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사전’ 발간 후폭풍

2009.11.17 12:59:05 호수 0호

유족들 소송장 ‘만지작’…‘가문의 전쟁’ 폭풍전야


8년간 제작된 친일인명사전 공개로 각계각층 갈등 심화
사전 등재인물 유족·보수단체 반발 소송으로 비화 조짐
11월말 일반인에게 발매할 것으로 알려져 논란 거세

최근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지난 8년간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완성된 사전인 만큼 그에 따른 후폭풍도 예고된 바 있다. 그리고 뚜껑이 열린 뒤 우려했던 일들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발간보고대회 장소를 바꾸는 해프닝으로 시작된 이번 논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전망이다. 사전에 실린 친일인사들의 유족들이 줄 소송을 준비하는 등 본격적인 갈등도 가시화되고 있다.



“친일청산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정통성을 갉아먹는 사전이다.”

지난 8일 공개된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각계각층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일제시대 친일행각을 벌인 인물 4389명의 행적을 담은 이 사전은 집필과정에서부터 지금의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편찬 작업이 계획된 이래 끊임없이 발생했던 난관들이 이를 말해준다.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가 난항을 겪기 시작한 것은 편찬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인 1998년이다.

말 많고 탈 많던 집필과정
발간 이후에도 논란 거세

외환위기로 인해 후원회원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재정위기가 찾아온 것. 비록 적은 액수였지만 꾸준히 후원금을 보내는 회원들 덕에 연구소를 꾸려나갈 수 있었던 시절이라 회원들의 이탈은 연구소의 존립마저 흔들리게 했다. 이 때문에 직원들의 급여는 물론 건물 임대료까지 밀리는 상황에 몰리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1년 편찬 작업을 시작했지만 2년 뒤인 2003년 12월,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2004년 친일단체 인물연구사업의 일환으로 펴낼 예정이었던 ‘일제하 지방 친일단체 편람’에 대한 예산 5억원을 국회가 갑작스럽게 취소했던 것.

그러나 이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예산 삭감 소식을 들은 시민 3만여 명이 11일 만에 5억원의 성금을 모았고 이후 7억원을 연구소에 기부한 것이다. 이는 재정난을 해소시키는 데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친일청산에 대한 국민들의 염원이 세상에 드러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후 연구소는 3000여 종의 문헌자료를 수집, 분석하고 250만명의 인물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심의 작업을 거치면서 인명사전을 만들어 나갔다. 참여한 편찬위원만 150여 명. 각 분야의 교수와 학자들이 사전 편찬에 도움을 줬다. 180여 명의 집필위원과 80여 명의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도 구슬땀을 흘렸다.

그 결과 지난 8일, 총 7권으로 구성된 친일인명사전 가운데 인명편 3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사전이 발표되는 그날까지도 소음은 끊이지 않았다.

먼저 책에 포함될 것으로 알려진 친일인사들의 유족들이 반발하는 것으로 갈등은 시작됐다. 그중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51)씨는 지난달 26일,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내용을 친일인명사전에 실어선 안 된다며 ‘게재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그러나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발표하기 전이었던 지난 5일, 박 전 대통령의 친일행위를 보도자료를 통해 공개했다. 이날 연구소는 박 전 대통령이 1939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에 응모하면서 지원 서류와 함께 충성을 다짐하는 혈서와 청탁 편지 등을 보냈다고 보도한 1939년 3월31일자 <만주신문> 기사를 함께 공개했다.

‘혈서 군관지원’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는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교사) 박정희(23)군의 열렬한 군관 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목숨 다 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전 편찬 전 마지막으로 벌어진 소동은 사전 발간 보고회를 열기로 했던 장소의 대관이 일방적으로 취소된 일이다. 지난 8일 오후 2시 보고회가 열릴 예정이었던 숙명아트센터 측이 대관 계약을 취소한다고 통보한 것.

우여곡절 끝에 백범기념관에서 보고회를 열게 됐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국론통합운동본부, 나라사랑실천운동 등 20여 개 보수단체들이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반대하며 연구소 해체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들 단체는 보고회가 열리기 2시간 전, 숙명아트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족문제연구소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고 정략적 목적에 의한 친일조작, 역사왜곡으로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을 근거 없이 음해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체제수호와 국가안보차원에서 민족문제연구소를 반국가이적단체로 고발할 예정”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애국열사서 친일파로
국민들 혼란 가중

박정희바로알리기 국민모임회원들도 발표회장으로 달려와 친일인명사전에 박 전 대통령이 포함된 것에 대한 부당함을 성토했다. 이 과정에서 연구소 측과 국민모임회원 간의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사전 발간 시작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수많은 위기를 맞으며 국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친일인명사전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까.

