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정세균 한명숙 이해찬 회동 뒷이야기 주목
DJ “작게는 6월, 멀게는 2017년” 시민사회진영과 연대 주문
민주당을 중심으로 야권과 시민사회진영에 서 민주대연합이 꿈틀대고 있다. 민주당의 ‘큰 어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산파로 나섰다. 김 전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과 각을 세움과 동시에 민주당에 시민사회진영과의 연대를 주문했다. 정세균 대표, 이해찬·한명숙 전 총리와 함께 한 자리에서 민주당과 친노 진영이 손을 잡으라며 ‘멍석’을 깔아주기도 했다. 그동안 대북문제에만 집중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훈수정치’를 통해 민주대연합의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김 전 대통령의 속내를 들춰봤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김 전 대통령은 ‘독재자’ 발언으로 여권을 뒤흔들어놓은 데 이어 민주당 안팎의 인사들과 회동, 무성한 뒷말을 낳고 있다.
DJ는 지난달 16일 서울 모처 한 음식점에서 정세균 민주당 대표, 이해찬·한명숙 전 총리와 자리를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DJ는 “(민주당이) 자기를 버리고 (큰 틀로)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크니까 7을 차지하고 나머지가 3을 나눠 가지라는 식으로 해선 곤란하다”며 민주당의 의식 전환을 통한 민주대연합을 주문했다.
그는 “망원경으로 2012년까지 보고 현미경으로 이번 6월 국회를 봐야 한다”고 말해 민주세력의 연대가 정치 현안문제는 물론 차기 대선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보고 있음을 내비쳤다.
이후 이날 비공개 오찬 회동과 관련,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가 하나둘 흘러나와 시선을 집중시켰다.
감사차 만난 자리서
민주당에 ‘연대’ 주문
우선 오찬은 한 전 총리가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 김 전 대통령에게 감사의 의미로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 정 대표와 이 전 총리 외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과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 박지원 의원이 참석했다. 한 전 총리와 이 전 총리, 문 실장은 노 전 대통령의 장례위원회 위원들이었으며 안 최고위원은 모임에 대해 알게 된 후 참석을 원해 자리를 함께했다.
DJ는 이 자리에서 이 전 총리에게 “민주당이 큰 틀에서 연대하는 것이 어떠냐”면서 친노 진영의 복당을 논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민주당 안팎에서 친노 진영의 복당이 논의됐지만 친노 진영은 “생각없다”며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이 전 총리는 “민주당이 친노 영남세력을 안고 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했고 정 대표는 “모두 다 안고 가겠다”면서 친노 끌어안기에 적극적이었다. DJ가 친노 진영의 복당 문제와 관련, 대화가 오갈 수 있게 멍석을 깔아준 셈이다.
DJ가 대북문제뿐 아니라 민주당 안팎의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그의 ‘복심’에 대한 궁금증도 커져가고 있다.
대다수 정치권 인사들은 DJ의 행보에 대해 “민주대연합을 통해 다시 한 번 ‘큰 어른’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관측하고 있다. 민주당의 근간을 만들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 등 쏟아 부었던 힘이 ‘위기’를 맞아 다시 한번 발휘됐다는 설명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DJ에게 힘이 집중됐다는 점도 그의 정치적 행보를 부추겼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로 인한 에너지를 민주당에 수혈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
지난 대선에서도 DJ는 사분오열한 민주세력에 ‘대연합’을 주문했다. 수많은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정동영 후보의 승리로 경선이 마무리되자 “국민의 뜻대로 대연합을 해나가야 한다”고 당부한 바 있다.
당시 DJ는 “국민이 바라는 바를 받들어서 국민의 뜻대로 대연합을 준비해나가야 한다”며 “국민이 잘 이해를 못하면 설득하고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충고했다. 사실상 후보단일화를 강하게 압박한 것이다.
DJ는 이후로도 “야당이 뭉치고 힘을 합쳐야 한다”면서 ‘민주연합’과 2010년 지방선거에서의 ‘후보연합’을 거론했다. 그는 “숨을 길게 쉬어야 한다”면서 “망원경 같이 넓고 멀리 보고 현미경처럼 깊고 좁게 봐야 한다. (야당이 뭉치고 힘을 합치면) 국민이 도와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지금 이명박 정부가 태도(강경 기조)를 바꾸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본다”면서 “우리 할 일을 제대로 해서 지지율이 올라가야 정부의 대북정책도 바꿀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나이를 잊은 열정
정치 체내 시계 ‘째깍째깍’
DJ의 발언 후 사흘 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은 ‘남북관계 위기 타개를 위한 비상대책회의’를 결성,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초당적으로 대처키로 했다.
