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한입 두말’오너일가 귀환기

2009.03.24 09:17:19 호수 0호

사건·사고 무마 목적 ‘회장직 사퇴’ 카드 레퍼토리
사태 잠잠해진 틈타 ‘안면몰수’ 소리 소문 없이 복귀



‘사건 터진 지 얼마나 됐다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경영 일선에서 제 발로 떠난 재벌그룹 오너일가가 은근슬쩍 발을 들여놓고 있다. 이런저런 사건·사고 이후 이를 무마할 목적으로 ‘회장직 사퇴’카드를 꺼낸 이들은 사태가 잠잠해진 틈을 타 당당하게 정문을 통과하는가 하면 소리소문 없이 담장을 넘을 태세다. ‘오너 경영’부활 수순은 비슷하다. 일단 계열사로 발을 디딘다. 그리고 곧 그룹 전체를 집어삼킨다. 물론 빈자리를 지킬 ‘구원 투수’기용은 필수다. 각 기업의 주주총회가 몰린 3∼4월. 누가 슬그머니 ‘회장 명함’을 다시 꺼내들까.

지난 12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지인의 결혼식 참석차 들른 두산일가의 맏형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그룹 경영구도에 대해 입을 열었다.

“오너일가 중심의 형제경영 체제를 이어갈 겁니다.”

두산그룹은 2005년 7월 ‘형제의 난’으로 쑥대밭이 된 직후 흐트러진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두산가 형제들의 회장직 사퇴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 ▲지주회사 체제 전환 등의 수습책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당시 두산그룹을 이끌던 박용성·박용만 형제는 같은해 11월 동반 사퇴했다.

두산그룹은 이어 그룹 지주회사인 ㈜두산의 새 전문경영인(CEO)을 영입했다. ㈜두산은 현재 유병택 전 부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은 강태순·제임스 비모스키 부회장 2인 체제다.


하지만 이도 잠시. 사태가 잠잠해지자 두산가 형제들은 경영 복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두산일가의 장남인 박 명예회장을 필두로 ‘박용성(3남)-박용현(4남)-박용만(5남)’형제가 주인공. ‘형제의 난’을 촉발시켰던 박용오(차남) 전 회장은 두산가에서 영구 퇴출된 모양새다.

계열사로 발 디딘 후
지주회사 장악 수순

‘형제의 난’과 관련 횡령과 분식회계 관여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80억원을 선고받은 박용성 회장은 2007년 2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경영 보복을 넓히고 있다. 두산중공업 회장과 두산그룹이 인수한 중앙대 이사장에 선임된 것. 최근엔 대한체육회 회장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서울대 병원장을 지낸 박용현 회장은 그룹의 사회공헌기구인 연강재단 이사장에 이어 2007년 2월 두산건설 회장에 올랐다.

박용성 회장과 같은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벌금 40억원을 선고받은 박용만 회장도 사면 이후 두산건설, 두산인프라코어, 두산중공업 등 주력사 이사진에 이름을 올렸다. 이로써 두산그룹의 핵심 계열사들을 오너일가가 장악한 셈이 됐다.

더욱이 이들 3형제는 모두 이달 27일 ㈜두산 주총에서 사내이사로 선임될 예정이다. 여기에 두산가 4세인 정원-지원(박용곤 명예회장 아들) 형제까지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그룹의 핵인 ㈜두산의 사내이사 7명 중 5명이 오너일가로 구성되는 것이다.

사실 두산가 형제들의 경영 복귀는 이미 예견돼 왔다. 1991년 3월 ‘페놀 사태’가 비슷한 전례다. 이번 두산가 형제들의 복귀 움직임이 페놀 사태 당시 시나리오와 유사하게 흘러가고 있는 것.

페놀 사태는 두산전자 구미공장에서 페놀 원액이 새어 나와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대구의 수돗물을 오염시킨 사건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두산그룹은 박 명예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한 발 물러나는 동시에 고 정수창 회장을 ‘구원 투수’로 등판시키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지만 불과 2년 만에 두산가 형제들은 다시 그룹을 장악했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페놀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두산일가는 이번에도 형제의 난 사태가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며 “두산일가의 경영 복귀가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오너와 전문경영인간 역할 분담이 모호해지는 등 지배구조개선 로드맵이 제대로 진행될지 미지수”라고 지적했다.