먼저 사전은 친일파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편찬위원회가 채택한 친일파에 대한 정의는 ‘을사조약 전후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 식민통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 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이다.

이 정의에 따라 친일행위를 벌인 자로 규정된 인물은 모두 4389명으로 이 가운데에는 지도층 인사와 문화예술계 유력인사, 독립유공자로 알려진 인물들까지 다수 포함돼 논란이 일고 있다.

이들 중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인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 증거자료를 통해 친일행각이 사실로 드러났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갈래로 나뉜 상태다.

하나는 대통령 재임 시절 국가에 공헌한 업적은 고려하지 않고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의견이다. 또 다른 하나는 국가 기여도를 따져 친일 행각을 희석시키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란 의견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은 장면 전 국무총리. 장 전 국무총리는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직을 맡았던 경력이 드러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사전에 따르면 장 전 총리가 이사직을 맡은 이 연맹은 매월 첫째 주를 애국주일로 정해 ‘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지냈다. 미사 후에는 시국에 대한 강론을 갖고 미사 후 단체로 신궁 또는 신사참배를 갖도록 한 것으로 드러났다.


‘시일야 방성대곡’을 발표해 애국지사로 평가받았던 언론인 장지연 역시 친일인물로 규정됐다. 특히 장지연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까지 받은 바 있어 한순간에 애국자에서 친일파로 운명이 뒤바뀌었다.

장지연의 친일행각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약 700여 편의 글을 실은 것이다. 1916년 12월10일에는 2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환영하는 한시를 매일신보에 게재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장지연의 유족 역시 사전 발간에 앞서 명단에서 제외해 줄 것을 요청하는 가처분신청을 냈지만 기각된 바 있다.

현상윤 고려대 초대 총장 역시 논란의 대상이다. 그는 1942년 ‘춘추’ 11월호에 “정신에 있어서는 국체명징과 내선일체를 토대로 황국신민 양성에 힘을 다한다”는 글을 기고했고 1942년 12월6일자 매일신보 인터뷰에서 ‘황국신민화’ 교육을 위한 의무교육실시를 주장한 사실도 드러났다.

문화예술인들도 친일인명사전에 다수 포함됐다. 애국가를 작곡한 음악가 안익태는 일본 천왕 즉위식 때 축하작품으로 사용되던 일본의 관현악 ‘에텐라쿠’를 그대로 차용한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에텐라쿠’를 1938년 발표했다. 또 이 작품을 1939년 로마방송오케스트라 연주회, 1940년 불가리아 소피아 연주회 등에서 직접 지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음악가 홍난파는 1937년 6월을 전후해 일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내용의 가요를 작곡했다. 같은 해 11월4일에는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현대무용가 최승희도 친일행각이 드러나 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사전에 따르면 1942년 2월 개최된 ‘최승희 무용공연’에서 최승희는 “우리 무적 황군이 싱가포르를 공략 성공하고 있는 이때 저는 무용으로 그 기쁨을 축하하게 된 것으로 참으로 광영으로 생각합니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그는 또 1937년부터 1944년까지 무용공연 수익 중 7만5000원이 넘는 금액을 국방헌금·황군 위문금 등으로 헌납하기도 했다.

이처럼 국가에 많은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졌던 인물들이 친일사전에 등재되는 등 각종 논란을 낳은 친일인명사전의 후폭풍은 계속될 전망이다. 먼저 유족들의 줄 소송이 예고되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사의 유족들은 명예훼손 소송을 준비하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수단체들의 행보 역시 심상치 않다. 보수단체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친일인명사전은 전문성을 갖췄다고 보기 힘든 집단이 내놓은 정치적인 모략”이라며 “법적 대응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국민들 의견도 두 갈래
후폭풍 이제부터 시작?

친일인물을 선정한 기준이 형평성을 잃었다며 사전 자체를 부정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형평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은 사전에 수록된 인물들이 왜 친일행각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고찰 없이 친일행각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국민들 역시 혼란에 빠져 있다. 한 시민은 “학창시절 애국자로 교과서에 실린 인물들이 나라에 해악을 끼친 죄인으로 재평가 받은 것을 보니 우리 역사의 다른 부분까지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제야 친일청산의 발걸음이 시작됐다며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반기고 있어 국민들 사이의 의견충돌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오는 11월 말쯤, 친일인물사전을 일반에 판매하겠다는 계획을 밝혀 또 다른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측은 이르면 11월 말 판매가 시작될 것이라고 밝혔다. 관계자는 “이미 2000부의 인쇄가 시작된 상황”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서점에서도 판매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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