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사회팀] 하윤지는 미국에서 성악을 전공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뮤지컬에 도전했다. 그는 자신을 '국내 최초'라고 소개했다. 성악을 하다가 뮤지컬로 전향한 배우는 많지만 뮤지컬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오페라 가수라고 규정짓는 아티스트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하윤지는 '국내 최초'란 말에 제법 근접했다. 하윤지는 정통 성악가 출신으로는 보기 드물게 뮤지컬 배우 겸업이라는 이력을 쌓아가고 있다. 얼마 전에는 '모차르트 락'이라는 프랑스 원작 뮤지컬로 국내 무대에 섰다. 노래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그는 성악을 할 때는 성악가로, 뮤지컬을 할 때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며 남다른 의욕을 드러냈다. 도전, 또 도전 "많은 분들이 신기해하시는데 어릴 때는 꿈이 원래 가수였어요. 그런데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거든요. 하지만 저는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계속 부모님을 설득했어요. 노래하게 해달라고. 그랬더니 부모님께서 '정 그렇다면 정통 음악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고…. 한국에서 클래식을 전공한 뒤 유학을 다녀왔어요. 그런데 돌아와 보니 한국의 문화 시장이 많이 달라져있었죠. 뭔가 새롭게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뮤지컬
[일요시사=사회팀] 그림을 보고 전화를 걸었다. 아파트라는 독특한 주제. '소통의 단절'이 곧바로 떠올랐다. 심봉민 작가는 "그 부분까지 생각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사람들은 그림을 통해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본다"고 설명했다. 그의 그림은 사람의 기억을 자극하는 매개였다. 홍익대학교를 졸업한 심봉민 작가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5명 중에 1명이다. 그의 말처럼 미술을 전공한 뒤 미술판에 남아있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미술은 길게 봐야 "30명 중에 많아야 5명?" "그림만 그려서는 먹고 살기 힘들잖아요. 갤러리에 그림 한 번 걸고 유명해진다? 그런 지름길은 없어요. 저는 앞으로도 이 길이 힘들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또 조급하진 않아요. 화가는 70대가 돼서도 팔만 움직이면 일할 수 있거든요. 누가 제 작업을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천천히 조금씩 쌓아 가면 되는 거죠. 미술은 길게 봐야합니다." 심 작가는 다른 신진 작가들처럼 학생들을 상대로 수업을 병행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림들한테 미안했어요. 제 자신에게도 미안했고. '난 꿈과 멀어지는 걸까?
[일요시사=사회팀] 전통 도자기를 만든다고 하면 왠지 고집스런 장인의 느낌이 든다. 검게 그을린 얼굴, 땀에 젖은 한복.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전통 도예를 오해하고 있는 사이, 선조가 남긴 ‘우리의 것’은 모두 바다 건너 일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무형문화재 박상진 도공은 “어쩔 땐 일본인 수집가에게 더 환대를 받았었다”며 강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완만한 곡선의 도자기는 붉은 빛의 차(茶)가 담기자 그 맵시를 더했다. 박상진 도공과 마주 앉은 평상에는 형형색색의 다과가 올려졌다. 다도에 정통한 박 도공은 "색(色)과 향(香)과 미(美)가 한데 어우러져야 다도가 완성된다"며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박 도공이 직접 빚은 찻잔을 보고 있자니 그 안에 술(酒)이 담긴다면 또 어떤 모습으로 멋을 더할지 무척 궁금해졌다. "시대흐름 따라야" "너무 딱 떨어지는 건 재미없잖아. 요즘 나오는 찻잔들은 완벽한 좌우대칭이에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걸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겁니다. 재미가 없거든. 멋이 없어. 그리고 그런 건 공장에서 더 잘 만들고. 우리랑은 길이 전혀 다른 거죠." 박 도공은 40여년을 도자기 만드는 일에 매진해왔다. 1971년 고려도요로 입문해 2011
