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의혹이 또 터졌다. 이번엔 국세청이다. 그것도 미술품 가격을 부풀려 기업에 떠넘기는 수법을 사용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게다가 처음부터 작정하고 계획적으로 돈을 챙긴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현재 이 사건은 확산일로에 있다.
그림로비의 끝이 한상률 전 국세청장과 맞닿아 있는 탓이다. 그 고리는 서울 평창동에 있는 가인갤러리. 때문에 검찰 일각에선 한 전 청장의 미국 출국으로 중단된 그림로비에 대한 재수사가 이뤄진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요시사>에선 이번 로비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로비유형을 추적했다.
보험형 금품 건네며 만약의 사고사태 대비
애정형 스캔들 형성하며 이권과 권력 챙겨
국세청 지방청장급 간부 안모씨가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세무조사 무마를 빌미로 부인이 운영하는 갤러리를 통해 건설회사 등에 수십억원 상당의 그림과 조형물을 강매한 혐의다. 그의 수법은 치밀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계획적으로 돈을 챙겼다. 이를 위해 1만㎡ 이상 새로 짓는 건축물에는 공사금액 0.7% 이상의 미술품을 설치해야 한다는 법규를 악용했다.
“돈이 최고야”
보험형 금품로비
로비의 중심에는 가인갤러리가 있다. 가인갤러리의 주인 홍모씨는 안씨의 부인이다. 안씨와 홍씨가 결혼한 것은 지난 2005년 무렵이다. 이후 홍씨는 2006년부터 야외조형물 사업에 본격 참여하며 경기도 일산 일원 건설업체와 골프장, 대기업 등에 미술품을 납품해왔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이번 사건은 세무조사 무마 로비를 벌인 의혹을 받고 있는 C건설사의 배모 회장이 연루되어 있다.
배 회장은 안씨의 부인이 운영하는 가인갤러리에서 시가보다 비싸게 미술품을 사주는 방식으로 뇌물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게다가 검찰은 안씨가 다수의 건설사 등에 이 갤러리에서 고가의 그림과 조형물을 사도록 하는 방식으로 거액의 뇌물을 챙긴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사건은 일파만파 확산될 전망이다.
그러면 로비는 어떤 구조로 이뤄질까. 로비형태는 분야마다 다르다. 수법 또한 천차만별이다. 현금을 건네는 방법도 있고 물품으로 상납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권을 얻기 위한 대가성 뇌물이다. 우선 가장 로비가 많은 것으로 알려진 건설사의 경우 입찰로비가 대표적이다. 건설사 입찰로비는 첩보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다. 평소 인맥관리를 하다가 입찰 직전에는 집중적인 관리에 들어간다. 그리고는 뇌물을 건네며 입찰을 따내는 형식이다.
로비 형식은 크게 세 가지 단계로 진행된다. 우선 공사입찰 평가심의위원에 선정될 가능성이 높은 후보자들과 평소에 친분을 쌓고 인맥관리를 한다. 평가심의위원 후보 대상자인 공공기관 자격자와 교수, 전문인 등 500명에서 1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학연과 지연 등을 총동원해 접근한다. 그 다음 친분을 쌓는다. 접대골프나 술접대 등이 주로 사용된다.
몇몇 건설사는 입찰당일에 대비 로비자금을 조성하고 전국을 몇 개 단위 권역으로 나눠 책임자를 지정한 뒤 고액의 자금을 주고 로비를 벌이기도 한다. 로비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는 것은 입찰일이 다가올 때다. 이맘때면 건설사 담당자들은 평가심의위원 후보자를 찾아다니며 일일이 자사의 설계에 대한 설명과 홍보를 한다. 이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선물이다. 선물공세로 마음을 잡으려는 것이다.
