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날 수 없는‘조폭의 늪’<심층취재>

2009.12.01 09:28:04 호수 0호

가입은 ‘선택’ 탈퇴는 ‘죽음(?)’

‘조직을 배신하면 반드시 보복한다.’ 조직폭력배(이하 조폭)의 행동강령 첫 번째에 해당하는 이 법칙이 실제 상황으로 벌어지고 있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조폭의 늪’은 이 같은 살벌한 규칙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직에서 빠져나오려다 손가락을 절단하고도 폭력배의 굴레에서 벗어나오는 데 실패한 한 조직원의 고백으로 이 실상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조폭사관학교’ 에서부터 철저히 세뇌시켜 발을 뺄 수 없게 만드는 조폭의 세계를 취재했다.


조직 이탈하려는 조직원에 ‘손가락 절단’ 강요
협박 못 이겨 신체훼손해도 “탈퇴는 생각 마”

“제가 죽을 각오를 하고, 죽을 고비도 넘기고, 이런 선택을 했던 것은 이번 일(신고)로 인해 똑같은 상황을 방지하고 가족들과 오순도순 살고 싶어서입니다.”
스스로 손가락까지 자르면서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줬던 이모(25)씨. 그러나 그의 선택은 경찰서 행이었다. 몸담았던 조직을 신고하는 것 외에는 조폭생활에서 헤어 나올 방법이 없었던 탓이다.

서울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이씨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2002년 ‘홍성식구파’란 조직에 가입했다. 단지 멋있어 보인다는 철없는 이유에서였다.  2000년 두목 방모(42)씨를 중심으로 결성된 홍성식구파는 도박장, 유흥업소 등을 운영하며 조직폭력 활동을 했다. 특히 이들은 외부세력과의 다툼에 대비해 늘 흉기를 준비하고 조직 강화를 위해 반대세력 실세의 아킬레스건을 절단하는 등 흉악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승승장구하며 세를 불리던 홍성식구파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2001년 두목과 간부 등 8명이 구속되면서부터다. 당시 대검은 조직폭력배 집중단속을 실시했고 ‘양은이파’의 조양은 등 두목 10여 명이 구속된 바 있다. 이 일로 조직은 사실상 와해됐다.

“멋있어 보였는데…”
남은 건 잘린 손가락뿐

이런 가운데서도 홍성식구파는 재건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 2007년 두목 방씨 등 주모자들이 출소하면서 대대적인 조직 재정비가 시작됐다. 특히 이들이 중점을 둔 것은 부하들의 충성심을 고취시켜 조직의 기강을 세운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한번 무너진 조직의 기강을 바로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금난 등 조직의 문제가 드러나자 일부 조직원이 이탈 움직임을 보이는 등 조직이 삐걱거리기도 했다. 이에 행동대장 한모(33)씨 등은 조직 탈퇴의사를 밝힌 부하들에 대해 폭행과 협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지난 3월20일에는 행동대원 허모(29)씨가 조직을 탈퇴하려는 조직원 5명을 홍성읍 금마면 굴다리 밑으로 불러 “조직 생활을 계속 할 거면 손가락을 잘라서 바치고 그렇지 않으면 홍성을 떠나라”고 협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3월22일에는 또 행동대원 강모(31)씨가 같은 이유로 부하 7명을 인적이 드문 부둣가로 데리고 가 엎드려뻗치게 한 다음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로 이른바 ‘줄빳다’ 60대를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협박과 폭행에도 부하들의 이탈 움직임은 계속됐다.

이에 행동대원들은 본보기로 삼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마수에 걸려든 이는 바로 이씨. 당시 조직을 떠나겠다고 다짐한 그는 아내와 초등학생 아들을 친척집에 보낸 뒤 서울, 대전 등을 전전하며 5개월간 도피생활을 했다. 그러다 지난 8월 말 홍성으로 돌아오자 곧바로 행동대원들의 타깃으로 낙점됐다.

한씨 등은 이에 지난 9월24일 홍성읍 구학면 구항리에 있는 전원주택으로 이씨를 납치했다. 그리고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조직생활을 계속 할 거면 손가락을 잘라라”고 협박했다. 조직을 떠나 가족과 함께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었던 이씨였지만 인적이 드문 곳에서 흉기까지 들이대며 가해지는 협박을 이길 수는 없었다. 목숨마저 위협하는 무서운 강요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한씨가 건네는 흉기를 받아 왼쪽 새끼손가락을 두 번 내리쳤고 손가락 중간마디까지 잘려나가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이후 이씨는 근처 병원으로 가 치료를 받았지만 이미 손가락의 신경은 죽은 뒤였고 나머지 손가락의 신경마저 마비됐다. 단지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조폭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가 훼손된 신체를 보며 후회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손가락은 잘렸지만 어떻게 해서든 조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이씨의 마지막 선택은 결국 ‘신고’였다. 그는 하급조직원 6명과 함께 몸담고 있는 조직을 경찰서에 신고했다. 이씨는 경찰조사에서 “폭력조직은 내가 생각한 멋있는 세계가 아니었다”며 후회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지난달 24일 한씨 등 7명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했고 달아난 조직원 3명을 수배중이라고 밝혔다.

