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플루 국가전염병 ‘심각’ 격상되면서 공포감 최고조
거점병원, 일반병원 할 것 없이 의심환자들로 북적북적
건강염려증 확산…프로폴리스 등 항균 건강식품 매출 급증
신종인플루엔자(이하 신종플루)가 일상 풍속도를 바꿔놓고 있다. 정부가 최근 국가전염병 재난단계를 최고인 ‘심각’으로 상향 조정하면서 변화는 더욱 눈에 띈다. 따가운 시선이 두려워 공공장소에선 마음 놓고 기침 한번 못하는 각박한 세태가 나타난 것은 이미 오래전 일. 특히 직장인들의 변화는 눈에 띈다. 점심시간 풍경부터 회식문화까지 신종플루 공포증에 의해 변화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이 많은 장소는 피하는 분위기로 인해 여행이나 외식업 등 관련 산업이 된서리를 맞아 울상을 짓고 있기도 하다. 신종플루로 인한 일상의 변화를 살펴봤다.
지난 4일 오후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이날도 어김없이 임시 컨테이너 진료소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신종플루 거점병원인 이 병원은 벌써 몇 달째 몰려든 환자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의료진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대기표를 뽑아들고 기다리는 환자들을 안내했다.
“입원 시켜 달라니까”
불안한 환자로 북새통
때 이른 겨울외투에 목도리까지 두른 일부 환자들은 몰려드는 오한에 몸을 웅크리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기도 했다. 이들 중 서울 마포구에서 온 이모(43)씨는 “환자가 갑자기 늘어 옥외진료소를 마련한 것은 이해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환자들을 바깥바람에 내 모는 건 너무 하는 것 아니냐”고 토로했다.
의료진과 환자 사이의 가벼운 실랑이도 종종 목격됐다. 증상이 심각하지 않은데도 타미플루 처방을 고집하는 환자, 신종플루에 걸린 어린 딸을 무조건 입원시켜야 한다는 보호자 등 과도한 신종플루 공포증이 부른 다툼이었다.
한 간호사는 “신종플루에 걸렸다고 해도 굳이 입원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어린 아이들의 부모 같은 경우 막무가내로 입원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신종플루 의심환자로 가득한 이곳에서도 각박한 세태는 고스란히 나타났다. 기침을 하거나 콧물을 훌쩍거리는 사람들에겐 어김없이 따가운 시선이 꽂히기 일쑤다. 한 노인은 마른기침을 연속해서 하는 여성에게 “기침을 하려면 손수건으로 가리든지 나가서 해라”라고 소리를 쳐 톡톡히 망신을 주기도 했다.
이들 중엔 다른 목적을 가지고 병원을 찾은 이들도 있었다. 이른바 ‘신종플루 의심 의사소견서’를 받기 위한 목적이다. 직장인의 경우 이 소견서가 있으면 일주일가량 병가를 얻을 수 있어 가벼운 감기에도 일부러 병원을 찾는 직장인들도 늘고 있다.
환자들로 가득한 거점병원을 피해 작은 병원을 찾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같은 날 서울 강남의 한 개인병원도 감기 증상으로 병원에 온 환자들로 북적였다.
가벼운 감기몸살로 병원에 왔다는 정모(29)씨는 “예전 같으면 이 정도 증상으로 병원진료를 받는 일은 없었겠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며 “주사라도 맞고 하루빨리 감기가 나아야 동료들의 눈치를 보는 일이 없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병원 앞에 있는 회사에 다닌다는 직장인 김모(32)씨는 신종플루를 이용한 병원의 지나친 상술에 기가 막힌다고 말했다. 감기가 좀처럼 낫지 않아 신종플루가 아닐까 하는 의심에 병원을 찾았다는 김씨. 그런데 몇몇 증상을 들은 의사는 대뜸 “좋은 링겔이 있는데 맞으면 한결 낫다”며 비싼 링겔 주사를 권유했다고 한다.
김씨는 “단순한 감기라고 진단했으면 그에 맞는 약을 처방해 줘야 하는데 감기치료와는 관계도 없는 주사를 맞으라는 건 눈에 훤히 보이는 장삿속 아니냐”고 꼬집었다.
신종플루가 바꿔놓은 것은 병원 풍경만은 아니다. 갑자기 등장한 전염병에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이 크게 바뀌고 있다. 특히 지난 1일 정부가 국가전염병 재난단계를 최고인 ‘심각’으로 상향 조정한 후로 이 변화는 눈에 띄게 확산되고 있다. 또 나날이 늘어가는 신종플루 사망자의 숫자는 별것 아닌 병이라고 안심하던 이들마저도 불안감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 변화는 단체생활을 하는 장소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특히 아무리 위험한 전염병이 퍼져도 매일 출근을 할 수밖에 없는 직장인들은 많은 부분을 바꿔나가며 신종플루에 맞서고 있다.
