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암흑기’속에서 재계 총수들의 ‘정중동 행보’가 두드러지고 있다. 그동안 은둔 경영을 해왔던 얼굴없는 총수들은 물론 불과 얼마 전까지 바깥나들이에 맛 들였던 총수들까지 외부활동을 거의 끊었다. 그룹 행사에조차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 총수도 적지 않다. ‘회장님’들이 문고리를 꼭꼭 걸어 잠근 이유가 뭘까. 재계에서 소문난 ‘얼굴없는 오너’들의 은둔 장소와 칩거 이유를 캐봤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은 재계에서 가장 유명한 ‘은둔의 경영자’다. 주요 공식석상 등 외부에 전혀 모습을 노출시키지 않는다. 이는 롯데그룹이 보수적인 기업으로 비춰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 회장은 최근 자신의 꿈이었던 제2롯데월드가 무려 15년 만에 정부의 신축 결정으로 실현됐지만 소감은커녕 표정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다.
신 회장은 집무실이 따로 없다. 한 달씩 한·일 양국을 오가는 ‘현해탄 경영’에 따라 홀수달엔 한국에 머무르는데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신 회장은 롯데그룹 본사로 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서울 청파동 자택도 아니다.
그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업무를 보는 곳은 다름 아닌 소공동 ‘롯데호텔 34층’. 스위트룸으로 알려진 이곳은 신 회장의 집무실 겸 숙소다. 롯데그룹의 모든 대사가 스위트룸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롯데백화점 본점에 집무실이 있지만 신 회장은 이곳을 각종 회의와 접견, 각 계열사 현안·실적을 보고 받는 등 사실상 회장실로 사용하고 있다.
가끔씩 고향인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별장에 들르는 것을 빼면 거의 이곳에서 지낸다. 신 회장의 ‘아지트’인 셈이다. 스위트룸은 다른 사무실과 별반 다를 게 없지만 일반인은 물론 호텔 관계자들도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신 회장의 예고 없는 ‘잠행 경영’도 롯데호텔 34층에서 시작된다. 그는 사전 통보와 별도 수행원 없이 사업장을 극비리에 둘러보는 ‘암행 순시’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롯데호텔, 롯데백화점 등엔 ‘회장님 길’이라 불리는 신 회장의 잠행 동선이 따로 있을 정도다. 툭하면 불거지는 신 회장의 건강이상설을 잠재우는 대목이다.
신 회장이 두문불출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그의 경영론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신 회장의 좌우명은 ‘겉치레를 삼가고 실질을 추구한다’는 뜻의 ‘거화취실’이다. 이 글귀는 그의 집무실인 롯데호텔 34층에 걸려 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게 신 회장의 지론이기도 하다. 신 회장은 “장사하는 사람이 잘난 척하면 필시 망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신 회장의 사돈기업 태광그룹도 세상과 ‘숨바꼭질’ 중이다.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은 1993년 흥국생명 이사로 그룹에 첫 발을 들여놓은 뒤 2004년 회장직에 올랐지만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다. 공식행사 등 외부에 일절 발길을 끊고 있는 것. 경영인으로선 그 흔한 기자간담회나 인터뷰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실제 태광그룹은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기존 섬유·화섬 사업에서 금융·방송 사업으로 영역을 확대, 재계 30위권에 안착했지만 이 회장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이 과정에서 바다이야기 사건, 장하성 펀드 공격, 롯데그룹과 우리홈쇼핑 인수 갈등 등 굵직한 사건들이 터졌고 최근엔 청와대 행정관 성접대 사건에도 연루되는 등 구설수에 여러 번 올랐으나 이 회장은 아무런 동요 없이 ‘얼굴없는 경영자’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이 회장이 출근은 꼬박꼬박 한다는 게 그룹 관계자의 전언이다. 그의 집무실은 서울 장충동 그룹 사옥에 마련돼 있다. 고등학교를 개조해 만들어 회장실이라 하기엔 초라할 정도다. 종로구 흥국생명 빌딩에도 집무실이 있어 이 회장이 자주 ‘출몰(?)’하는 장소로 알려졌다.
이 회장 역시 대부분의 시간을 전국의 사업장에서 보낸다고 한다. 퇴근 후엔 술도 잘 못하고 주변에 지인들이 별로 없어 곧장 집으로 향한다는 후문이다.
이 회장의 칩거 체질은 선대의 스타일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의견이 대체적이다. 그의 부친 고 이임룡 창업주도 자신을 드러내는 걸 꺼려 단 한 번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불황 암흑기’ 재계 총수들 정중동 행보
기업문화, 총수성격 등 이유도 가지가지
이 창업주는 생전에 “기업인은 한눈팔지 않고 경영만 잘하면 된다”는 경영철학을 고집했다. 태광그룹이 다른 그룹과 달리 홍보에 열을 올리지 않는 것도 이 창업주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그룹의 모기업인 태광산업이 일반 소비자에 직접 판매하는 제품을 만들지 않는 화섬업체란 점이 이유지만 그보다 ‘외풍’이 태광그룹의 보수적 기질을 굳히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5공 시절 정치적 외압에 시달린 것.
이 회장의 모친 이선애 여사의 동생은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로, 당시 전두환 정권은 강도 높은 세무조사 등 야당 거물의 친인척 기업을 가만히 두지 않았고 이때부터 이 창업주 일가는 세상과 단절하며 지냈다.
결국 유명세를 타서 득 될 것이 없다는 게 태광일가의 계산이다. 한때 급속도로 몸집을 불리면서 ‘잘나가다’ 최근 곤욕을 치르고 있는 대주그룹, 프라임그룹, C&그룹 등이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과 이재현 CJ그룹 회장 등 재계에서 대표적인 ‘은둔 경영자’들은 어렵게 열었던 문고리를 다시 걸어 잠근 모양새다.
이들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왕성한 대내외 활동을 펼쳤지만 요즘 들어 주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어 ‘은둔 경영자’로 회귀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이는 총수 개인 성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특수한 사정이나 기업 환경의 변화와도 무관치 않다.
김 회장은 지난해 그룹이 운영하는 농구단 경기를 관람하는가 하면 이례적으로 언론과 인터뷰를 갖고 모처럼 입을 열어 은둔 꼬리표를 완전히 떼어내는 듯했으나 올해 최대한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있다.
김 회장이 극심한 불황을 돌파하려는 의지로 외부 활동보다는 내부 경영에 전념하고 있다는 게 그룹 관계자의 설명이다. 동부그룹은 알짜 계열사를 매각하는 등 경영 정상화 작업에 정신이 없는 상태다. 하지만 격식을 따지지 않은 성격상 수행원 없이 혼자 다니기를 즐겨하는 김 회장의 동선 파악에 직원들이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이 회장도 지난해까지 그룹 봉사현장에 나타나는 등 외출이 잦았으나 차명자금 관리 등 잇따른 악재가 터진 이후 조용히 지내고 있다. 그룹 측은 이 회장이 평소대로 묵묵히 회사경영에 집중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간간이 해외 출장을 나가거나 직원들과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누는 탈권위주의 행보도 여전하다고 이 회장의 근황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