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대림간 ‘여천NCC 전쟁’이 드디어 종전 분위기다. 한화그룹과 대림그룹이 손을 잡은 여천NCC를 두고 촉발됐던 갈등이 화합 쪽으로 급변하고 있는 것.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한 지붕 두 살림’은 상대방을 헐뜯는 극한 대치도 모자라 고소·고발을 남발하고 급기야 두 그룹 총수까지 나서 독설을 퍼붓던 일촉즉발의 전운 상황은 온데간데없다. 이제 공식적인 화해 제스처만 남은 상태다. ‘철천지원수’였던 이들이 다시 어깨동무를 한 결정적인 요인이 뭘까.
여천NCC는 1999년 12월 한화그룹과 대림그룹이 각각 지분 50%씩 출자해 만든 국내 최대의 나프타분해설비(NCC) 업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이준용 대림그룹 회장의 ‘각별한 사이’가 동업 배경이었다.
하지만 2003년 인력 구조조정 등 경영 문제를 놓고 두 그룹의 갈등이 시작, 급기야 해묵은 감정은 양측간 고소·고발 사태로까지 확대됐다.
한화그룹 측 이신효 부사장은 2007년 9월 인사에 불만을 품고 집무실에서 항의한 대림그룹 측 여천NCC 직원 60여 명을 경찰에 고발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 회장은 바로 다음 달 이 부사장의 발언을 문제 삼아 같은 해 11월 김 회장과 한화그룹 측 경영진을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이 부사장은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림그룹 측 경영진의 무능으로 회사발전이 어렵다”며 “합작이 지속되기 힘들다면 지분을 털고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고 그럴 경우 한화가 인수할 의향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진흙탕 싸움을 거치면서 김승연-이준용 두 회장도 ‘친구에서 앙숙으로’ 변했다. 재계에선 “‘대기업끼리 사업을 하면 망한다’란 재벌간 동업 불문율이 다시 한 번 확인됐다”는 비아냥과 한화-대림이 합작을 포기하고 회사가 쪼개질 것이란 전망까지 나왔다.
인사감정 등 경영권 갈등 봉합…‘화해 무드’ 급조성
수장 물갈이, 두 총수 합심, 위기의식 고조 등 요인
하지만 서늘한 ‘살기’가 자욱했던 여천NCC에 최근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있다. 양사가 현명한 해법을 내놓는 등 꼬인 매듭을 푸는 실마리를 모색한 결과다.
가장 먼저 양측이 내세운 공동대표가 모두 교체되면서 분위기 쇄신이 감지됐다. 여천NCC는 지난 1월 한화그룹 측 조창호 드림파마(한화그룹 제약사업 법인) 대표이사와 대림그룹 측 윤태석 여천NCC 전무를 공동 대표이사 사장과 부사장으로 각각 선임했다.
당초 2006년 11월 임명된 대림그룹 측 이봉호 사장과 한화그룹 측 이신효 부사장이 공동대표로 임기가 1년 정도를 남긴 상황을 감안하면 이번 물갈이가 화합 차원의 의미가 있다는 분석이다. 여천NCC 대표이사는 양사가 3년 임기로 번갈아 사장과 부사장을 맡기로 합의한 바 있다.
두 그룹은 두 대표이사에게 실적도 실적이지만 우선 ‘화합 임무’를 맡겼다는 후문. 이들이 틈날 때마다 사내 방송 등을 통해 임직원들에게 화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천NCC 안팎에선 “대표이사 교체 이후 얼음장 같던 분위기가 슬슬 녹고 있다”는 얘기가 회자되고 있다.
여천NCC 근무 경험이 있어 누구보다 회사 내부의 문제를 속속들이 잘 파악하고 있는 두 수장은 유연하고 합리적인 경영 스타일로 대화를 중시하는 CEO란 평이다. 게다가 조창호-윤태석 대표이사는 서울대 화학공학과 동기동창으로 평소 친분도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한 치의 양보 없는 대립각을 세웠던 김승연-이준용 회장도 공개석상에서 거리낌 없는 모습을 보여 화해 분위기를 부채질했다. 이들은 지난달 12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 3월 정례 회장단 모임에서 회의 좌석에 붙어 앉아 담소를 나누는가 하면 회의를 마친 뒤 기념촬영 때도 나란히 서 눈길을 끌었다.
두 회장은 사실 사돈관계다. 이 회장의 막내딸 윤영씨는 김 회장의 사촌형 김요섭씨의 아들과 2004년 결혼했다. 대림가의 딸이 한화가의 며느리인 셈이다.
이 회장은 지난해 양사간 갈등이 깊어지자 “내 딸이 김 회장 사촌형의 며느리여서 우리는 사돈 관계”라며 “오죽했으며 사돈을 고소한 내 심정을 이해하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위기의식이 화해 기조로 돌아선 결정적인 자극제가 됐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국내 석유화학 분야는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주요 석유화학업체들은 2007년에 비해 지난해 순이익 등이 모두 적자 전환되면서 실적이 크게 악화됐다.
공식 집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여천NCC도 경기 침체 여파로 지난해 매출액은 6조8억원으로 전년대비 34.5% 증가했으나 영업이익은 2600억원의 손실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천NCC는 2007년만 해도 3000억원 안팎의 영업이익을 낸 알짜 기업이었다.
회사 측은 “국제유가 급등에 따른 제품 가격 강세로 매출액은 증가했으나 판매 부진에 따른 마진 축소로 대규모 손실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양사가 합심하기로 의견을 모은 대목이다. 여천NCC는 지난해 11월 제3공장 가동을 중지하는 등 70%대 가동률을 유지하며 잠시 주춤했지만, 최근 다시 가동률을 100%로 원상회복한 상태다.
여천NCC 관계자는 “임직원 모두가 지금 같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선 갈등의 악순환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똘똘 뭉쳐야 한다는 단합 의식을 갖고 있다”며 “양사의 노력으로 이제 그동안의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소모전에서 탈피, 한마음 한뜻으로 초심으로 돌아가 업무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화-대림 쌍방 고소건은?
다시 ‘앙숙에서 친구로’
여천NCC 둘러싸고 한화그룹과 대림그룹이 서로 주고받은 쌍방 고소·고발건도 모두 해결됐다.
검찰은 지난해 3월 “한화그룹 측 이신효 부사장의 발언이 대림그룹의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 대림그룹이 제기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에 대한 명예훼손 고소건을 무혐의 처분했다. 검찰은 이어 이준용 대림그룹 회장이 김 회장과 허원준 한화석유화학 사장을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 고소건도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검찰은 또 대림그룹 측 이봉호 전 여천NCC 사장이 한화 측 이신효 전 부사장을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 건 역시 무혐의로 결정했다. 이를 비롯해 양사간 각종 고소·고발건도 지난 2월 모두 취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친구에서 앙숙으로’변질된 한화-대림 사이에서 빚어진 법적 공방전이 사실상 마무리된 수순이다.
양측도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한화 측은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린 만큼 더 이상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림 측도 “화합을 위해 소송을 모두 중지하기로 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