그중 하나는 먹고 마시는 부분의 변화다. 식당에서 파는 밥의 위생 상태를 믿지 못해 직접 도시락을 싸다니는 현상이 그중 하나다.
서울 강남에 있는 직장에 다니는 이모(28·여)씨는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이 직장생활의 낙이었지만 왠지 사람이 많이 몰리는 식당은 세균이 많을 것 같아 얼마 전부터 도시락을 싸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점심 메뉴를 선택할 때도 맛보다는 위생을 따지는 직장인들이 늘었다. 다 같이 숟가락으로 떠먹는 찌개류의 메뉴보다는 개인 접시에 음식이 나오는 메뉴를 고르는 것이 그중 하나다. 각자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는 뷔페식도 각광받고 있다.
회식문화에도 변화가 생겼다. 서로의 술잔을 부딪치는 건배를 하는 것을 꺼리게 됐고 잔을 돌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됐다. 폭탄주를 자제하기도 한다. 술을 섞는 과정에서 세균 등이 함께 섞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여종업원이 나오는 유흥업소에서의 회식도 자제하는 분위기다. 낯선 여성과의 신체접촉이 불가피한 업소에서 행여나 병에 옮기지는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이다. 안마방 등 성매매업소를 피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달라진 회식문화
서먹한 직장생활
아예 회식을 줄이거나 없애는 회사도 적지 않다. 직장인 서모(33)씨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 가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라 섣불리 회식을 제안하는 경우가 드물다”며 “후배들에게 맥주 한잔 하러 가자고 말하는 것도 미안한 지경”이라고 말했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곳을 피하다 보니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거나 직원휴게실을 멀리 하는 등의 변화도 눈에 띈다.
서씨는 “조금이라도 지하철이 덜 붐빌 때 퇴근하기 위해 6시가 되자마자 귀가하는 칼퇴근족들도 늘어난 걸 보면 신종플루의 위력을 실감한다”고 했다.
신종플루는 연인들의 애정전선에도 영향을 미친다. 포옹이나 키스 등 스킨십을 자제하게 되면서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여대생 박모(22)씨는 신종플루에 걸린 남자친구로 인해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남자친구가 2주일 전 신종플루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급격히 냉각되기 시작한 것.
만나는 횟수가 줄어든 데다 신체접촉을 최대한 피하는 박씨에게 남자친구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 박씨는 “남자친구는 깨끗이 나았다며 스킨십을 요구하는데 가까이만 가도 신종플루에 전염될 것 같아 피하게만 된다”고 말했다.
건강염려증이 확산되는 풍조도 생겨났다. 건강염려증은 사소한 신체적 증세나 감각을 확대 해석해 심각한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증상이다. 가벼운 감기 증상이 나타나도 ‘신종플루에 걸린 것 같다’라고 생각하고 불안해하는 이들에게서 건강염려증의 징후를 찾아볼 수 있다.
주부 유모(34·여)씨도 신종플루가 확산된 이후 건강염려증이 심해졌다고 한다. 유씨는 TV나 인터넷에서 신종플루 증상을 볼 때마다 ‘나도 저런 증상이 있는데’라는 생각에 빠져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고 한다. 가벼운 몸살기운이란 걸 스스로 잘 알면서도 불안감 때문에 병원을 찾은 것도 벌써 여러 차례라고.
유씨는 “신종플루 확진검사까지 받아 단순한 감기란 걸 알게 됐지만 지금도 몸이 안 좋으면 ‘혹시’라는 생각이 든다”며 “신종플루 전염이 잦아들 때까지 이런 불안감은 계속될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이전에 비해 건강식품 등을 과하게 챙겨 먹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도 건강염려증의 한 단면이다. 특히 항균·항산화 작용이 있는 프로폴리스의 판매량도 급증하고 있다.
“외출은 무슨 외출이야”
여행·외식업계 비상
될 수 있으면 외출을 자제하는 분위기로 인해 관련 산업들이 된서리를 맞기도 한다. 특히 여행관련 산업이나 외식산업 등이 침체기에 빠질 우려를 보이고 있다. 기획재정부와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3/4분기 여행업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4.9%나 급감했다. 지난 9월엔 전년 동월에 비해 31.8% 줄었다.
여행과 관련한 휴양 콘도운영업도 3/4분기 매출이 지난해 동기에 비해 3.0% 줄었고 철도여객 운송업과 시외버스 운송업도 각각 5.5%와 3.5% 감소했다. 유원지나 테마파크 등 놀이공원업종 역시 3/4분기 매출이 지난해 동기대비 7.6% 감소했다. 특히 지난 9월에만 전년 동월대비 11.6%나 감소해 피해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외식산업도 신종플루 여파를 체감하고 있다. 주점업의 경우 3/4분기에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0% 줄었고 일반 음식점업과 패스트푸드 등 기타 음식점업은 각각 2.7%와 0.8%씩 감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