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 커질까 청와대도 친이·친박계도 함구령
세종시 백지화 또는 전면수정에 불붙은 李-朴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대립이 심상치 않다. 세종시 문제가 정치권을 뒤흔들 때도 말을 삼갔던 이 대통령이고 국민과의 약속이라는 ‘원칙’만을 강조하던 박 전 대표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오가는 공세에 날이 서고 있다. 정운찬 총리가 세종시 로드맵을 청와대에 보고한 것을 기점으로 본격화되고 있는 공방은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갈등을 깊게 하고 있다. ‘전면전’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오고 박 전 대표가 예상보다 빨리 정치 전면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에 ‘이별전쟁’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정운찬 총리와 박근혜 전 대표의 대리전으로 펼쳐지던 세종시 논란이 이명박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진검승부’로 옮겨가고 있다.
그동안 세종시 논란은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보다는 그 주변에서 목소리가 컸다. 이 대통령은 슬쩍 ‘운’을 띄우는 것으로 물러섰고 정 총리가 총대를 메고 정치권 안팎의 십자포화에 맞섰다.
세종시 원안 추진 입장을 밝힌 박 전 대표를 ‘설득’하겠다고 나선 것도 정 총리다. “박 전 대표를 만나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한번 듣고 싶다”며 “내 생각을 말하면 박 전 대표도 상당히 동의할 것”이라고 한 것.
치명상 피했더니
낭떠러지 앞에서 승부
그러나 “총리께서 뭘 모르시는 것”이라는 박 전 대표의 일침과 “의회 민주주의 시스템하에서 국민과 약속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잘 모르는 것이다. 국민들과 충청도민에게 구해야지 나한테 할 일이 아니다”라는 쓴소리만 잔뜩 들었다.
친이·친박계 모두 함구령을 내리며 관망하던 상황이 바뀐 것은 지난 4일이다. 정 총리가 주례보고에서 이 대통령에게 세종시 수정 로드맵을 보고한 것을 기점으로 사정이 달라졌다.
정 총리는 세종시가 자족기능을 전혀 기대할 수 없고 행정 비효율이 심각하며 통일에 대비해서도 혼란을 자초할 것이라는 ‘세종시 원안 추진 3불가론’을 펴며 민관합동위원회를 구성해 각계 여론수렴 작업을 거쳐 내년 1월까지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보고했다.
이 대통령은 “세종시의 대안은 원안보다 실효적 측면에서 더 발전적이고 유익해야 한다”며 세종시 원안 수정을 공식화했다. “적절한 시점에 국민에게 직접 입장을 밝히겠다”고 공언했지만 이미 세종시 원안을 수정하거나 전면 백지화하겠다는 뜻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는 분위기다.
한 정치평론가는 세종시 문제로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전면전을 벌일 것이라는 관측을 제시하며 “이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 대통령이 자신의 집권 중 레임덕은 없을 것이라는 뜻을 밝혀왔던 만큼 세종시 문제를 통해 ‘완전히 끌어안을 수 없는’ 박 전 대표를 고사시키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여당 내 야당’으로 불리는 박 전 대표의 입지를 흔들어놔야 국정동력이 강하지 못한 집권 후반기를 넘길 수 있을 것이라는 것.
그는 “이 대통령이 정 총리를 통해 세종시 문제를 부각시킨 것 자체가 ‘전면전’을 염두에 뒀던 것”이라며 “‘실용’을 내걸고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향후 정국에서 더 강하게 나타날 것”으로 내다봤다.
박 전 대표도 궁지에 몰린 것은 마찬가지다. 그는 세종시 문제에 대해 자신의 발언을 번복하거나 얼버무릴 수 없는 처지다.
그가 세종시 문제에 거론하고 있는 것은 ‘원칙’이다. 10월 재보선을 앞두고 세종시 문제가 야당의 선거 전략으로 활용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했음에도 박 전 대표는 ‘세종시 원안 추진’이라는 약속에 무게를 실었다.
장광근 사무총장이 “충북 증평·진천·괴산·음성은 원래 무소속 출마가 없었으면 100% 이기는 곳이었다”며 억울함을 토로하고, 공성진 최고위원이 “세종시는 정운찬 총리가 문제를 제기했고 박 전 대표가 선거 와중에 말해서 충청 민심이 흔들렸던 것”이라고 하는 등 자신에게 비판의 화살이 날아올 것을 몰라서 고집스레 원칙을 내세웠던 것이 아니다. ‘원칙’ ‘약속’은 현재 박 전 대표의 정치적 입지를 가능케 한 것이기에 끝내 지켜냈던 것이다.
