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순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 잔혹한 살인사건이 또 다시 일어났다. 이번엔 20대 가장이 일가족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단순히 부부싸움 도중 홧김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이 범인은 시신을 은폐하기 위해 방화까지 저지르는 치밀함을 보였다. 또 수사를 하러 온 경찰 앞에선 눈물연기까지 펼치며 용의자선상에서 빠져나가려고 해 충격을 줬다. 범행 전 가족 이름으로 9개의 보험을 들었다는 사실은 보험금을 노린 범행이란 것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강호순 사건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일가족 살해사건의 전모를 취재했다.
지난달 23일 새벽 4시35분경 광주 광산구 모 아파트 1층에서 불이 났다. 아파트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람은 허모(30·여)씨와 그의 큰아들(6), 작은아들(3).
그러나 불에 타 숨졌다고 하기엔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세 명의 시신은 불길을 피하려고 애쓴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안방에 나란히 누운 상태였던 것. 또 허씨와 큰 아들의 복부에는 흉기에 찔린 상처가 발견됐다. 또 하나 이상한 점은 허씨의 남편 최모(29)씨가 종적을 감췄다는 것.
이웃주민 등 목격자들은 이에 대해 “최씨 부부가 새벽까지 싸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펑’ 소리가 나고 불이 났다”고 말해 갑자기 사라진 최씨와 이들의 죽음 간에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조금씩 흘러 나왔다.
광주 광산경찰서 소속 형사들은 이에 이날 오전 11시경 아파트 주변을 서성이는 최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수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최씨는 범행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는 “내가 운영하고 있는 가게에서 새벽까지 일했다”는 알리바이를 시종일관 고수하며 결백을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경찰조사를 받으며 “집에 불이 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며 가족의 죽음을 슬퍼하는 눈물까지 흘린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하나씩 드러나는 증거 앞에 최씨는 결국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가 우려했던 그것이었다. ‘내 손으로 가족을 죽였다’는 것.
경찰에서 최씨는 부부싸움 도중 우발적으로 아내를 찔렀다며 살해동기를 밝혔다. 그는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시부모를 못마땅해 하는 아내와 싸우다 화가 나 흉기를 휘둘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새벽 2시 40분경부터 아내와 싸우기 시작한 최씨는 2시간이 지난 4시40분경 흉기로 아내를 찔러 살해한 뒤 범행 장면을 보고 있던 큰 아들까지 흉기로 살해했다. 수년 전부터 아내와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자주 싸웠고 사이도 나빴다는 그는 우발적인 범행이란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하나씩 드러난 범행과정은 치밀하고 잔인한 범죄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아내 허씨와 큰 아들은 각각 7차례와 10차례나 흉기에 찔려 사망했는데 우발적이라기엔 흉기의 사용횟수가 너무 많다는 것.
또 범행 후 화재사고로 위장하기 위해 불을 질렀고, 이 불 때문에 옆방에 있던 세 살배기 둘째 아들까지 사망했다는 점 또한 계획범죄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가게에서 피 묻은 트레이닝복을 갈아입은 뒤 이 옷을 인근에 있는 아파트 헌옷 수거함에 버리며 증거를 인멸하려 한 점에서 치밀한 범행이란 것을 말해주기도 했다.
게다가 범행 후 집을 빠져나온 최씨는 인근 병원으로 가 자신의 형 이름으로 범행당시 왼손에 생긴 상처를 치료받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흉기에 찔린 상처가 남아 있으면 용의선상에 오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으로 보인다.
그는 병원에서 “일하다 넘어져 왼쪽 팔목에 상처를 입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한 뒤 진료를 받고 새 옷을 사 입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 사건 당일 오전 7시경 자신이 일하는 가게로 와 태연하게 물건을 판매하면서 알리바이를 만들었다는 것 또한 치밀함을 보여줬다.
최씨의 뻔뻔함이 극에 달한 것은 범행 후 7시간 후였다. 일을 하고 귀가한 듯 태연하게 범행 현장에 나타난 그는 “누가 우리 가족을 죽였느냐”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눈물까지 흘리는 연기를 펼쳤던 것. 그가 흘린 ‘악어의 눈물’은 경찰이 사건 당시 그가 입었던 피 묻은 옷을 발견할 때까지도 마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부부싸움하던 20대 가장, 흉기로 아내와 아들 살해해
우발적 범행 주장하지만 계획범행 가능성 속속 드러나
사전에 계획하고 저지른 범행일 가능성도 곳곳에서 발견됐다. 그중 하나는 라이터로 불을 질렀다는 최씨의 진술과는 달리 석유 등 인화물질 때문에 불이 났다는 점이다. 방화에 필요한 인화물질을 미리 준비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한참 일하고 있을 새벽 시간, 갑자기 집에 들어와 부부싸움을 했다는 것도 홧김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 계획된 범행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최씨의 가족 앞으로 9개의 보험이 가입되어 있다는 점도 의혹을 키우는 부분이다. 보험금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가족을 살해했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계획범죄라는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