[일요시사=사회팀] 박진화 화백은 한때 모든 그림을 불태운 적이 있다.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고등학교 미술교사였던 그는 '그림'을 그렸다가 동료와 함께 구속됐다. 1980년대. 그렇게 모든 것을 잃었어도 그에게 '그림'만은 남았다. 지친 몸을 일으켜 그가 향한 곳은 바로 강화였다. 인천 강화군 대산리에는 '박진화미술관'이 있다. 1991년 한 무명작가는 가족과 함께 서울을 떠나 이곳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18년이 지난 그곳은 '박진화미술관'이 됐다. 분단 주제로 작품 국내 진보미술의 바통을 이어받은 박진화 화백은 최근 민족미술인협회(이하 민미협) 회장에 당선됐다. 바쁜 일정 속에 만났지만 소박한 그의 웃음은 너무나도 여유롭고, 또 아름다워 보였다. "회장에 취임하고 나서 딱 한 마디만 했어요. 민미협의 자존심을 지키겠습니다." 민미협은 800여 명의 회원을 갖고 있는 국내 최대의 진보미술가 단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회원수는 1500여 명에 달해 그 위세가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박 화백은 "1995년을 기점으로 많은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입을 열었다. "꼭 진보미술가뿐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살기 어려워진 것 같아요. 물질적으로도 그
[일요시사=사회팀] 화가 김지희는 그림을 그리는 직업을 갖고 있다. 그가 어릴 때 생각했던 화가는 멋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왠지 가난할 것 같고, 불행하게 살다 병들어 죽을 것만 같은 느낌. 그러나 그림이 가진 '불멸의 가치'에 매료된 '소녀'는 화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 만 스물아홉. 화가 김지희 작가는 국내 신진 여류화가 중 단연 돋보이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뉴욕, 도쿄, 런던, 베이징 등을 포함한 국내외 전시회만 모두 100여 차례. 마이애미 아트아시아아트페어, 뉴욕 레드닷아트페어 등 명망 높은 국제 아트페어에도 이름을 올리는가 하면 화장품 브랜드 미샤(MISSHA)와의 콜라보(MISSHA with Kim Jihee), 걸그룹 '소녀시대'와의 콜라보(GG X Kim Jihee) 등으로 자신의 활동 영역 또한 넓히고 있다. 소녀시대와 협업 2007년 일본 전일전 예술상을 통해 가능성을 알린 김 작가가 본격적인 미술 작업을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이다. 20대 대부분을 국내와 해외를 오고가며 숨 가쁘게 살았던 그였기에 조금은 휴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김 작가는 다음 작업에 대한 고민에 한창이었다. "생각해보면 늘 바빴어요. 고등학교 때도
[일요시사=사회팀] 국내 최초로 이탈리아에서 ‘에스프레소 감별사’ 자격증을 취득한 이미숙(49) 마리아아카데미 대표. 그는 많은 한국의 소비자들이 질 낮은 커피를 마시고 있다고 지적했다. 커피에 대한 열정으로 20년 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 온 그와의 인터뷰는 ‘진짜 에스프레소’처럼 깊은 여운을 남겼다. "에스프레소 감별사는 와인의 소믈리에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국인 최초로 에스프레소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에스프레소 감별사' 자격증을 취득한 이미숙 마리아아카데미 대표. 그는 IIAC(커피감정국제연구소)이 인증하는 '에스프레소 감별사' 자격증과 '이탈리아 에스프레소 전문가' 자격증을 갖고 있었다. 10년에 걸친 시간 동안 통역 없이 이탈리아어를 배우며 커피의 A부터 Z를 알아간 이 대표는 지금도 이탈리아로 날아간 그때의 열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서 공부 "국내에 원두커피가 1989년 처음 들어왔어요. 저는 1992년부터 커피 컨설팅 사업을 시작했고요. 1998년에는 에스프레소 전문점을 전국 10군데에 오픈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인 1999년. '스타벅스'가 우리나라에 처음 진출했는데 때마침 저도 미국 시애틀에 가서 에스프레소에 대해 배우던 참이
[일요시사=정치팀] 1998년 새정치국민회의 수석부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한 민주통합당 소속의 박병석 국회부의장은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대전 서구 갑에 당선되면서 헌정사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이후 내리 3번을 같은 지역에서 당선된 박 부의장은 ‘한결같은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대선에 패배한 민주통합당과 차기정부의 가교역할을 해야 하는 위치에 놓였다. 박 부의장이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해 당심을 추스르고, 차기 정부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이어가 ‘상생의 정치’를 펼칠 수 있을지. <일요시사>가 민족의 명절 설날을 맞아 정국의 연결고리가 될 그의 속내를 들어보았다. 박병석 국회부의장은 한결같았다. 인터뷰 내내 편안한 미소를 잃지 않은 것도 그렇고, 질문 하나하나 신중하게 답하는 모습도 그랬다. 인터뷰에 앞서 부의장실 문 앞까지 마중 나왔던 것처럼, 인터뷰를 마치고도 그는 친히 취재기자를 배웅했다. 어디에서도 입법부 2인자로서의 권위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참으로 소탈한 인상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익히 들은 바대로 박 부의장의 ‘빈틈없고 강단 있는’ 모습 또한 분명히 엿볼 수 있었다. 괜
