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으로 되돌아 본> 호암 이병철 회장 회고록

2010.02.16 11:50:08 호수 0호

“나이 잊은 도전정신 한국경제 새 지평 선도”


지난 12일은 삼성그룹의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이 탄생 100주년을 맞은 날이다. 그의 탄생을 기념해 삼성그룹과 생가가 있는 경북 의령, 삼성의 모태가 된 대구지역 등에서는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2008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발자취를 담은 연극을 선보였던 선행칭찬운동본부도 호암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 ‘영웅을 생각하며’를 선보였다.

이번 연극은 오는 18일까지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려 진다. 첫 공연이 있었던 지난 9일 무대 위로 옮겨진 이 회장의 80여년 삶을 되짚어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았다.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탄생 100주년’ 맞아 연극무대 위 환생
오전 6시에서 오후 10시까지 빡빡한 일정…78세 고령에도 현장 누벼


지난 9일 오후 7시30분, 대강당의 어두운 장막이 걷히자 무대에는 하얀 두루마기를 걸친 중년의 남성이 서 있다. 167cm의 작은 키에 다부진 얼굴을 한 그는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이다. 한 올의 머리카락도 흐트러짐이 없는 바른 자세의 그는 단정하면서도 예리한 모습이었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가 강당 안 400여 명의 관객에게 전달될 쯤 호암은 입을 열었다.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똑 부러지는 말투의 그는 어린 아들 이건희에게 자신의 경영 철학에 대해 진지하게 전달했다.

기술이 곧 경쟁력!
선진국 벤치마킹해



호암은 “건희야~기술이 곧 힘이고 경쟁력이다. 기술을 지배하는 사람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야. 삼성 사장이 대한민국의 사장이 되어야 한다. 선진국을 봐라. 그 곳에는 우리가 가야할 현실과 미래가 있다”고 강조했다. 호암은 이어 아들 이건희를 데리고 이웃 나라 일본을 점령하러 떠났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경제선진국인 일본의 경제 마인드와 현실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날아간 것이다.

그는 일본 재계 CEO들이 많이 찾는다는 ‘쇼타로’ 이발관으로 향했다. 쇼타로 이발관은 선대에서부터 3대째 이어 운영을 해오고 있는 곳으로 호암은 이곳에서 그들의 장인정신과 경영철학에 크게 감동받게 된다. 70년이라는 역사를 자랑하며 품질제일주의를 최고로 생각하는 그들의 철학과 대를 이어 이발사를 천직으로 여기는 정신은 호암에게 삼성의 미래경영 철학을 세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무대는 평소 회사 업무 처리에 철두철미한 호암의 면면도 보여줬다. 호암은 하루에도 전국 사업장 곳곳을 누비며 직접 현장을 관리 감독했다. 평소 직원들에 대해서는 ‘사원을 일류로 대접하라’고 강조하는 등 인재양성에 앞장섰지만 핑계가 앞선 직원에게는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네 다른 일을 알아보게”라는 한마디 말을 던진 뒤 뒤돌아섰다. 오랜 기간을 함께 해온 간부에서 외국 협력 바이어까지 대상의 구분은 없었다.

호암은 일반 사원들보다도 이른 아침을 맞았다. 그의 기상시간은 매일 오전 6시. 한 번도 어김이 없었다. 그의 스케줄은 오전 9시 첫 회의를 시작으로 10시30분, 11시40분 시간대별 업무 담당자 미팅으로 이어졌다. 오후 2시부터는 삼성의 각 지사장과 4시간 반에 걸친 릴레이 회의가 기다렸다. 무대 위 10여명의 부하직원들 일명 ‘삼성맨’들은 혀를 내둘렀지만 호암은 단호하게 꾸짖고 회의를 이끌어 갔다.

호암은 오후 6시 반 외국 바이어 미팅, 8시 바이어와의 저녁 식사까지 마친 뒤 밤 10시가 돼서야 하루 일과를 마쳤다. 부인 박두을 여사와 아들 이건희는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지만 호암은 “잠은 4시간만 자면 된다”며 단호히 말했다. 호암은 아들에게 “건희야~ 목표를 성공시키지 못하는 것은 능력이 아닌 집념이 부족해서다. 오늘이 없는데 어떻게 내일이 있겠니. 하루하루가 전쟁인 것을 기억해라”라며 조언한 뒤 늦은 잠을 청했다.    

호암에게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내 경제 산업을 이끌고 간 재벌경영인의 위치에 서기까지 무수한 위기와 고난에 부딪혔다. 특히 호암은 박정희 정부 시절, 일명 ‘사카린밀수사건’으로 불리는 한비사건을 경영인생 최대의 위기를 안긴 한 순간으로 기억했다. 

실제 이 사건은 지난 1966년 삼성이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요소비료공장인 한국비료(이하 한비)를 건설했을 때 발생했다. 한비 직원이 사카린 원료인 OTSA를 당국의 허가 없이 시중에 팔다 적발된 것. 불과 석 달 전 사카린 판매가의 4배에 달하는 벌금을 무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듯 했던 이 사건은 언론을 통해 뒤늦게 공개되면서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왔다.

