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병폐로 자리매김한 ‘홧김범리’ 실태 <밀착취재>

2009.10.20 10:06:17 호수 0호

‘욱’하는 성질 건드렸다가 피바다 ‘허걱’

사회가 살벌해지고 있다. 홧김범죄가 만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탓이다. 아무런 동기도, 계획도 없이 단지 화가 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저지르는 범죄가 크게 늘고 있다. 가벼운 폭행을 넘어 살인까지 일어나는 경우도 다반사다.

최근엔 자신이 기르는 개에 목줄을 채우란 말에 화가 나 엉뚱한 사람에 흉기를 휘둘러 살해한 사건이 벌어져 세간을 경악케 하기도 했다. 사회병폐로 자리 잡은 홧김범죄를 좇아봤다.


해마다 증가하는 충동살인 ‘아무런 동기도 계획도 없다’
생활 속 흔히 벌어지는 일반적 시비에도 충동살인 발생

평온한 주말 오후 서울시의 한 주택가에 외마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갑작스럽게 화를 당한 이는 구의동에 살던 A(47)씨.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웃에게 흉기를 맞고 비명횡사한 것이다.

대낮 주택가에서 살인극을 펼친 장본인은 이모(64)씨다. 이씨가 순식간에 살인범이 된 이유는 ‘화를 참지 못해서’였다. 사건이 일어난 지난 10일 오후, 그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자신이 기르는 개와 함께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왔다.



“개 줄 묶어” 말에 분노
엉뚱한 이웃 무참히 살해

그때 이씨의 산책을 망치는 한마디가 들려왔다. 길을 지나던 한 남성이 “왜 개에게 목줄을 매지 않고 다니느냐”라고 따졌던 것. 자신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남성으로부터 듣기 싫은 소리를 들은 것에 화가 난 그는 말다툼을 하다 150m 정도 떨어진 집으로 달려갔다. 시비가 붙은 그 남자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급히 집으로 간 이씨는 낫을 찾아 싸움이 난 장소로 돌아갔다. 그러나 말다툼을 했던 남성은 어느덧 자취를 감췄고 근처에 있던 A씨에게 “아까 여기 있었던 사람 봤느냐”라며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A씨는 그 남성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를 알려 주기는 커녕 “개 목줄을 안 매고 다닌 당신이 잘못한 것 아니냐”라며 그의 화를 돋우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이씨는 분노가 극에 달했고 가지고 있던 낫으로 A씨의 등과 입을 두 차례 찔렀다. 이를 본 이웃 주민의 신고로 10분 만에 경찰이 출동해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A씨는 이미 과다출혈로 인해 숨이 끊어진 뒤였다. 이처럼 화를 참지 못해 주민을 잔혹하게 살해한 이씨. 경찰에서도 그는 시종일관 담담한 태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을 맡은 경찰에 따르면 “개 목줄 때문에 시비가 붙어 언쟁을 하다 우발적으로 살해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 서울 광진경찰서는 지난 11일 이씨에 대해 살인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살인 충동을 억누르지 못해 한 순간에 살인자로 전락하게 된 이씨 사건에 많은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사건이 일어난 원인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흔히 벌어지는 시비 때문이란 것에 심각성이 있다.

이웃에게 말 한번 잘못했다 화를 당하는 사건을 보며 “나도 당할 수 있는 일이구나”라는 공포를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기도 하다. 홧김에 벌이는 우발적 범죄 비율이 갈수록 높아진다는 통계결과는 이와 같은 공포를 키우기도 한다. 경찰청에 따르면 살인 사건 중 우발적인 범행은 2007년 전체 1311건 중 493건으로 37.6%를 차지했으나 지난해에는 1251건에 638건으로 50.9%, 올해에는 상반기까지 664건 중 364건으로 54.8%로 늘어났다.