이 사건은 영화 속에서나 보던 조폭들의 끔찍한 행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는 조폭 세계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행동강령이기도 하다. 훈련된 조직원들이 쉽게 빠져나갈 수 없도록 만들어 세를 불리는 것이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배신은 곧 죽음’
철저한 세뇌 교육

지난 6월 덜미를 잡힌 ‘이태원파’ 역시 이와 관련된 행동강령을 정해두고 활동을 했다. 고학력에 깔끔한 외모 등을 갖춘 ‘엘리트 조폭’을 선발해 화제가 됐던 이태원파 역시 여느 조직과 다름없이 조직원들의 충성을 첫 번째 덕목(?)으로 꼽았다. 이를 위해 일본 야쿠자를 모방해 ‘조직을 이탈하면 손가락을 자른다’는 규칙을 만들어 조직원들에 절대적인 충성심을 강요했다.

실제로 지난 2006년에는 이태원의 한 호텔에서 조직을 탈퇴하겠다는 행동대원 이모(26)씨 등 7명에게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위협한 사실도 드러났다. 경찰청 관리대상 조폭 중 국내 최대 조직이었던 ‘청하위생파’ 역시 배신자는 반드시 보복한다는 행동강령을 우선으로 해 활동했다. 이처럼 대부분의 조직들은 조직원들에게 선배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세뇌시키는 교육에 공을 들인다.

대부분 조폭조직 조직원 충성심 위해 ‘배신자 보복’ 강령 마련
조폭사관학교에서부터 세뇌…폭력조직 굴레 평생 못 벗어나


전직 조직폭력배이자 조폭사관학교를 전담했던 A(50)씨는 “조직원들을 조직에 순응하고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일원으로 만드는 것이 훈련의 가장 큰 목적”이라고 털어놨다. A씨에 따르면 ‘조직을 배신하면 꼭 보복한다’는 규칙 역시 이 목적을 쉽게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고 한다. A씨는 “이를 세뇌시키기 위해 본보기 차원에서 배신한 조직원을 집단 구타하는 현장에 합숙 조직원들을 참여시켜 ‘조직을 이탈하면 화를 면치 못한다’는 생각을 심어주기도 한다”라고 전했다.

이런 방식으로 신입 조직원들에게 세뇌를 시킨 뒤에는 예절교육이 이어진다고 한다. ‘한번 형님은 영원한 형님’이란 것을 철저히 교육시켜 조직과 선배 등에 등을 돌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A씨는 “합숙을 하면서 세뇌시키는 또 한 가지는 선후배 사이의 기율 확립이다. 조직에 가입하면 기수를 묶어 주는데 이 기수가 중요하다. 기수는 주로 나이순으로 묶어주는 게 관례다.

조직에 몸담은 순서대로 기수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잔인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기강을 확립하는 것이 대부분의 조직에서 하는 행동이다”라고 말했다. 예절교육 중 대표적인 것은 ▲선배 앞에서 인사는 90도로 깍듯이 한다 ▲선배를 부를 땐 ‘형님’이란 호칭을 쓴다 ▲선배를 만날 때 정장을 입는다 ▲2년 이상 선배 앞에서 맞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등이다.

‘형님 말씀은 곧 법’
확실한 기강확립

언어예절도 있다. ▲선배로부터 전화가 오면 “쉬셨습니까. 저 OO입니다, 형님!” ▲전화를 끊을 때는 “쉬십시오, 형님!” 차에 탈 때는 선배가 먼저 타고 후배는 맨 나중에 타면서 90도로 인사하며 “쉬십시오, 형님!”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방식으로 아래위를 확실히 구분해 충성을 다짐하게 하는 것은 조직을 원활히 이끌어 나가는 데도 도움이 된다.

선배의 말은 어떤 상황에라도 들어야 한다는 원칙이 머릿속에 박히고 나면 필요한 곳에 빠르게 집합시켜 활동에 투입시키는 것이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비상연락망을 만들어 원활한 조직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확실한 기강확립이 바탕됐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A씨는 “많은 조직들이 비상연락망을 구축하는데 비상시에 조직원이 바로 아랫 기수에게 연락을 취하고 해당 조직원이 또 자신의 아랫 기수에게 연락을 취하는 방식”이라며 “상하관계가 철저하게 확립된 조직은 기동성 면에서 이길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그러나 A씨는 아무리 충성심을 강요하고 세뇌를 시켜도 요즘의 조폭들은 이익을 쫓아 조직을 배신하는 일이 허다하다고 말했다. A씨는 “피로써 충성심을 맹세하고 평생 의리를 지키는 조폭들은 그야말로 수십 년 전 낭만시대에나 존재했다”며 “알량한 세력과 돈을 지키기 위해 한 조직에 몸담았던 후배의 신체를 훼손시키는 세태가 안타깝다”라고 씁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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