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마 ‘강호순’이 휩쓸고 간 자리가 휑하다. 강호순의 엽기적인 행적에 모든 눈과 귀가 쏠려있는 사이 몇 가지 이슈들은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힌 탓이다. 그가 군포 여대생뿐만 아니라 6명의 여성을 살해한 과거가 밝혀진 순간 집중조명을 받던 몇몇 사건들은 자취를 감췄다. 진위논란에 휩싸였던 미네르바도, 전지현 복제휴대폰의 진실도, 주저앉은 소가 유통된 사실도, 용산참사 사건도 소소한 기삿감으로 전락했다. 특정 이슈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냈다가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냉담해지는 냄비근성은 이번에도 발휘됐다는 지적이다. 강호순이 묻어 버린 사건들을 돌아봤다.
강호순이 7명의 여성을 살해한 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날 이후, 모든 언론과 국민은 살인마의 지난 행각에 주목했다. 양파껍질처럼 하루하루 벗겨지는 그의 실체는 마치 영화 시나리오처럼 긴박감을 더해줬다.
특히 석연치 않은 보험금 수령과정, 뚜렷한 살인동기 없이 살인행위 자체에만 집중한 범행, 사생활에 대한 의문 등 여전히 남아있는 의혹들은 사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범인의 얼굴이 만천하에 공개된 것은 또 하나의 파장을 낳았고 더욱 많은 이들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모든 이목 강호순에 쏠려
하루아침에 찬밥신세
이렇다보니 두 명만 모여도 화젯거리는 강호순이었다. 각종 언론매체들은 그의 행적과 실체를 밝히는 데 집중했다. 호신용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사형제도가 다시 한 번 논의되며 사이코패스에 대한 자료들이 쏟아지는 등 강호순 사건이 남긴 것 또한 적지 않다.
이처럼 또다시 등장한 살인마로 온 나라가 들썩이는 가운데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진 사건들이 있다. 강호순이 나타나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온·오프라인에서 설전의 대상이 되었던 이슈들이 하루아침에 찬밥신세가 된 것.
그중 하나는 인터넷 경제대통령 ‘미네르바 사건’이다. 강호순의 존재가 드러나기 하루 전까지만 해도 미네르바 박모(31)씨는 모든 논란의 중심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겼다는 이유만으로 구속의 대상이 되는가란 문제부터 진짜 미네르바가 맞는지, 미네르바의 인터뷰를 실은 <신동아>는 진짜 미네르바를 대상으로 인터뷰를 한 것인지 등 미네르바는 여러 가지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진 채 조사를 받고 있었다.
강호순과 함께 터진 사건들, 주목받지 못한 채 묻혀
논란의 중심이던 미네르바, 강호순에 밀려 찬밥신세
용산철거민참사, 전지현 복제폰 등 큰 이슈들 관심에서 멀어져
대형사건 터지면 모든 이목 집중됐다 금세 잊는 세태 빚은 결과
그리고 지난 5일은 전기통신기본법 위반 혐의로 박씨가 처음으로 법정에 선 날이었다. 이전과 같은 관심의 대상이었다면 사상초유로 발생한 이 같은 법정다툼에 집중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의 눈은 강호순 사건에만 쏠려 있었고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날 법정에 출두한 박씨는 “쟁점 사항에 대해 할 말이 있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없습니다”라는 간단한 대답을 했다.
또 하나, 이날 법정에서 논란이 된 것은 박씨의 ‘보석허가’ 여부에 관한 것. 박씨 측 변호인단은 “검찰이 이미 공소사실에 대한 증거를 확보했고 피고인이 글을 어떻게 썼는지에 대한 것은 인터넷 등에서 찾아봐야 하는데 구속된 상태에서는 인터넷을 접할 수 없다”며 정당한 방어권 행사를 위해 보석허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 사건의 쟁점은 객관적 증거를 갖고 피고인이 허위성을 인식하고 글을 썼는지,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글을 썼는지를 가려내는 것”이라며 “지금 피고인이 자유의 몸이 되어 어떤 증거물을 새로 생산할 일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법정에 서기 전 박씨는 “파렴치범도 아니고 강력범도 아닌데 글 두 개 썼다고 교도소에 가둘 수 있나”라고 말하며 강호순에 빗대어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부당함을 피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말에 귀 기울이는 이는 많지 않았다. 살인마의 발자국에 필적하기에 미네르바의 존재와 그의 구속이 세상에 던진 논란은 미미할 뿐이었다.
오랜만에 그의 존재가 부각된 것도 강호순의 얼굴공개 덕분이었다. 이를테면 ‘미네르바의 얼굴도 공개했으면서 왜 살인마의 얼굴은 공개하지 않는가’라는 등의 의문 속에서 엑스트라로 등장한 것이다.
또 가장 논란이 된 ‘박씨가 진짜 미네르바가 맞는가’와 ‘신동아에서 인터뷰한 K씨는 가짜인가 진짜인가’등 진위여부와 관련된 사안도 잊혀졌다.
이런 가운데 박씨는 “지난 10월 포털사이트 다음을 통해 신동아 측으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는 증언을 했고 이에 대해 신동아와 다음이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하는 등 미네르바의 실체를 밝히는 데 있어 주목할 만한 다툼이 오갔지만 이것 역시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강호순 사건이 일단락된 지금에서야 미네르바 사건은 다시 수면 위로 오르고 있다. 검찰이 박씨에 대한 수사를 지난해 11월부터 착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표적수사’ 논란이 일고 있는 것.