실패하면 버릴 줄 알아야
그러나 포기는 절대 NO

재벌기업의 밀수 행위로 인식된 이 사건은 국민적인 지탄을 받아야 했고 정치권은 여야 구분 없이 비난을 쏟아냈다. 박 대통령은 직접 전면 재수사를 요구했다. 결국 호암은 이를 계기로 1967년 10월 준공된 지 6개월 만에 한비주식의 51%와 운영권을 정부에 헌납하고 그룹의 명예회장으로 물러나 경영일선에서 후퇴했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호암의 말처럼 이후 삼성은 두 번째 도약의 계기를 맞게 된다. 한비사건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지 1년 뒤인 1968년 1월 호암은 회사의 새해맞이 행사에서 컴백을 알렸다. 일부에선 그의 컴백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도 있었다. 앞서 한비를 나라에 바친 후유증이 클 것이라는 해석 탓이었다.

그러나 단 6개월 뒤 호암은 그들의 우려가 기우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줬다. 호암은 일본 아사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전자산업은 앞으로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분야이므로 이에 도전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렇게 1969년 1월 탄생한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 호암은 1969년 10월 경기도 수원에 45만평, 경남 울주군에 70만평의 삼성전자 공장 부지를 마련했다.

삼성전자의 생산량은 500만대에서 700만대 이후 1981년에는 1000만대 생산에 성공했다. 1982년에는 컬러텔레비전을 생산하기 시작해 한국 전자산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도 받았다. 호암은 삼성산요와 삼성NFC, 삼성코닝 등을 통해 전자산업의 기초를 다진 후 제일합섬과 호텔신라,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 삼성항공, 삼성종합건설 등을 세워 그룹의 골격을 잡았다.

당시까지 선진기업의 벤치마킹으로 앞선 일본을 쫓아가는 ‘미투’전략으로 거듭된 성공을 이룬 호암은 이때부터는 직원들에게 미래를 그리라고 주문했다. 그는 “더 이상 선진국 따라가기는 의미가 없다”며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비장의 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자신 있게 내민 카드는 ‘반도체’였다. 호암은 1980년대에 들어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으로 기업인으로서 생애를 건 모험을 시도했다.
 
반도체와 컴퓨터 사업에 진출하기로 한 것. 이 때 호암의 나이가 이미 75세였다. 반도체 사업은 주변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혔다. 일본 반도체 연구자인 산켄전기의 오타니 다이묘 회장은 호암에게 “이 회장님, 저는 평생 반도체를 연구해 왔지만 아직도 반도체를 다 알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반도체는 젊은 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라고 조언했다.

‘위기를 기회로’ 한비사건 딛고 삼성전자로 ‘우뚝’
‘준비는 철저히 실행은 빠르게’ 반도체 시장 정복


호암 측근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삼성맨들은 그에게 위험 리스크가 너무 크다며 만류했다. 그러나 호암의 다짐은 확고했다. 그는 “반도체만이 한국의 미래”며 “반도체 사업을 성공시켜야 삼성이 크고 나라가 성장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1983년 2월6일 밤 호암은 중대 결정을 한다. 호암은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홍 회장, 누가 뭐래도 삼성은 반도체 사업을 할 것이오. 이 사실을 3월15일자 중앙일보에 발표해 대내외에 알려주시오”라고 전했다.

호암 자신과 삼성의 미래가 달린 결정의 순간이었다. 무대 위 과거를 회상하던 호암은 이 날을 삼성을 세계 최고로 이끈 역사적인 날이라고 손꼽았다. 그는 옆에 자리한 이건희에게 “1등은 하는 것도 어렵지만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며 “삼성이 세계 1위를 해야 우리나라가 1위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주문했다. 연극이 막바지에 접어들 때 쯤 호암은 아들 이건희를 회장에 취임한다는 발표와 함께 이·취임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호암은 아내 박두을 여사와 함께 ‘청산에 살으리랏다’,‘선구자’를 함께 부르며 이건희 회장의 취임을 축하했다.  이 자리에서 호암은 아들에게 훌륭한 경영인이 갖춰야 할 덕목을 읊었다. 호암은 첫째, 훌륭한 경영인은 덕망을 갖춘 인격자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나는 회사를 설립하기 전에 제일 먼저 노예를 훼방시켰다. 마찬가지로 사원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평등한 존재로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둘째, 경영인은 탁월한 지도력을 갖춰야한다. 셋째, 경영인은 사람들의 신망을 얻어야 한다. 넷째, 경영인은 창조력의 노예다. 다섯째, 경영인은 분명하고 확고한 판단력이 필요하다. 여섯째, 경영인은 모든 결정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일곱째, 경영인은 국제적 감각과 미래 지향적인 감성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했다. 

호암은 다음 세대에게 창조와 도전의 메시지도 남겼다. 그는 “세계는 지금 제 3의 산업혁명을 앞두고 있다. 향후 세계경제는 우주항공사업, 정보통신, 해양개발, 고분자 화학결합, 친환경 산업 등이 지대한 관건이다”며 “미래 산업에 대한 창조적 사고를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후 폐암으로 인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호암은 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뒤를 이을 이건희 회장을 찾았다. 그는 이 회장을 불러 두 손을 꼭 잡은 채 “건희야~큰일 하는 사람은 늘 외로운 법이다. 힘든 것도 그렇지만 외로운 것도 이겨내야 한다. 고맙다. 이제는 너한테 모든 걸 맡길 수가 있겠구나”라고 전했다.

호암의 반도체 사업
의지와 믿음의 산물 

이건희 회장에게 당부의 말을 마친 호암은 그렇게 삶을 마감했다. 당시 1987년 11월19일 오후 5시5분. 그의 나이 78세였다. 호암의 영면 이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 빈소에는 정재계 인사의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11월23일 장례식에는 전 조계종 총무원장 녹원 스님이 법어를 했고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등이 조사를 했다.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일본에서는 훈일등서보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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