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재벌 2세라고 사칭해 여성을 유혹한 뒤 돈을 갈취한 사기범이 덜미를 잡혔다. 고급 외제차와 명품으로 중무장한 이 남성은 강남의 유명 피트니스클럽을 전전하며 부유한 여성을 물색했다. 화려한 겉모습과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여성은 재벌가에 시집갈 수 있다는 부푼 꿈을 안고 의심 없이 돈을 준 것으로 드러났다. 언변 하나로 재벌 2세가 돼 1억원이 넘는 돈을 뜯어낸 기막힌 사기꾼의 수법을 들여다봤다.
외제차와 명품으로 재벌 아들 사칭 1억 갈취한 30대
강남 피트니스 클럽 돌며 여성 물색 철두철미 사기행각
외제차 다섯 대와 고급 원룸으로 감쪽같이 자신을 재벌 2세로 둔갑시킨 박모(37)씨. 재산도, 직업도 없던 박씨는 화려한 언변으로 자신을 재벌 2세라고 믿게 만들어 여성들을 농락했다.
서울 혜화경찰서에 따르면 박씨는 지난 1월 자신을 대기업 회장 아들이라고 속여 여성들에게 돈을 갈취할 계획을 짰다. 그가 여성들을 물색한 주 무대는 서울 강남 청담동, 역삼동 등의 고급 피트니스 클럽. 그곳에서 박씨는 직장인 김모(29·여)씨를 소개받았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외제차에 ‘깜빡’
박씨는 먼저 김씨에게 “나는 모 기업 회장의 아들이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행여나 김씨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을 대비해 외제차도 준비했다. 물론 렌터카업체에서 빌린 차였다. 아우디, 벤츠, BMW 등 고급 외제차 5대가 박씨의 무기였다. 이를 본 김씨는 부유층이라는 박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다. 박씨는 한남동 본가 사진이라며 고급 주택과 정원 사진을 보여줘 의심을 차단했다. 그러면서도 박씨는 “자신을 평범한 회사원으로 대해 달라”는 말을 해 호감을 높여갔다.
다른 재벌들과의 인맥도 과시했다. 박씨는 휴대전화에 ‘S그룹 회장’이라고 지인의 이름을 저장한 뒤 지인에게 연락이 오면 김씨에게 휴대전화를 보여줬다. 이를 본 김씨는 박씨가 대기업 회장과도 연락을 주고받는 ‘진짜 재벌’인 것으로 철썩 같이 믿었다.
자신에게 서서히 넘어오는 김씨를 보면서 박씨는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결혼약속이었다. 박씨는 “아버지가 그룹 회장이지만 나는 평범한 여자를 원한다”는 식의 말로 김씨를 사로잡았고 결국 성관계까지 가졌다.
속임수로 몸과 마음까지 빼앗은 박씨는 서서히 마수를 뻗었다. 본격적으로 돈을 갈취하기 시작한 것. 박씨는 먼저 “고급 정보를 많이 알고 있으니 투자를 하면 큰 돈을 벌게 해 주겠다”고 김씨를 유혹했다. 박씨는 “요즘 회사가 시끄러운데 내가 담당하는 것이 금융으로 고급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며 “투자하면 2배를 벌게 해주겠다”고 속였다. 이에 김씨는 저축은행에서 대출까지 받아 박씨에게 돈을 줬다.
또 “우리 집에 시집오려면 경제관념이 투철해야 하니 내가 카드를 정리해주겠다”며 김씨로부터 신용카드 5장과 마이너스 통장 3계좌를 건네받았다. 이런 방식으로 김씨의 신용카드를 손에 넣은 박씨는 현금서비스와 카드론 서비스 등으로 돈을 인출했다. 11일 동안 신용카드와 마이너스 통장에서 빼 쓴 돈은 무려 1억원. 이 돈은 고스란히 생활비와 유흥비로 쓰인 것으로 드러났다.
데이트 비용도 대부분 김씨가 냈다. 박씨는 “나는 신분 상 신용카드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고 속여 김씨가 돈을 내게 만들었다.
이처럼 각종 방식으로 재벌 2세를 사칭해 돈을 갈취한 박씨. 하지만 돈을 챙긴 뒤에는 태도가 돌변했다. 박씨는 그 후 부쩍 바쁘다는 핑계를 많이 대며 만남을 미뤄왔다.
이 같은 박씨의 사기 행각은 금세 꼬리가 잡혔다. 강남 일대 고급 피트니스클럽을 전전하면서 사기행각을 벌인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에 의해서였다. 혜화경찰서는 3일간의 잠복수사로 박씨를 잡았다.
경찰에 따르면 박씨가 잡히는 그 순간까지도 김씨는 박씨가 재벌 2세라고 믿고 있었다. 김씨는 경찰에서 “재벌가에 시집가고 싶었다. 이상한 점이 많았지만 재벌 2세라는 사실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조사결과 박씨의 범행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유사한 범행을 저질러 전과 11범이란 꼬리표가 붙었던 것. 대부분의 범행은 부유층 행세로 여성의 돈을 가로채는 방식이었다. 지난 2001년에는 자신이 재벌 2세이고 성형외과 의사라고 피해 여성을 속여 3억원을 가로챘다. 이 사건으로 박씨는 교도소에 8년 동안 수감돼 있다가 작년 5월 가석방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피의자가 180cm 정도의 키에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고 영어도 구사해 피해자들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은 것 같다”며 “박씨가 다른 피해자에게 받은 돈을 가지고 재벌 행세를 했다고 진술해 여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넘쳐나는 재벌 2세
박씨처럼 자신을 재벌 2세로 포장해 이성을 농락한 사건은 적지 않았다. 지난 2008년에는 연예기획사업을 하는 재벌 2세라고 속여 여성들의 돈을 뜯은 최모(36)씨가 덜미를 잡혔다. 최씨는 인터넷 채팅으로 여성들을 만난 뒤 “내 아버지가 부동산으로 수십억원이 있지만 당장 현금화하기 어렵다”고 속여 2억2300여만원을 가로챘다. 최씨는 자신이 부유층임을 보여주기 위해 서울 고급 호텔 스위트룸에 거주했고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닌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가하면 재벌 딸이라고 속이고 결혼할 것처럼 접근해 6억여원을 뜯은 여성도 덜미를 잡힌 바 있다. 지난 2008년 정모(31·여)씨는 “나는 재벌그룹 회장의 딸이다. 나와 결혼하자”고 한 남성을 속였다.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정씨에게 속아 넘어간 이 남성은 무려 6억7000만원의 돈을 뜯겼다.
한 경찰관계자는 “의외로 자신이 재벌 2세라는 말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돈을 넘겨줘 피해를 입는 사건이 비일비재하다”며 “외제차와 명품으로 치장하기만 하면 별다른 의심없이 재벌 2세란 말을 믿는 세태가 씁쓸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