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대통령과의 대화’ 통해 세종시·4대강 정면승부
박근혜 ‘세종시 원안+α’ 발언 파장 확산되자 입 ‘꾹’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목소리에 힘을 싣지 않아도 주목받는 이가 있다. 요즘 박근혜 전 대표가 그렇다. 박 전 대표는 세종시 수정 논란이 일자 ‘국민과의 약속’을 강조했다. 이후 몇 차례 입을 열기는 했지만 세종시 ‘원안+α’ 입장에서 한 치의 물러섬도 나섬도 없다. 특유의 정중동 행보다. 하지만 세종시를 원안대로 가지고 갈 것이냐, 수정할 것이냐를 두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여야 모두 박 전 대표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흔들림 없는 태도가 그의 발언에 무게감을 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세종시 수정 논란에는 각기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는 이들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여당과 야당, 그리고 박근혜 전 대표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과의 대화’를 통해 세종시와 4대강 문제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한마디’ 말로 입장을 알린 후로는 요지부동이다.
박 전 대표는 세종시 수정 논란이 불거지자 여당의 아픈 대못이 됐다. 그는 지난 10월23일 세종시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정부가 (수정이) 필요하다면 세종시 원안에다 플러스 알파를 해야지, (정부 부처 이전) 백지화는 안 된다”고 원안 고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세종시 수정 논란 일축
정부여당 속 아픈 대못
박 전 대표는 또 “정치는 신뢰다. 이런 약속이 무너진다면 앞으로 한나라당이 국민들에게 무슨 약속을 할 수 있겠느냐. 이는 결국 당의 존립문제”라고 일침을 가했다. “선거 때마다 앞 다퉈서 정치인들이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만약 이를 지키지 못한다면 국민들은 앞으로 내놓는 한나라당의 약속을 믿어주겠느냐”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여러분들도 (2005년) 당시 통과 과정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수많은 토의를 했고, 결국 여야가 합의해줬던 사안”이라고 당시 한나라당도 세종시 문제에 많은 고민을 했음을 거론했다.
그럼에도 세종시로의 정부 부처 이전이 박 전 대표 자신만의 주장이라는 비판이 일자 10월31일 다시 입을 열었다. 박 전 대표는 “내 개인적인 정치 신념으로 폄하해선 안 된다”며 “세종시는 국회가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한 약속이지 개인 약속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이어 “세종시를 이대로 추진하면 유령도시가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런 논리라면 한나라당이 그동안 각종 보궐선거, 총선, 대선에서 철석같이 약속을 지킨다고 한 것이 표를 얻기 위해 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게 아니다”라고 정부의 세종시법 수정 주장을 지적했다.
정운찬 국무총리의 면담 제의에 대해서도 “의회 민주주의 시스템에 대해서, 그리고 국민에게 한 약속이 얼마나 엄중한지 모르고 하는 말”이라며 “설득하고, 동의를 구한다면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해야지 나에게 할 일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박 전 대표가 세종시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사실상 이 두 번이 전부다. 하지만 그 파괴력은 엄청났다. 박 전 대표의 입장 발표 후 여론의 흐름이 달라진 것.
세종시 논란이 일어난 후 여론은 ‘세종시 수정’으로 기울고 있었다. 여론조사기관 모노리서치가 9월25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세종시 원안 추진 찬성은 23.7%에 불과했다. 심사숙고해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41.5%, 처음부터 새로 논의해야 한다는 의견이 20.3%로 세종시 수정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리서치플러스의 9월26일 조사에서도 ‘원안+α’을 지지하는 이는 42.4%, 수정안을 지지하는 이는 46.7%이었다.
그러나 박 전 대표의 ‘의미있는 한마디’ 후 상황은 반전했다. 모노리서치의 지난달 1일 조사에서 원안 추진에 찬성하는 이는 47.9%로 수정이 불가피하다 29.6%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 리서치플러스의 10월31일 조사에서도 원안 추진(35.3%), 15개 부처 전부 이전(13.4%) 등 ‘원안+α’에 대한 지지가 사업 대폭 축소(21.5%), 전면 백지화(17.9%)에 대한 주장을 앞질렀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당초 수정안 지지 여론이 우세했다가 한 달 만에 흐름이 뒤집힌 것은 박 전 대표의 영향력 때문”이라며 “박 전 대표의 정치적 기반인 영남권 여론이 수정안 찬성에서 반대로 돌아선 것이 주효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표는 이후 세종시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있다. 지난달 4일 측근을 만나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 쓴소리를 쏟아냈지만 세종시 수정에 대한 직접적인 반대라기보다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데 대한 지적이었다.
당시 그는 “(당내에서)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한나라당이 개혁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던 게 여러 부분에서 희석되고 국민과의 약속도 소홀히 하는 당이 된다면 또다시 지난번(2004년)처럼 국민으로부터 외면 받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전했다.
