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해외여행객들과 교민들에게 테러 비상이 걸렸다. 지난 15일 예멘에서 자살 폭탄에 희생된 4명이 생을 달리했다. 싸늘한 주검 앞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 것도 잠시, 불과 3일 뒤인 18일 현지에서 사고 수습하던 정부 신속대응팀과 유가족에 대한 2차 폭탄 공격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선 추가 인명 피해가 없어 다행이라고는 한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한국인을 직접 겨냥한 제3, 제4의 테러 가능성이 심상치 않다는 게 중론이다. 이에 따라 정부와 여행사, 여행객 모두 해외여행 위험성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테러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현주소를 좇았다.
예멘에서 발생한 자살폭탄 테러가 한국인을 겨냥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사전에 미리 치밀하게 계획됐던 ‘기획 테러’였다는 것. 이 같은 정황은 예멘 내무부의 18일(현지 시간) 성명에서 밝혀졌다.
예멘 내무부는 “시밤 유적지에 이어 사나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2차 자살폭탄 테러의 목표물은 한국 신속대응팀과 유가족이 탄 차량이었다”고 밝혔다. AP통신 등 외신들 역시 예멘 관리를 인용해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된 이번 추가 테러의 대상은 한국인이었다”고 전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해외여행객들과 교민들에게 적신호가 켜졌다. 이들은 여행국가의 안전성 여부에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찾는 등 분주한 모습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해외여행에서의 한국인 겨냥 테러가 또 다시 극성을 부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국민들 사이에선 한국인들에게도 테러 위협은 이제 먼 나라 얘기가 아니란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 같은 인식 이면에는 이슬람권 여행객을 대상으로 한 한국인 테러가 몇 년간 급증하고 있다는 게 한몫 거들고 있다.
실제 지난 2003년 11월30일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오무전기 직원들이 이라크 티크리트 고속도로에서 차량 이동 중 피격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만수, 곽경해씨는 사망했다. 또 이상원, 임재석씨는 부상을 당했다.
테러 사건은 이듬해인 2004년에도 발생했다. 한국인들이 이라크에서 연이어 피랍된 것이다. 5월31일에는 특히 가나무역 직원 김선일씨가 피랍됐다가 다음달 22일 시신으로 발견돼 충격을 줬다. 당시 김씨는 물건배달을 위해 바그다드에서 팔루자로 트럭을 이용해 이동하다 무장단체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에 피랍됐다.
뿐만 아니다. 피랍사건은 해를 넘겨도 계속 일어났다. 2006년 3월에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취재 중이던 방송사 특파원이 무장단체인 PFLF(팔레스타인 해방전선)으로 추정되는 무장 세력에 납치됐다가 하루 만에 석방됐다.
또 4월4일에는 동원수산 수속 원양어선 제628호 동원호가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조업 중 현지 무장단체에 선원 25명이 피랍됐다가 117일만에 풀려나는 일도 있었다.
2007년에는 피랍사건이 7건 발생했다. 2월27일, 다산ㆍ동의부대의 윤장호 병장이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미군 기지에서 탈레반의 폭탄테러로 희생됐다. 7월19일에는 분당 샘물교회 자원봉사자 23명이 탈레반에 피랍됐다.
온 국민이 공포의 분위기에서 떨고 있는 가운데 이들 중 25일에는 배형규 목사가, 31일에는 심성민씨가 살해됐다. 반면 다음달 13일 김경자씨와 김지나씨가 석방됐고 29일에는 인질 12명이 세 차례에 걸쳐 풀려놨으며 그 다음날 나머지 7명도 석방되면서 사태는 마무리됐다.
돈벌이 급급한 여행사 ‘위험지역’도 관광용 포장 선전
여행사 등에 대해 법적 구속력 없어 문제는 ‘되풀이’
허술한 정부 대응이 테러 노출, 국민홍보 부족 지적
“정부 당국은 테러행위에 더욱 단호한 조치 취해라”
10월26일에는 과테말라 거주 교민이 무장괴한에 납치됐다가 석방됐다. 28일에는 아프리카 소말리아 근해에서 한국인 선원 2명이 탑승한 일본 선박 골든노리호가 해적단체에 피랍됐다. 한 명은 당일 탈출했으나 전우성씨는 45일만인 12월12일에서야 석방되기도 했다.