제2의 미디어법 될까
물러설 수 없는 ‘원칙’
이미 ‘미디어법’이라는 전적도 있다.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강행처리 과정에서 ‘원칙’을 강조했던 박 전 대표가 자신의 의견이 반영됐다는 이유를 들어 ‘찬성’으로 돌아서자 지지율이 일순간 무너졌던 것.
정세균 대표가 박 전 대표의 ‘세종시 원안 추진’ 발언에 “다행이다”고 환영하면서도 “지난 언론악법과 관련해 처음에는 국민의 뜻을 받들다가 나중에는 변경했다. 설마 이 문제도 그렇게 하지 않을지 경계하고 있다”고 한 것은 전례가 있기에 가능한 지적이었다.
당의 분위기도 박 전 대표를 물러서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는 세종시 원안 추진과 관련, “개인적 정치 신념으로 폄하해선 안 된다”며 “한나라당이 각종 선거에서 철석같이 약속한 것”이라고 ‘당론’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당내에서 “2005년도 3월2일 수도분할법이 통과되었을 당시에 한나라당 의원들 중 찬성한 사람이 8명이었다. 그래서 한나라당 당론으로 찬성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홍준표 의원은 “특히 당시 지방선거를 앞두고 충청도 민심 때문에 박 전 대표가 ‘지방선거에 이겨야지 다음 대선에서도 이기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고육지계로 수도분할법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박 전 대표를 겨냥했다.
공성진 의원도 “세종시 문제는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국민들의 참여 없는 정치타협의 산물로, 박 전 대표도 기권했다”고 가세했다.
친이계의 ‘박근혜 책임론’에 친박계는 “당시 세종시 건설을 위한 여야 합의안도 2005년 2월 한나라당 의총에서 찬성 46표, 반대 37표로 가결되었던 내용이지, 박 전 대표 개인이 결정한 사안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정 총리가 세종시 대안을 제시하는 내년 1월까지 3개월간 세종시와 관련한 논란이 계속되고 당의 분위기가 지금과 같다면 박 전 대표가 치명상을 피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친박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정가 일각에서는 세종시 문제로 박 전 대표가 예상보다 빠르게 정치 전면에 등장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자신이 세워놓은 당의 ‘질서’들이 무너지고 있는 이상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며 등장 시기를 저울질 할 처지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친박계 이성헌 의원은 당직을 내던지면서 “한나라당이 우리 정당사에 가장 수명이 긴 정당으로 존립해온 데에는, 1인 보스정당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정당 민주화’ 노력을 기울여 왔기 때문”이라며 “특히 박 전 대표가 소수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을 이끌던 시기에 당내 민주주의 질서를 제도적으로 착근시키는 데 두드러진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그러나 지난 총선의 공천과정에서부터 한나라당의 민주적 제도와 질서가 내용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제는 세종시와 같은 국책사업을 다루는 과정에서조차 당은 이미 예정된 수순을 집행하는 ‘허수아비 정당’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사소한 인사문제부터 중요 정책에 대한 의사결정까지 모두 ‘외부의 손’에 의해 컨트롤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전 대표도 최근 측근과 만나 자신이 당 대표로 있을 때 부정부패 일소를 위해 내부감찰단을 만들고 의혹이 나오면 검찰에 고발까지 했던 사실을 거론하며 “그 이후 이런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흔들리는 한나라당
제2, 제3의 위기설 대두
이어 “한나라당이 개혁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던 것이 여러 부분에서 희석되고 국민과 약속도 소홀히 하는 당이 된다면 또다시 지난번(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직후)처럼 국민으로부터 외면받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의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 뒤로 물러서 있던 것이 사실이지만 애써 쌓아올린 당의 질서가 무너지고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한나라당 후보로 대선에 나서려는 이상 당에 대해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며 “당의 문제점을 지켜만 보다가는 제2, 제3의 세종시 문제로 자신의 목을 조일 것이라는 위기감도 느낄 것”이라고 조심스레 박 전 대표의 속내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