두산그룹 측은 “오너 일가의 복귀는 대주주로서 책임을 지기 위한 것”이라며 “각 부문별 전문경영인들이 실질적인 경영을, 오너 일가는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리는 역할만 맡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화그룹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보복 폭행’으로 홍역을 치른 김승연 회장 역시 사건 당시 일단 후퇴했다가 슬그머니 복귀 수순을 밟고 있다.

김 회장은 2007년 4월 아들을 구타한 주점 종업원들에게 보복 폭행을 가한 혐의로 구속돼 항소심에서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 200시간을 선고받고 같은 해 9월 풀려났다. 그는 같은 달 주요 계열사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일본으로 건너가 지친 심신을 달랜 김 회장은 지난해 2월 사회봉사명령을 마친 뒤 곧바로 경영일선으로 컴백했다.

그러나 완전히 족쇄가 풀리지 않아 경영에 한계가 있었던 김 회장은 지난해 8월 광복절 특별사면 때 ‘빨간줄’을 지워 그룹 임원 자격을 회복, 계열사 대표이사 자리를 꿰차기 시작했다.

김 회장은 지난해 9월 지주회사인 ㈜한화를 비롯해 한화건설, 한화L&C, 한화테크엠, 한화갤러리아 등의 주총에서 각 회사 등기이사 및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불과 한 달만에 계열사 대표이사직에 공식 복귀한 것.

최근엔 그룹의 주요 자금원인 한화석유화학 지휘봉까지 잡을 것으로 보인다. 한화그룹에 따르면 김 회장은 이달 20일 열릴 한화석유화학 주총에서 신임 등기이사로 선임될 예정이다. 이로써 김 회장은 모두 6개 핵심 계열사 대표이사를 맡게 됐다.

앞서 김 회장은 대한생명 인수 전후에도 사퇴와 복귀를 반복했다. 한화그룹이 2002년 대한생명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여러 의혹이 제기됐고 김 회장은 검찰 수사로 확대될 조짐을 보인 2002년 12월 ㈜한화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될 즈음 김 회장은 활동을 재개했다. 대한생명 인수 비리를 수사했던 검찰은 2005년 3월 사건을 사실상 마무리했고 김 회장은 출국금지 조치가 해제되자마자 그룹을 지배하는 ㈜한화 수장으로 2년3개월 만에 복귀했다.

한화그룹 측도 김 회장의 복귀에 대해 “책임경영과 지배력 강화 차원”이라고 설명했지만 시민단체 등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재개 반복


김 회장 처럼 사건·사고 이후 CEO 체제를 구축했다가 특별사면 후 경영 전면에 다시 나서는 총수들이 적지 않다.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은 2006년 3월 분식회계 혐의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쌍용건설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나가 2007년 2월 특별사면돼 1년 만에 다시 지휘봉을 잡았다. 김 회장의 빈자리는 김병호 사장이 메워 지금까지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다.

2005년 6월 비자금 조성 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년8개월을 복역하다 김 회장과 함께 사면된 임창욱 대상그룹 회장도 재기의 칼을 빼 들었다. 임 회장은 그룹 지주회사인 대상홀딩스의 대표이사 회장직을 놓지 않는 등 옥중경영을 이어갔지만 수장 부재의 한계를 숨길 수 없었다.