입찰 당일에는 새벽부터 공사업체 관계자 수백 명이 총동원된다. 평가심의위원 후보자의 집을 지키며 대기하다가 위원에 선정됐다는 통보를 받고 집을 나서는 위원이 있으면 ‘좋은 점수를 달라’며 금품을 전달해 위원을 매수한다. 실제 지난 9월 이 같은 로비를 하다가 적발된 사건이 있었다. 롯데건설의 억대 금품로비가 그것이다. 당시 롯데건설은 759억원 규모의 부산 강서구 화전산단 입찰에 참여하면서 평가위원에게 억대의 금품로비를 벌인다가 들통 났다.
롯데건설 현장소장이 KTX열차에 동승한 뒤 다른 건설사 관계자들을 제치고 열차객실 통로에서 은밀히 5000만원권 수표 2장을 건네며 청탁을 넣는 방법을 사용하다가 적발된 것이다. 금품로비의 또 다른 형태는 후원자로 등장, 돈 봉투를 매개로 한 인연 맺기다. 박연차 게이트가 대표적 실례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은 검찰과 법원 고위인사, 행정부, 정치권 인사들에게 봉투를 챙겨주며 인연의 고리를 형성했다.
하지만 이는 대통령의 자살이란 국가적인 비극을 불러왔다. 보험형 금품로비의 핵심은 ‘돈’이다. 로비자금은 현금 또는 상품권, 채권, 미술품 등 다양한 형태로 권력자에게 건네진다. 종종 차명거래가 이용되기도 한다. 로비자금을 챙긴 권력자는 그만큼 이권이나 권력을 로비주체에게 나눠준다. 로비자금을 현금으로 건넬 경우 위험부담이 있는 듯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최근 사이즈가 작아진 신권이 본격 유통되면서 로비자금을 전달하기가 더욱 용이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과박스나 골프백, 여행가방 등을 활용하면 예전보다 더 많은 돈을 실어 나를 수 있다. 예컨대 이전에는 사과박스 하나에 구권으로 2억원이 들어갔다. 하지만 신권으로는 2억5000만원에서 3억원까지 넣을 수 있다. 여행가방, 골프백 등을 활용하면 최대 5억원까지 한 번에 전달이 가능하다고 한다.
현금·상품권·채권·미술품
“어떤 형태를 원하시나요?”
상품권도 인기품목 중 하나다. 대표적 사건은 지난 9월 공기업 비리 수사에서 발각된 뇌물 수수 의혹을 받던 한국토지공사 유모 이사의 경우다. 압수수색하던 검찰 수사관들이 유씨의 안방 침대 밑에서 2100만원어치의 백화점 상품권과 고가의 양복 티켓 뭉치를 찾아냈다.
아파트 인·허가를 명목으로 3100만원의 금품을 받았던 그는 결국 쇠고랑을 찼다. 고가 미술품도 로비용으로 급부상했다. 미술시장이 커지면서 생긴 유형이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 그림로비 사건이 대표적 실례다.
한 전 청장 사건은 그가 국세청 차장이던 2007년 전군표 당시 국세청장에게 최욱경 화백의 <학동마을> 그림을 주면서 인사청탁을 했다는 의혹이 발단이었다. 올초 전 전 청장의 부인이 이같이 주장해 파문이 일었고 이로 인해 한 전 청장은 사퇴했다.