2008년 역시 피랍사건은 이어졌다. 4월28일에는 아프리카 소말리아 해역을 지나던 한국 선적 화물선 알렉산더칼호가 해적단체로부터 피습 당했다. 11월15일에는 한국인 5명이 탄 일본 국적 화물선이 해적에 피랍돼 3개월여 만에 풀려났다.
한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이처럼 빈번해지면서 국민들 사이에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테러의 주체세력인 소말리아 해적, 이슬람 무장 세력 등에 대한 대응이 무방비에 가깝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나오면서 그 목소리 또한 커지고 있다.
그러면 한국은 ‘묻지마 테러’에 어느 정도 대응이 가능할까. 현재까지의 정부 대책 마련을 보면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 일이 터져야 수습에 나서는 데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정부의 뒷북 정책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선 여행사들에 대한 규제 여부다. 사실 여행사들이 상품을 판매할 때 중동 지역의 위험성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들을 형사 처벌하거나 과태료를 물리는 등 처벌을 강화하는 법적 근거 마련에 소극적이다.
문제는 여행사 등에 대해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데 있다. 때문에 외통부가 아무리 대국민 홍보를 꾸준히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 사이에선 여행사들이 중동 지역 관련 위험성을 고지하지 않을 경우 영업정지, 영업취소 등 행정조치를 취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여행사 관계자는 “오지 여행, 이색 체험, 해외 선교, 성지 순례 등도 좋지만 신변 안전이 우선”이라면서 “상품 판매에 급급한 여행사 광고도 그대로 믿을 게 못되는 만큼 여행객 스스로 판단하고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지역의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미약하다. 평상시에 중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족장, 학자 등과 교류를 잘해 두고 이슬람인들을 대상으로 한 관광프로그램과 강연회 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부의 적극적인 홍보부족도 국민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다. 이번 예멘 사건만 해도 그렇다. 참사가 벌어지자 외통부는 예멘이 위험하다는 점은 이미 공지해놓았다며 ‘여행위험등급’을 한 단계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이번 폭발 사건이 일어난 지역은 가급적 여행을 삼가라는 2등급 여행자제 지역이었다.
하지만 여행지 ‘위험 정보’가 여행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해당기관 사이트에 위험정보를 올려놓았지만 홍보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오히려 국민들이 확인하면 되는 것이란 반응이다.
현재 외통부는 해외안전여행사이트(0404.go.kr)를 통해 위험 정보를 안내하고 있다. 또 여행협회에 자료를 보내고 매체에도 광고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국민들이 이를 얼마만큼 인지하는가 여부다.
그러나 해외안전여행사이트 접속자 수는 한 달 6만명 수준으로 전해진다. 외국의 위험상황을 알리는 안전공지 조회수도 수백 건에 불과한 것으로 알져지고 있다. 결국 실제 한 달 동안 해외로 떠나는 여행객이 50만명이 넘는 것을 보면 정부가 적극적 홍보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안전에 대해 최종 책임을 개별 해외여행객이 져야 한다는 현실에 있다. ‘내 안전은 내가 지킨다’는 인식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게 현주소다. 연간 해외여행객 1000만명 시대에 완벽한 정부의 행정지도를 기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해외여행에 나서는 국민들을 보면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실제 한국일반여행업협회에 등록된 여행사 667곳 중 상위 100곳의 중동지역 항공권 판매집계에 따르면 2003년 이후 중중동지역을 찾는 여행객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다.
지난해만 봐도 모두 8만2981명이 중동을 다녀왔다. 2003년 1만8284명, 2004년 1만9316명에 비하면 4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해외여행을 주로 한다는 김한일(44)씨는 “관광객들의 안전에는 정부 당국, 여행업계, 관광객이 따로 있을 수 없다”면서 “정부 당국은 테러행위에 더욱 단호한 조치를 취해 우리 국민을 타깃으로 삼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들은 현재 국가 대테러 활동기본법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테러에 대응할 수 있는 법적 체제가 안 돼 있고 테러 관련 인력이나 전문가 등을 양성할 수 있는 체제 자체가 없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다. 아울러 대테러 정보 제공을 확대하고 여행 제한 지역에 대해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악몽 같은 참혹 여행 일지
순식간에 아비규환…‘생지옥 따로 없다’
참혹했다. 예멘 참사현장은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찬란한 유적지가 순식간에 생지옥으로 변한 것은 지난 15일 오후 5시50분 무렵(현지시간)이다. 그러면 예멘에선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한국 테마세이여행사의 예멘·두바이 패키지관광에 동참한 관광객 등 40~60대 18명은 14일 예멘의 시밤지역 유적지를 방문했다. 이날은 9박10일 일정 중 6일째 되던 날이기도 했다.
