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동교동계 국장 후 행보 곳곳서 불협화음
동교동계 똘똘 뭉쳐 정치 행보…박지원 ‘나 홀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떠난 자리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DJ의 측근이었던 동교동계 인사들과 박지원 의원의 관계가 한층 악화된 까닭이다.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동교동계와 박 의원은 ‘DJ 유언’ 발언 이후 감정의 골이 더 깊어졌다.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은근슬쩍 서로의 움직임에 날을 세우는 일이 적지 않다. 때문에 동교동계의 하의도 방문 이후 이들이 결별 수순에 들어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신’인 동교동계 인사들과 ‘복심’으로 불린 박지원 의원이 등을 돌렸다. 국민의 정부 시절 박 의원이 정권의 실세로 떠오르고부터 이들은 불편한 관계를 이어왔다. 그러다 DJ 서거 이후 그간의 앙금이 터져 나오면서 ‘끝’을 보려 한다는 게 정치권의 관측이다.
DJ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동교동계 인사들과 박 의원의 관계도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동교동과 가까운 한 인사는 그 이유로 ‘병상정치’를 꼬집었다. DJ가 병상에 누워있을 때 박 의원이 다른 이들의 출입을 통제, ‘병상정치’를 펴면서 동교동계 인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제기됐다는 설명이다.
국장 후 갈등 폭발
그는 “DJ의 병세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였다”면서 당시 박 의원이 전한 DJ의 발언과 행동에 의혹을 제기했다. 박 의원이 DJ의 발언이라고 전한 것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게 동교동계의 전반적인 시각이라는 것.
박 의원이 “민주당은 정세균 대표를 중심으로 단결하라”는 말을 DJ의 유언으로 소개하면서 동교동계 인사들의 불만은 극으로 치달았다. 동교동계 인사들은 “DJ의 유언은 없다”고 단언했다. 이들은 DJ가 유언을 남길 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며 특정 개인을 지칭할 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박 의원의 발언을 단호히 일축했다.
몇몇 인사들은 ‘해도 해도 너무한다’ ‘병실 문 꼬리를 잡고 유언을 조작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국장을 치르면서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박 의원이 국장을 주도하면서 곳곳에서 마찰이 빚어졌다. 일부 인사들은 “DJ가 떠나는 날까지 박 의원이 이를 자기 정치에 이용하려 한다”고 토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 관계자는 “박 의원은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DJ를 모신 것 아니냐. 민주화운동을 함께한 이들이 한둘도 아닌데…”라는 말로 동교동계 인사들의 서운한 심정을 전했다.
결국 지난 10일 동교동계의 하의도 방문을 계기로 동교동계 인사들과 박 의원 사이의 골이 드러났다.
이날 권노갑 전 고문과 한화갑 김옥두 한광옥 최재승 설훈 윤철상 장성민 한영애 김방림 이훈평 전 의원 등 120여 명이 하의도를 방문했다. DJ의 차남인 김홍업 전 의원도 동행했다.
장성민 전 의원은 “지난 국장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하의도 주민들께 감사함을 전하고 DJ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하겠다는 정치적 의미를 갖고 DJ를 모시던 비서진과 전직 의원들이 함께 방문하는 것”이라고 방문 이유를 설명했다.
이날 박 의원은 동행하지 않았다. 동교동계도 특별히 각을 세워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고 박 의원도 전남대 강연이라는 일정이 있었지만 이들 사이의 냉기가 외부로 전해지기엔 충분했다.
여기에 오는 26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마련한 ‘동교동계-상도동계 회동’에 박 의원의 불참 소식이 알려졌다.
박 의원은 YS가 주관하는 동교동계와 상교동계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와 함께 YS를 강하게 비판했다. ‘DJ가 1년 6개월 동안 뒷조사를 했고, 또 모욕을 주기 위해서 청문회에 불러냈다. 하지만 지금은 용서했고 모든 것을 화해했다’는 YS의 발언을 문제 삼은 것.
박 의원은 “YS는 IMF 외환위기를 초래한 실패한 대통령으로 DJ에 대해 항상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며 “지금까지 계속 10여 년간 험담을 해 오다가 갑자기 ‘화해했다’고 당신 스스로 밝혔다. 그런데 이제 다시 화해했다고 하시는 분이 터무니없는 모략을 하고 계시는 것은 말로만 화해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고 꼬집었다.
지난 10일 전남대에서 열린 ‘행동하는 양심-김대중 사상 대강좌’ 초청 특강에서도 YS를 향한 비판은 따가웠다. 그러나 박 의원은 이날 강연에서 동교동계와의 불화설에 대해 ‘소이부답(笑而不答,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음)’이라고 일축했다.
정가 일각에서는 이희호 여사의 일본 방문이 도화선이 됐을 수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 여사는 일본 DJ 추모위원회 초청으로 지난 13일부터 15일까지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도쿄와 오사카에서 열리는 추도회에 참석했으며 최근 일본어로 출간된 자신의 자서전 <동행>과 DJ의 <옥중서신>을 출판사로부터 전달받았다.
DJ ‘정치 유산’ 때문에…
문제는 이 과정에서 동교동계 좌장인 권 전 고문이 배제됐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동교동계 인사들의 감정이 폭발했다는 것. 실제 방문길에는 한승헌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와 박 의원이 이 여사를 수행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들의 관계가 악화된 이유를 정치적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있어온 앙금도 앙금이지만 DJ 사후 정치 활동에 대한 부분도 이들 사이의 갈등을 촉발시켰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국장 후 자연스레 박 의원은 동교동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인식됐다. 그러나 ‘맏형’인 권 전 고문이 국내에 머물겠다는 뜻을 밝혔고 한화갑 전 대표는 복당해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한광옥 전 대표도 전북지사 출마설이 나온다. 최근 정치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복당 시기를 고민하고 있다는 김홍업 전 의원까지 전면으로 나설 경우 ‘DJ의 사람’이라는 명패를 두고 박 의원과 자연스레 부딪치게 된다.
동교동계의 하의도 방문이 이들의 정치 재개를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분석도 이 같은 관측에 힘을 싣는다. 동교동계 인사들이 하의도 방문을 계기로 힘을 모으고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 자파 인사들을 대거 출마시킨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면 박 의원과 부딪치는 수순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박 의원의 지역구도 논란의 중심에 섰다. 하의도를 찾은 동교동계 인사들이 ‘DJ의 정치적 고향’인 목포까지 발길을 옮긴 탓이다. 이와 관련 동교동계 일부 인사들은 목포와 아무 연관이 없는데다 1990년대 중반에야 DJ와 함께한 박 의원이 DJ의 정치적 고향에 자리를 잡고 있는 데 대해 불만을 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교동계 일각에서는 DJ의 차남인 김홍업 전 의원이 정치 재개를 앞두고 있는 만큼 박 의원이 자리를 비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박 의원은 지난 10일 전남대 강연에서 DJ의 발언을 소개하는 것으로 자신의 심중을 드러냈다. 그는 동교동계와의 불화설에 대해 “DJ가 동교동계 이름으로 정치활동을 하지 말라고 했고, 나는 그 뜻을 따르고 있다”고 했다.
이어 “DJ는 퇴임 때도 동교동계가 민주당과 대통령 당선에 많은 기여를 했지만 이제는 개인적으로 정치를 잘해서 국민지지를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홀로서기’에 나설 것임을 넌지시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