[일요시사=사회팀] 시사만화가로 알려진 유기송 화백은 인생의 대부분을 그림과 함께 살았다. 서양화를 배우며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림을 그렸고 이중 절반이 넘는 37년을 시사만화가로 활동했다. "모든 그림에는 작가의 생각이 들어간다. 사람의 생각이 매번 바뀌는 것처럼 그림도 항상 다른 의미로 새롭게 다가온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거장'만이 가진 아우라를 느꼈다. 1940년 인천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유기송 화백은 1968년 <서울신문> 미술부에 입사했다. 입사 당시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그는 "만화에 재미를 느껴서 시사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유 화백이 본격적인 시사만화가로서 활동한 것은 1989년 <세계일보>로 스카우트되면서부터다. "그때는 배가 고파가지고…. 어디 취직하느냐가 문제였는데 그림을 그려서 돈을 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마침 기회가 닿은 <서울신문>에 들어갔지. 그리고 만화를 즐기면서 그리다보니 <세계일보>에 스카우트 된 거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시작 지면신문의 파급력이 막강하던 1970∼80년대. 시사만화가는 그 날의 그림 한 컷으로 '천당과 지옥'을 왔다
[일요시사=사회팀] 글로벌 시대가 도래하면서 의료, 교육, 관광, 금융 등 수많은 계통에서도 서비스라는 수식어는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닌다. 그중 고객만족서비스는 개인 혹은 기업, 나아가서는 한 나라의 이미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미선 코리아매너스쿨 원장은 가급적 많은 이들에게 고객만족서비스교육을 실시해 경제효과를 증대시키는 역할을 도맡고 있다. <일요시사>가 CS(고객만족서비스)교육의 창시자 이 원장을 만났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말이 있다. 생각 없이 던진 말과 행동이 때로는 타인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전직 대한항공 승무원 출신인 이미선 코리아매너스쿨 원장은 이처럼 의도치 않은 언행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사례를 방지하고자 기본 에티켓을 제반으로 한 고객만족서비스교육을 실시해 경제효과를 증대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매너가 곧 경쟁력 서울시립대학교 영문학을 전공한 이 원장은 대한항공에서 8년간 승무원과 사장 및 VIP 의전담당을 했고, 대한항공에서 국내 최초로 서비스아카데미 교육원이 창설되면서 초대강사로 활동했다. 그는 사내 임직원을 상대로 기본 에티켓과 고객만족서비
[일요시사=사회팀] '클래식은 어렵다?' 독일 유학파 출신 비올리스트 조아람(27)은 클래식이 대중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가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의 전당의 고고함보다는 일상으로 초대된 친근함을 말하는 그에게서 한국 클래식의 미래가 엿보였다. 독일 뒤셀도르프.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이곳에 한 한국인 비올리스트가 있었다. 귀국 후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고 있는 비올리스트 조아람을 <일요시사>가 만났다. -먼저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 안녕하세요. 13살 때 처음 비올라를 시작해 지금까지 인연을 맺고 있는 비올리스트 조아람입니다. -13살이면 또래에 비해 늦게 음악을 시작하신 거죠. ▲ 네. 클래식은 보통 5∼7살에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제 경우에는 사촌오빠가 비올라 전공인데 그 오빠에게 배우다가…. 이게 너무 재밌는 거예요. 원래 전공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욕심이 좀 생겼죠. -그럼 중학교 입학할 때 이미 비올라 전공을 선택하신 거네요. ▲ 안 그래도 부모님이 반대를 좀 하셨어요. 그냥 피아노를 치는 게 어떻겠냐고. 하지만 전 비올라가 더 좋았어요. 그때는 '예중에 가야지' 이런 생각보다 비올라를 연주하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 좋아서