사건은 다음날인 15일에 발생했다. 원래는 한 번만 둘러볼 예정이었으나 다시 찾았던 게 화근이 된 것. 이들 관광객이 유적지를 재차 찾은 이유는 풍광이 너무나 아름다워 일부 관광객들이 한 번 더 가자고 제안했고 나머지 관광객들도 동의했기 때문이다.
사건 당일 4~5명을 제외한 관광객들은 다시 시밤지역을 찾았다. 이날 유적지는 매우 조용하고 고요했다. 이들 관광객밖에 없었던 탓이다. 관광객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일몰 광경을 감상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10대 후반과 40대 후반의 현지인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관광객 일부에게 말을 걸어왔다. 다정스럽게 인사를 하며 30분가량 영어로 관광객들과 대화를 나눈 뒤 ‘여행 잘하라’고 작별인사를 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사라진 뒤 5분쯤 경과하자 ‘쾅’ 하는 소리와 함게 폭탄이 터졌다. 현장은 순식간에 생지옥으로 변했고 관광객들은 혼비백산했다. 잠시 뒤 곳곳에서 오열과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부상당한 관광객들이었다.
인솔자는 ‘빨리 차에 타라’고 소리쳤고 관광객들은 차를 타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이후 보안당국이 현장에 도착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시신 4구를 수습했다.
하지만 악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테러 사건 3일 뒤인 18일 오전 8시40분 무렵(현지시간) 2차 테러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건은 공항가는 길에 일어났다. 이날은 17일 현지에 도착했던 유족들이 희생자 시신을 수습해 서울로 돌아가려고 공항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이들은 예멘 수도 사나 시내의 숙소 샤흐란호텔에서 출발했다. 경찰 차량을 선두로 2대의 차량에 나눠 탑승한 상태였다.
앞 차량에는 운전사와 정부 신속대응팀장인 이기철 외교통상부 심의관, 예멘 주재 대사관 직원, 여행사 사장 등 4명이 탔다. 뒷 차량에는 유족 3명과 외교부 직원 한 명 등 5명이 탑승했다.
예멘 사나 공항을 10㎞ 정도 남겨둔 지점. 차량이 밀렸다. 때문에 수송차량 역시 속도를 줄였다. 바로 그때 도로 중앙에서 누군가 튀어 나와 차량 쪽으로 달려왔다. 놀랄 틈도 없이 경찰차와 바로 다음 차량 사이에서 갑자기 굉음이 울리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뒷 차량의 앞 유리창은 박살났다. 운전자쪽 범퍼도 심하게 찌그러졌다. 반경 20m 곳곳에서 핏자국이 발견됐다.
주변도로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했지만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사고 직후 차량은 계속 공항으로 쏜살같이 이동했고 그 뒤 무사히 서울로 출발했다. 1초만 늦었어도 또 한 번 참극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 예멘 테러 일지<들춰보니>
관광객 테러 “예외 없었다”
2000년 10월 아덴항에 정박 중인 미 해군 구축함 콜호에 대한 자살폭탄 공격이 있었다. BBC에 따르면 알카에다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한 이 테러로 해군 병사 17명이 목숨을 잃고 38명이 다쳤다. 이 사건은 최근 10년 동안 발생한 테러 중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사건으로 꼽힌다.
이슬람 무장대원이 지난해 9월 수도인 사나 주재 미국 대사관을 겨냥해 시도한 차량폭탄 공격도 있었다. 이때 예멘인 경비원 등 16명이 사망했다.
관광객에 대한 테러도 예외는 없었다. 2007년에는 동부 마그리브 지역 고대 사원을 여행하던 스페인 관광객 7명과 예멘인 운전사 2명이 자살 폭탄 테러로 생을 달리했다. 지난해 1월에는 벨기에 관광객 2명과 예멘 운전사 1명이 총격으로 숨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