최근 세종시 문제에 대한 여야의 대립이 심해지면서 박 전 대표의 입장을 묻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그는 “할 말은 이미 다 했고, 입장에 변함이 없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하고 있다.
한 정치평론가는 이에 대해 “세종시에 대한 정부 최종안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박 전 대표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은 없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치인의 한마디는 수많은 해석을 낳는다. 같은 말이라도 때와 장소,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받아들일 여지를 둔다”며 “박 전 대표는 ‘단호한 한마디’ 이후 ‘기존의 입장과 변함이 없다’는 말 외에 다른 발언은 피하는 것으로 자신의 발언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종시 여론 반전
“할 말은 이미 다했다”
여권 한 인사는 “이슈는 이미 박 전 대표가 선점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이 대통령은 정국의 이슈를 끌고 가고 있다. 수많은 이슈를 생산할 수 있는 자리에 있고 야권이 가진 이슈도 선점하고 있다. 야권이 쏟아지는 이슈에 대응하느라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박 전 대표는 세종시라는 하나의 이슈를 쥐고 분위기를 끌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박 전 대표는 세종시와 관련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여론도, 영남과 호남의 민심도 한손에 틀어쥔 상태”라며 “최종안이 어떤 식으로 나온다 해도 이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시 같은 정치 현안에 대한 발언은 극도로 자제하고 있는 박 전 대표지만 주말 나들이는 늘었다.
박 전 대표는 지난 10월31일 해운대 벡스코에서 열린 불교행사 ‘백고좌 대법회’에 참석했다. 지난달 8일에는 자신의 미니홈피 900만 번째 방문자들과 경희궁에서 ‘문화재 봉사활동’에 나섰다.
11월14일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92주년을 맞아 구미의 박 전 대통령 생가를 찾았다. 같은 달 29일에는 모친인 육영수 여사의 ‘탄신84주년 숭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충북 옥천을 방문했다. 지난 6일에는 서울 용산 서울시교육시설관리사업소에서 열리는 소년소녀가장 돕기 김장·바자회 행사에 참석했다. 지지단체인 ‘호박넷’이 다른 팬카페들과 함께 개최한 이 행사에서 박 전 대표는 앞치마와 고무장갑을 착용하고 김장에 나섰다.
바쁜 주말 나들이
‘정치 현안’ 피해라
박 전 대표는 ‘문화재 봉사활동’과 관련해서는 “봉사활동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높이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장·바자회 행사에 참석하기 전 미니홈피를 통해 “추운 겨울이 다가올수록 어린 나이에 가장을 맡고 있는 소년소녀들에게는 어려움이 더욱 클 것이라 생각한다”며 관심와 참여를 당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철저히 정치 현안은 배제하고 있다. 충북 옥천을 방문하기 이틀 전 이 대통령이 ‘대통령과의 대화’를 가져 정국이 어수선했지만 박 전 대표는 닫힌 말문을 끝내 열지 않았다.
그러나 탄신제 유족대표 인사말 중 “대도약의 꿈이 싹텄던 이곳 생가에 올 때마다 지도자와 국민이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서 나라가 얼마나 바뀔 수 있고, 국민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새삼 느끼곤 한다”는 말은 다른 해석을 낳았다. 해석하기에 따라 세종시 수정 반대 여론이 높음에도 강행 의지를 보이고 있는 이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
숭모제 유족대표 인사말 중 무궁화꽃으로 한국 지도를 표현한 육 여사의 자수 작품을 언급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박 전 대표는 “매일 그 작품을 볼 때마다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전국 방방곡곡의 모든 국민이 행복하게 살기 바라셨던 마음이 느껴지곤 한다”고 말했다. 이는 ‘국토균형발전’을 위해 구상된 세종시를 떠올리게 한다.
박 전 대표는 이어 “어머니께서는 ‘절실해야 한다, 절실히 느끼면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국민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말 더욱더 절실해진다면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29일 친박 의원들과 만나 논한 ‘인생과 테니스의 닮은 점 7가지’에도 박 전 대표 나름의 정치 철학이 녹아 있다. 박 전 대표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그때그때 편하게 하면 실력이 늘지 않으므로 꾸준히 기본기를 갖춰야 한다’ ‘손목으로만 치면 안 되고 온 몸으로 쳐야 공도 잘 맞고 힘도 실린다’ ‘끝까지 공을 보고 쳐야 한다’는 점을 거론하며 “삶도 결국 테니스와 같은 것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정치권은 박 전 대표의 ‘테니스론’에 대해 “평소 원칙, 신뢰, 약속을 중시하는 그의 정치 스타일과 일맥상통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최근 박 전 대표의 발언 속에서 세종시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며 “세종시 논란에서 자신이 서 있는 곳 외에는 섣불리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있지만 각종 행사를 통해 보폭을 넓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정부 최종안이 나오면 이 대통령과 진검승부를 펼칠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끝까지 공(세종시)을 보고 쳐낸 한 방에 그동안의 쌓아온 기본기와 온몸을 다한 ‘힘’이 실릴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