[일요시사=경제1팀] 암과의 전쟁이다. 매년 7만명이 넘는 국민이 고통에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다. 7분에 한 명 꼴이다. 암 정복. 불가능한 것일까? 아니다. 암의 정복을 가능하게 하는 치료기가 있다. 신지식인으로 선정된 조규면 유니드파트너스 대표가 '꿈의 암치료기' 도입에 앞장서고 있다. <일요시사>가 조 대표를 만났다. 매년 암과의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약 25조원 규모. 암 환자수는 매년 약 20만명(2011년 기준)씩 급증하고 있으며 2015년에는 매년 8만명이 넘는 국민이 암으로 죽어갈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소아암환자는 2만명을 넘는다. 지난 50년간 인류는 암과 싸워왔다. 하지만 항상 패배했다. 암이 '만병의 황제'라 불리는 이유다. 이런 가운데 암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키고 암의 종말을 가능하게 하는 치료기의 국내 도입을 앞장서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조규면 유니드파트너스 대표이사다. 암 종말 가능하다 대부분의 회사가 종무식으로 정신없었을 지난달 31일, 인터뷰를 위해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유니드파트너스 본사를 찾았을 때 조 대표는 중입자 가속기 암치료 센터 조감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일요시사=정치팀] 역대 대선에서 충청권의 표심은 언제나 승패를 좌우하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해왔다. 때문에 충청권의 대표도시인 대전에 지역구를 두고 있는 이장우 새누리당 의원(대전 동구)의 어깨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비록 초선이지만 대전지역 최연소 자치단체장을 역임하는 등 화려한 이력으로 당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이 의원을 <일요시사>가 만나봤다. 이장우 새누리당 의원은 충남 청양군 출신으로 지난 2006년 대전 동구청장에 당선되며 대전 지역 최연소 자치단체장의 기록을 갈아치우는 등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구청장 시절에는 동구청사 이전과 고속버스터미널 현대화 사업 등을 추진하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비록 지난 총선과정에서는 임영호 전 선진통일당 의원에게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고발을 당하는 등 곤란도 겪었지만 최근 새누리당과 선진통일당이 합당하면서는 오히려 양당 화합의 아이콘으로 주목받고 있다.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지역구 표심 모으기에 한창인 이 의원. 그는 과연 이번 대선의 캐스팅보트인 충청권의 표심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다음은 이 의원과의 일문일답. - 처음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와 이유는 무엇인가? ▲ 나는 충남
[일요시사=김설아 기자] 최근 몇 년간 케이블TV에서는 ‘빙의’와 ‘퇴마’를 소재로 한 심령치유 프로그램을 쏟아내 큰 인기를 끌었다.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퇴마사들이 등장했고 개중에는 용한 퇴마기술을 선보이며 연예인 못지않은 스타급 퇴마사들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 중 한 명인 김영기 법사.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귀신을 소재로 하는 영화, 이야기가 쏟아지는 요즘. 마포구 도화동에 있는 법당에서 그를 만났다. “15년 전 첫 방송에서 ‘퇴마사’로 얼굴을 알린 후 줄곧 방송을 통해 퇴마의식을 해왔죠. 그러다 보니 퇴마 쪽 일만 부각되었지만 퇴마는 제가 하는 일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사주는 물론이고 풍수 등 보다 다양한 일을 하고 있어요.” 20년간 우리 생활주변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현상을 해결하고, 미래의 불확실함을 타파시켜온 퇴마사 김영기 법사. 그는 이미 유명인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사람이다. 특히 오는 12월 대선을 앞두고, 혹은 검찰·경찰 인사이동이 있는 시기면 그를 찾는 유명인들은 더욱 늘어난다. 뿐만 아니다. 연애문제로 고민하는 연예계 톱스타들의 단골로도 알려져 있다. 상사병에 걸리거나 삼각관계에 놓인 경우, 새 프로 출연이나 소속사
[일요시사=한종해 기자]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기름값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조금이라도 싸게 주유하고자 알뜰주유소 앞에서 30분을 넘게 기다려보기도 하고 고작 몇 십원 할인받는 카드를 만들기도 한다. 누가 주유쿠폰이라도 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하지만 조금 싸게 넣는 다고해서 기름값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나섰다. 지난달 21일 기자회견을 갖고 현재보다 20% 싼 기름값을 목표로 하는 국민석유회사 설립 및 출범 소식을 알린 것. 국민석유회사 준비위원회 측은 이미 국민석유회사 홈페이지(http://www.n-oil.co.kr)를 마련해 차량 소유자 등 유류 소비자를 대상으로 1인 1주(1주 1만원) 갖기 운동 등을 벌이고 있다. 준비위가 목표로 하는 초기 설립자금은 1000억원이며 이중 국민약정 목표액은 500억원이다. 국민석유회사 출범 20% 싼 기름 나오나? 국민석유회사의 목표는 현재보다 20% 싼 기름이다. 이태복 국민석유회사 상임대표는 국내 차량소유자가 1600만명이 넘기 때문에 차량 소유자들이 1인 1주 갖기 운동에 동참만 해준다면 초기 설립자금은 충분하다고 주장하