조금 더 고단수 수법을 꼽는다면 차명거래다. 이 수법은 조영주 KTF 전 사장이 활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조 전 사장은 처남 등 친인척을 활용한 차명 거래를 통해 로비자금을 전달받았다. 납품업체 B사의 실질적인 오너 전 씨로부터 차명계좌 3개를 통해 7억3800만원을 44차례에 걸쳐 나눠 받은 것. 최근에는 차명계좌로 노숙자 대포통장이나 사망자의 휴면계좌를 적극적으로 쓰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권 발행으로 로비자금 전달 현금화 추세
연예계에선 유흥 비용 대며 로비 가세하기도
특히 사망자 계좌는 잘만 알아두면 오래 쓸 수 있어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는 게 사채시장 관계자의 전언이다. 간혹 주식을 매개로 한 로비가 등장하기도 한다. 연예계에서 주로 활용하는 이 방식은 PD들에게 연예기획사의 인수합병 정보를 제공해 PD들로 하여금 주식을 미리 사들여 대박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팬텀엔터테인먼트가 주식로비 의혹을 받기도 했다. 경영권 인수 및 합병 정보를 방송사 PD 등에게 흘려 미리 주식을 사게 한 뒤 상당한 시세차익을 올리게 했다는 게 의혹의 핵심이었다. 로비에는 금전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애정전선을 형성하며 때론 권력을 때론 이권을 챙긴다. 물론 이때 후원자는 권력자다. 이권과 권력을 챙기는 쪽은 여성이다. 이 같은 유형은 권력형 비리로 발각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대표적으로 꼽히는 사건은 국방부를 뒤흔들었던 린다 김 사건이다. 재미교포 출신의 미모의 여성 군수물자 로비스트였던 그녀는 1996년 이양호 당시 국방장관이 김씨에게 보낸 세 통의 핑크빛 연서(戀書), 그와의 ‘부적절한 관계’ 등으로 화제를 불러왔다.
린다 김은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 국방부 장관 등 고위 인사들이 통신감청용 정찰기 도입사업인 ‘백두사업’ 등의 무기 도입 과정에서 린다 김과 공사를 구분할 수 없는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사건 중심에 섰다. 결국 이 사건은 1998년 예비역 공군 장성과 현역 영관급 장교 등 6명이 2급 군사기밀을 외부로 빼돌린 혐의로 구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린다 김은 2000년 10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한국을 떠났다.
“우린 하나로 묶였다”
애정·의리로 접근 이권 꿀꺽
신정아-변양균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사건은 부적절한 연인 관계를 이유로 청와대 고위공직자가 연인을 ‘챙겨준’ 형태다. 하지만 신씨의 학력위조 의혹이 스캔들로, 또다시 특별교부세 배정 특혜 등 권력형 비리로 확산되며 사회적 파장을 불러왔다. 의리를 앞세운 불법로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연예기획사들의 로비다. 연예인의 출연 청탁을 위한 기획사들의 로비는 워낙 다양하게 PD들에게 로비를 해 검찰조차 아연실색할 정도다.
이들의 로비는 일단 고전적 수법인 현금 등 금품을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소위 약발이 약할 경우에는 카지노 도박 등 PD들의 ‘유흥’에 은밀하게 비용을 지원하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실제 최근 검찰은 강원 정선군 강원랜드를 압수수색해 PD들이 강원랜드를 출입했는지를 조사했다. 뿐만 아니다. PD들이 마카오 등의 해외 카지노에 가서 도박을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기획사 관계자들과 PD들의 출입국 기록을 확보해 비교 분석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일부 PD가 국내외 카지노에서 도박 칩을 무료로 제공받은 정황이 확보되기도 했다. 또 지난해에는 KBS 출신 이모 PD가 자신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운 연예기획사들을 상대로 돈을 로비자금을 받다가 철창으로 향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술 접대를 비롯해 고스톱이나 내기 골프 잃어주기, 선물 속에 봉투 넣기, 골프나 콘도 회원권 등으로 대변되는 이전의 로비는 이미 한물 간 방식”이라면서 “주식 거래에 따른 차익을 노리기나 차명계좌를 이용하는 등 더욱 치밀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로비단서는 ‘뒤탈 없기’
로비 법제화 시급 중론
그는 이어 “부패의 숨겨진 규칙은 서로 이익이 맞아떨어질 때 힘을 발휘하며 당장 피해 볼 사람도 없어 ‘좋은 게 좋은 것’이란 인식이 공유된다”면서 “특히 요즘 로비에는 단서가 붙는데 실질적으로 혜택을 주면서도 뒤탈은 없어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시민단체 관계자는 “제도적 장치의 미비가 불법브로커를 양산하고 기업이나 이익단체들의 무분별한 이윤추구활동과 맞물려 뇌물이나 정치자금 수수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며 “로비의 법제화를 통해 어떤 이익집단이 어떤 목적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