검찰은 지난해 10월 말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미네르바를 처벌해 달라’는 A4용지 반장 분량의 인터넷 진정을 접수하고 이를 11월 중순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에 배당했다고 지난 10일 밝혔다. 검찰은 다음 측에 박씨에 대한 신원확인 요청을 하고 12월 초 그의 신원을 확인해 쓴 글이 진정인이 요구하는 처벌 사례가 되는지 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용산철거민참사도 ‘쏙’
물타기 의혹 등장해
또 하나 강호순에 묻힌 이슈는 ‘용산 철거민 참사’ 사건이다.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의 사퇴론이 불거지고 사망한 철거민들에 대한 추모촛불대회가 열리는 등 각계에 큰 파장을 낳을 태세를 보였던 용산참사. 그러나 이것 역시 강호순에 밀려 힘을 받지 못했다. 민주노총까지 가세해 추모대회의 촛불을 살리려고 했지만 여론은 이미 강호순의 행적에 쏠려있었다.
김석기 내정자에 대한 사퇴론 역시 묻히는 분위기였다. 철거민들의 억울한 사연도, 진압과정에 대한 의혹도 잊혀져갔다. 끔찍한 살인마가 벌인 사건에 쏠린 시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때문에 일각에선 용산참사를 덮기 위해 강호순 사건을 터트린 것이 아니냐는 물타기 의혹을 제기하는 등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다.
이처럼 용산참사 사건은 논란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정확한 진실규명도 받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나 있었다. 결국 김 내정자가 사퇴의 뜻을 밝힌 것으로 일단락된 이번 사태는 여전히 남은 의혹을 시원하게 풀지 못한 채 지난 과거로 묻히려 하고 있다.
이른바 ‘전지현 복제폰’ 사건 역시 유야무야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자신이 휴대전화로 대화한 내용이 고스란히 남에게 도청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보여 준데다 톱스타와 기획사 대표간에 벌어진 사건이란 점에서 단번에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이 사건.
‘주저앉는 소’도 관심 밖
오로지 강호순, 강호순
강호순 사건이 벌어진 후에도 이 사건은 급물살을 타며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소속사 대표의 주장과는 대조적인 경찰조사가 나오기도 했다. 대표가 복제된 휴대전화를 이용해 전지현의 문자메시지를 열람한 정황이 포착된 것.
또 언제든지 자신의 휴대폰이 복제돼 사생활이 노출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복제폰에 대한 단속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여기저기서 나오는 등 쉽게 묻힐 만한 사안이 아니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 사건 역시 연쇄살인마를 이기지는 못했다. 어느덧 전지현의 복제폰은 시들해졌고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졌다. 사람들은 살인마가 어떻게 사람을 죽였는지, 혹시 우리 주위에 사이코패스가 있지는 않은지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이런 가운데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는 전지현의 휴대전화를 복제해 문자메시지를 열람한 혐의로 심부름 대행업자 김모씨를 구속 기소하고 또 다른 김모씨 등 2명을 불구속 기소한 상태다.
이들은 소속사 대표 등으로부터 전지현의 휴대전화 복제 등을 의뢰받고 전지현의 휴대전화를 복제해 지난 2007년 11월21일부터 26일까지 인터넷으로 문자메시지를 열람한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해 범국민 촛불집회를 이끌어낸 쇠고기문제 역시 강호순 앞에선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주저앉는 젖소’(일명 다우너 소)가 유통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
경기경찰청은 ‘주저앉는 젖소’를 브루셀라병 검사도 받지 않은 채 불법 도축, 부산지역 등에 유통시킨 혐의(축산물가공처리법 위반)로 축산물 유통 브로커 김모(47)씨 등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축산물 유통업자 김씨 등은 지난해 6월부터 올해 1월까지 전국 축산농가에서 ‘다우너 소’ 41마리를 마리당 10만∼20만원에 구입, 새벽시간대에 부산지역 도축장으로 운반해 불법 도축한 뒤 시중에 유통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 등은 다우너 소의 귀표 번호를 정상 검사증명서를 받은 소의 귀표 번호와 일치하도록 변경하거나 귀표에 배설물을 묻혀 도축장 검사관이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우너 소는 인체에 감염될 수 있는 질병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있어 반드시 전문가의 검사를 받아야 하지만 불법 도축된 소 대부분은 부산지역 도·소매업체 5000여곳을 통해 시중에 유통된 것으로 확인됐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주저앉는 소가 브루셀라병이나 광우병에 걸렸을 가능성은 적다며 소비자들을 안심시키는 등 각 기관들이 식용가능성 여부에 대해 공방전을 벌였으나 국민들은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수많은 촛불이 물결을 이루던 지난해와는 대조적인 양상이었다.
지도부 총사퇴를 불러온 ‘민주노총 성폭행’ 사태 역시 사안의 중요성에 비해 조명 받지 못했다. 이는 민주노총의 고위 간부가 민주노총 산하 소속 조합원을 대상으로 성폭행을 저질렀고 민주노총은 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사건을 축소하려했다는 의혹으로 세간에 알려지자 지도부가 총사퇴의 뜻을 밝힌 사건이다.
민주노총 출범 이래 최대의 위기를 불러온 사태지만 강호순 덕분에 큰 사건으로 비화되지 않은 채 조용히 묻히려는 태세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대중과 여론의 냉혹한 질타와 평가를 받아야 할 굵직굵직한 사안들은 살인마에 가려져 손해를 보기도 하고 이득을 보기도 하며 서서히 잊혀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대형사건이 터지면 다른 사건엔 관심도 두지 않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있는 한 이런 세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