[일요시사=정치팀] 전두환의 5공 정권은 고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고 가 이근안과 고문기술자들을 동원해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10차례 갖은 고문과 구타를 가했다. 결국 김 전 고문은 후유증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다 지난 2011년 12월30일 숨을 거뒀다. 이 끔찍한 과정을 함께 겪은 이가 또 있었다. 제19대 국회의원으로 헌정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김 전 고문의 ‘바깥사람’ 인재근 민주통합당 의원이 그 주인공이다. 인 의원은 ‘별’이 진자리를 지키며 세상을 밝히기 위해 고된 땀을 흘리고 있다. 지난 3일 국회에서는 ‘고문 방지 및 고문피해자 보상·치유에 관한 법률안’ 공청회가 열렸다. 취재기자는 세 시간 동안 자리를 지켰다. 법안을 발의한 인재근 의원과의 인터뷰를 작정(?)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고문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인 의원의 ‘아프도록 귀한’ 말씀을 전해야겠단 일념이었다. 취재기자는 수차례 방문하고 전화하며 인터뷰를 성사시키기위해 공을 들였다. 그리고 지난 7일 드디어 어렵사리 인 의원과 대담을 가질 수 있었다. 다음은 인 의원과의 일문일답. - 영화 <남영동 1985> 상영으로 고 김근태 상임고문에 대한
[일요시사=정치팀] 제18대 대선에 출마한 기호 7번 김순자 무소속 대선 후보는 청소노동자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출마를 놓고 "청소아줌마는 청소나 하지?"라며 눈을 흘기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김 후보는 당당히 외친다. "청소노동자도 정치할 수 있다. 돈 많고 배운 사람들은 우리를 대변해주지 않는다. 대통령은 잘난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잘 대변해줄 사람이 해야 한다"고. 인터뷰를 위해 찾은 김순자 무소속 대선후보의 캠프는 어느 허름한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흔한 현수막조차 없어 캠프를 찾는데 상당한 애를 먹었다. 하지만 내부의 분위기는 그 어떤 후보의 캠프보다도 활기찼다. 캠프는 단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돼 있다. 지난 5일 기준으로 김 후보의 지지율은 0.1% 남짓. 이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오직 바른 정치, 바른 노동, 바른 세상을 향한 열망이었다. 어제까진 평범한 청소아줌마였던 그가 이번 대선에 출마할 수밖에 없었던 진짜 사연은 무엇일까? <일요시사>는 이른바 대선 빅2의 틈바구니에서도 청소노동자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김 후보를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눠봤
[일요시사=정치팀]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과 행동지침으로 내세운 소위 주사파 골수 운동권 출신이다. 하지만 통일운동을 하다 중국에서 탈북자들의 실상을 접한 후엔 오히려 북한인권운동가로 변신했다. 또 지난 4·11 총선에서는 보수진영인 새누리당의 후보로 부산 해운대구 기장을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임수경 민주통합당 의원은 그런 그를 '변절자'라며 몰아세우기도 했지만 하 의원의 변신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발언이 이번 대선의 최대 이슈 중 하나로 떠올랐다. 민주통합당은 거듭 사실무근임을 주장하고 있지만 의혹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와 함께 덩달아 주목을 받게 된 인물이 있다. 바로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이다. 그는 민주당과 차별화 되는 새누리당의 안보 정체성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 의원은 무척 다채로운 이력을 지녔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수재지만 정작 대학시절에는 학생운동을 하다 두 번이나 구속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소위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주사파였던 그는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돕는 과정에서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는 모습과 매
