 창당 이후에는 동교동계는 물론 폭넓게 인재영입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DJ 후계자는 누구?
개별 레이스 진행 중
그는 또 “지금은 정치적 견해가 달라 서로 다른 정치적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권노갑 전 고문을 정점으로 동교동계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라며 동교동계의 분화에 대한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하지만 DJ를 따랐던 이들이 각각의 길을 선택하면서 이들의 분화는 물론 ‘DJ 후계자’를 둔 경쟁도 각개전투로 진행되고 있다.
우선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들 중에서는 박지원 의원과 한화갑 전 대표가 눈에 띈다. 박 의원은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으며 곧 있을 원내대표 경선에서 도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한 전 대표는 신당 창당 후 6월 지방선거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정치권 한 관계자는 “직접적으로 DJ를 따랐던 이들 중 왕성한 정치활동을 보이고 있는 것은 박 의원과 한 전 대표 정도”라면서도 “적지 않은 동교동계 인사들이 지방선거, 국회의원 재보선, 총선 등을 노리고 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이들의 정치적 우위는 가장 가깝게는 지방선거를 통해 나타날 것”이라면서 “호남에서 얼마만큼 당선자를 낼 수 있는지에 따라 다음 정치 행보도 달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아울러 DJ의 후계자를 ‘호남의 맹주’로 본다면 경쟁구도는 정세균 대표와 정동영 의원, 손학규 전 대표까지 포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 대표는 호남을 텃밭으로 삼고 있는 민주당을 이끌고 있고 정 의원은 호남에서 정 대표를 위협할만한 영향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당의 차기 대권주자 후보 중 하나로 거론되는 손 전 대표도 호남에서의 영향력 확보는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