이를 채우기 위해 부인 박현주씨가 경영 전면에 나섰다. 2005년 9월부터 대상홀딩스 대표이사를 맡아 그룹 경영의 주요 사안을 챙긴 박씨는 부군이 세상 밖으로 나온 직후인 지난해 4월 조용히 ‘집으로’향했다. 대신 박용주 신임 대표이사가 임명됐지만 재계에선 임 회장 부부의 경영권 바통터치로 분석하고 있다.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도 2007년 2월 사면됐다. 2003년 9월 거액의 리베이트를 받은 혐의로 구속돼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남양유업은 홍 회장이 같은해 11월 대표이사직에서 회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박건호-김승수 대표이사를 내세운 ‘쌍두마차’체제를 도입해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지만 홍 회장 사면 이후인 2007년 7월 김승수 대표이사가 사임하면서 이상 기류가 흐르고 있다.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기업들의 ‘급처방’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바람막이 역할로 CEO를 내세워 위기를 모면한 뒤 소리소문 없이 그룹 담장을 넘는 수법이다.

농심그룹은 지난해 3월 대표상품인 새우깡에서 생쥐머리로 추정되는 이물질이 나와 창립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이른바 ‘생쥐깡 파문’이다. 농심그룹 측은 고개 숙여 사죄했지만 성난 소비자들은 쉽게 봐주지 않았다.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은 ‘특급 소방수’로 손욱 회장을 영입하는 결단을 내렸다. 특히 신 회장은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겠다”는 입장을 전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최근 농심그룹은 오너 경영을 강화할 채비에 분주한 형국이다. 그룹 지주회사인 농심홀딩스는 이달 27일 주총에서 신 회장과 아들 3형제를 사내 등기이사로 선임할 예정이다.

신 회장과 장남 신동원 농심홀딩스 부회장은 재선임되고 차남 신동윤 율촌화학 사장과 3남 신동익 메가마트 부회장은 새로 선임된다. 농심홀딩스 이사회 정원은 7명으로, 이중 절반이 넘는 4명이 오너일가로 채워지는 꼴이다.
공교롭게도 생쥐깡 파문은 농심그룹과 ‘라면 라이벌’인 삼양식품의 ‘우지 파동’을 연상케 한다. 눈에 띄는 점은 삼양식품의 위기 대처법도 농심그룹과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독단 경영이냐
위기 경영이냐

1989년 11월 터진 우지 파동은 ‘삼양식품이 라면을 공업용 우지로 튀겼다’는 내용의 사건으로, 이로 인해 삼양식품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또 직원들이 대거 퇴사하는 한편 시장 점유율이 급락하는 등 삼양식품은 그야말로 존폐위기로까지 내몰렸다.

당시 전중윤 회장의 맏사위인 서정호 사장이 책임을 지고 회사를 떠났지만 1997년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은 뒤 2003년 5월 삼양식품 대표이사로 복귀했다. 서 사장이 2006년 5월 사령탑에서 물러난 자리엔 전 회장의 장남 전인장 부회장이 앉아 있다.

SK그룹도 오너일가 퇴진이란 메스로 깊게 빠진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최태원 회장과 그의 동생 최재원 부회장, 손길승 전 회장 등은 2004년 2월 소버린 사태와 SK글로벌 회계부정 사태의 도의적 책임을 지고 핵심 계열사인 SK텔레콤 경영에서 일괄 퇴진했다. 이 결단은 최 회장이 그룹 회장으로서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최 부회장은 최근 그룹 지주회사인 SK㈜와 SK텔레콤의 주총에서 등기이사로 선임돼 다시 경영 전면에 나섰다. 앞서 손 전 회장은 지난해 12월 SK텔레콤 명예회장으로 위촉된 바 있다.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안면몰수형’오너일가들의 복귀를 놓고 시민단체 등은 따가운 눈총을 보내고 있는 반면 그룹 내에선 당연한 수순으로 여긴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오너 경영은 과거 오랫동안 국민적 지탄을 받아온 만큼 무리한 사업확장이나 과도한 차입경영 등 총수일가의 독단경영이 우려된다”며 “사고를 친 오너일가가 ‘언제 그랬냐’는 듯 경영에 복귀하는 것은 자칫 국민적 반감, 나아가 재계 전체적인 불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비판했다.

모 그룹 임원은 “지금 같은 글로벌 위기를 정면돌파하기 위해선 오너경영 체제의 강력한 리더십과 신속한 의사결정이 절실하다”며 “일부 오너일가의 경영 참여로 전체적인 그룹 경영 구도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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