[일요시사=정치팀] 민주통합당 내에서 꾸준히 '정치쇄신'을 외치고 나서는 의원이 있다. '이해찬-박지원' 2선 후퇴를 주장하며 민주당의 변화를 요구하는 그는 제19대 국회의원으로 대한민국 헌정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황주홍 의원이다. 단일화의 진전으로 당 안팎의 쇄신 목소리가 점차 사그라지는 지금, 민주당의 변화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황 의원의 속내를 들어봤다. 민주당 내에선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라는 고민조차 조심스러웠다. 하나 둘 목소리가 모이더니 '인적 쇄신'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민주당의 변화는 급물살을 탔다. 쇄신의 방울을 달겠다고 자청하고 나선 의원들의 움직임이 멈추지 않은 탓이다. 그 중심에 있는 황주홍 의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강하고 또렷했다. 다음은 황 의원과의 일문일답. - 일찌감치 문재인 후보를 향해 '당내 인적쇄신'을 일관되게 촉구했다. 이 같은 발언으로 당내 시선이 따가웠을 텐데, 목소리를 높인 배경은 무엇인가. ▲ 나는 국회의원이 되면서 계보와 계파에 속하지 않고, 오로지 '국민파벌'을 추구할 것임을 선언한 바 있다. 그런데 막상 국회에 들어와 보니 국민의 뜻보다는 당론, 당론보다는 계파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경향을 자
[일요시사=온라인팀] 1985년 군부독재의 야만이 꿈틀거리던 그 때,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울려 퍼지는 고문의 신음소리를 스크린에 고스란히 옮겨 담은 영화 <남영동1985>의 정지영 감독. 그는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눠보니 강렬한 첫인상과 달리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남자였다. 머리는 차갑지만 가슴은 따뜻한 '정.지.영'을 추위도 잠시 숨을 고른 11월의 어느 화창한 날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봤다. "박근혜 후보는 <남영동1985>를 보고 사과의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 김지하 시인의 발언에는 맥락이 없다…이근안은 시대의 희생양이다." '명불허전' 역시 정지영이다. 정지영 감독은 다소 민감할 수 있는 정치·사회 및 영화계 이야기에 대해 가감 없이 돌직구를 던졌다. 그러면서 정 감독은 "젊은이들이 망가져가는 민주주의를 외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길 바란다"며 <남영동1985>를 연출한 이유를 밝혔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 영화에서 '용서'에 대해 그렸는데 사과를 구하는 박근혜 후보의 대통합 행보가 진정성 있다고 보는가? ▲ 대선후보 3인에게 VIP시사회 참석 여부를 물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
[일요시사=정치팀] 한광옥 새누리당 국민대통합 수석부위원장은 4선 국회의원을 지낸 동교동계 원로이자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핵심측근이었다. 그는 1997년 DJP(김대중+김종필)연대를 성사시킨 대선승리의 숨은 주역이며, 지난 2002년 대선 때는 국민경선제를 최초로 도입, '이회창 대세론'을 무너뜨리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그의 새누리당 행을 놓고 정치권이 발칵 뒤집어진 이유다. 과연 한 부위원장의 새누리당행에는 어떠한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또 다가오는 대선에 그가 미칠 영향력은 어느 정도일까? <일요시사>가 그를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눠봤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한광옥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지난 10월 5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선거캠프에 전격 합류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온갖 비판이 쏟아졌다. 입당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지난 2003년 나라종금 의혹 당시 중수부장으로 자신을 구속 기소한 안대희 새누리당 정치쇄신특위위원장이 "무분별한 비리인사 영입은 납득할 수 없다"며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박 후보의 중재 끝에 두 사람의 갈등은 봉합되었지만 한 부위원장으로서는 억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닐 터. 그럼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