이번 오찬 회동에서 ‘친노 복당’을 둔 훈수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친노 진영이 민주당 복당에 무관심한데다가 ‘친노신당’ 창당설이 나오자 이를 진화하기 위해 나섰다는 것이다.
DJ의 복심으로 불리는 박지원 의원도 회동 후 “노 전 대통령 서거 전에 몇몇 분들이 그런 얘기를 한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며 “친노 그룹이 영남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선거에 임하는 것은 어렵지만 신당창당은 더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민주당의 변화와 친노 그룹의 합류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신당창당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선을 그었다.
또한 이 전 총리의 복당에 대해서도 “이 전 총리 본인이 여러 생각을 하겠지만 가까운 장래에 민주당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친노 진영의 합류 시기는 “이르면 이를수록 좋지만 현재는 국회의 현안이 있다”며 “대개 야권의 수혈이나 통합은 선거를 앞두고 하기 때문에 10월 재보선 또는 내년 초 지방선거 준비를 위한 이벤트가 있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DJ가 이명박 대통령에 각을 세우면서 ‘독재자’라는 독한 발언까지 서슴지 않게 된 데 대해 “약해지고 있는 자신의 영향력에 대한 위기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재자’ 독한 발언
‘약해진 힘’ 감추려는 무리수
민주당 출범 후 DJ의 영향력은 나날이 약화되고 있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18대 총선에 나선 DJ의 사람들 중 박지원 의원만이 살아 돌아왔다. DJ의 고향인 전남 무안 신안에 DJ의 아들인 김홍업 전 의원이 출사표를 던졌으나 무소속으로 나선 이윤석 의원에게 패했다.
이희호 여사가 13일의 선거 기간 중 9일 동안 전남 무안 신안에 머무르고 동교동계 인사들도 대거 지원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지난 4월 재보선에서도 DJ의 추락은 여실히 드러났다. DJ는 정동영 의원의 출마를 만류했다. 재보선을 앞두고 호남 방문에 나서면서 민주당 후보의 측면 지원을 하기도 했다.
DJ는 호남행 KTX 열차 안에서 재보선 유세 지원차 전주로 향하던 한 전 총리와 만나 “이번 선거는 반드시 민주당이 승리해야 한다. 무소속 한두 명이 당선돼 복당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면서 “전주 시민이 똘똘 뭉쳐 민주당을 밀어줄 때만 MB 악법을 막고, 민주주의 남북 관계도 바로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을 탈당해 전주에 출마한 정동영·신건의 ‘무소속 연대’보다 민주당 후보의 손을 들어준 것. 민주당도 DJ의 발언을 “선당후사”라고 풀이하며 ‘김심(金心)’이 민주당 후보에게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무소속연대는 승리했고 그만큼 호남맹주를 자신하던 DJ의 위신은 ‘옛말’이 됐다.
한동안 ‘훈수정치’를 관두고 대북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에만 매달렸지만 남북관계의 악화와 현 정부의 대북정책상 ‘앉아만’ 있기에는 상황이 급박해진데다 자신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급하게’ 드러난 것이라는 설명이다.
정가 인사들은 아들인 김홍업 전 의원의 정치적 행보에도 호남 맹주, 민주당의 ‘큰 어른’으로서의 영향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이 지난 4월 14년 만에 고향 방문길에 오르면서 측근들을 대동했었다. 부인 이희호 여사와 차남 김홍업 전 의원, 박준영 전남지사, 박지원 의원, 주승용 의원, 김옥두 전 의원 등이 함께한 것.
DJ는 정치적 발언을 자제했지만 “사람의 마음속에는 천사와 악마가 같이 있다. 천사가 득세하면 그 사람은 훌륭하게 행동하지만 천사가 잠자고 악마가 득세하면 살인행위 등 나쁜 짓 하게 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라고 해 침묵하고 있는 전통적 지지층을 자극했다.
당시 정치권 일각에서는 DJ가 전통적 지지층 복원과 지지율 회복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나선 것이라는 해석과 함께 측근들의 정치적 미래를 의식한 행보라고 지적했다.
정치권 인사들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야권이 하나가 될 때까지 DJ는 훈수정치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면서 “민주당이 무너지면 DJ나 그가 평생을 바친 ‘햇볕정책’도 줄줄이 연쇄 도산하게 되는 만큼 정부 여당에 대한 견제 의식과 민주대연합을 위한 절박함은 당 안에 있는 이들보다 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