깊은 원한관계에 있거나 어느 정도 범행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예상될 수 있는 범죄가 아니라 누구나 당할 수 있는 범죄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것. 홧김범죄의 피해자는 범인의 가족도, 애인도 예외는 아니다.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이는 누구라도 희생양이 될 수 있다. 최근에는 자신을 무시하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내연녀를 살해한 30대 남성이 덜미를 잡혔다. 제주 동부경찰서는 지난 13일 내연녀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살인 등)로 김모(39)씨를 붙잡았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10일 오전 4시쯤 자신과 내연관계에 있는 제주시 삼도동 안모(38·여)씨의 음식점에서 말다툼을 하다 안씨를 마구 때린 뒤 목 졸라 숨지게 하고 인근 숲속 도랑에 시신을 버린 혐의를 받고 있다. 조사결과 숨진 안씨와 1년 전부터 교제해오던 김씨는 사건 당일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그녀가 무시하는 말을 하자 격분해 홧김에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는 범행 직후 안씨의 옷을 태우고 시신을 인적이 드문 곳에 유기해 은폐시도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1년 동안이나 연인관계였지만 무시하는 말 한마디가 살인으로 이끌었던 것. 결국 김씨도 홧김범죄로 인해 죗값을 치를 처지에 놓였다.

알고 지내던 이웃 총각
화 참지 못해 자매 살해

그런가 하면 지난 9월에는 자신에게 잔소리를 했다는 이유로 홧김에 아버지의 친구를 흉기로 찔러 살해 기도한 사건도 벌어졌다. 강원도 양구군에 살던 이모(34)씨는 9월5일 같은 동네에 살던 B(70)씨와 이야기를 나누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한 B씨가 자신에게 “하는 일도 없이 빈둥대느냐”라고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이날 오후 10시30분쯤 B씨의 집으로 찾아가 잠을 자던 그를 흉기로 찔렀다. 다행히 B씨는 사건 직후 병원으로 옮겨져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이씨는 살인미수 혐의로 쇠고랑을 차게 됐다. 지난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전 원룸 자매 피살 사건’의 범인 역시 화를 참지 못해 두 생명을 앗아간 것으로 밝혀졌다.

범인은 자매와 같은 동네에 살던 이웃집 총각 이모(22)씨. 대전서부경찰서는 지난 4일 직장인 오모(25·여)씨와 대학생 오모(20·여)씨를 살해한 뒤 익산, 청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도피생활을 하던 이씨를 붙잡았다. 경찰 조사결과 자매가 살던 원룸의 맞은편 다세대 주택에 거주하던 이씨는 지난겨울부터 자매와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리고 지난달 26일 오전 5시쯤 술을 마신 뒤 자매의 원룸에 찾아갔다.

새벽 시간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이 달가울 리 없었던 언니 오씨는 “왜 밤늦게 싸돌아다니느냐”며 면박을 줬다. 오씨의 말에 모욕을 느낀 이씨는 주방에 있던 흉기를 찾아 홧김에 두 자매를 잔인하게 살해한 뒤 카메라와 지갑 등을 훔쳐 달아난 것으로 드러났다.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른 화를 분출하는 또 다른 방법은 방화다. 불을 질러 인명과 재산에 피해를 주는 것으로 끓어오른 분노를 표출한 범인들도 적지 않았던 것.
 
최근 부모를 숨지게 만든 ‘패륜 방화’ 역시 부모에 대한 화를 참지 못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세상을 놀라게 한 패륜범죄가 일어난 것은 지난 7일 오후 11시10분. 이날 서울 성북구의 한 다세대주택에 불이 나 큰아들 강모(28)씨의 아버지(58)와 어머니(52)가 숨졌고 동생(13)은 중태에 빠졌다. 불을 지른 사람은 강씨. 그는 부모님이 잠든 틈을 타 거실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일가족을 살해하려 했다.

전문가 “마음속 담고 있는 분노 터트릴 장치 마련해라”
우발적 범죄 바라보며 공포 느끼는 국민들 ‘설마 나도…’


경찰조사에서 강씨가 밝힌 방화의 이유는 ‘부모님의 편애로 인해 화가 나서’라는 것. 강씨는 “평소 부모가 자신에게 무관심하고 동생만 편애하는데다 사업자금도 대주지 않아 홧김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사결과 강씨는 20여 년 전 재혼한 친어머니와 새 아버지가 둘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동생만 편애한다는 생각에 불만을 품어 온 것으로 밝혀졌다.

강씨는 알리바이까지 만들어 용의자선상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으로 드러났다. 강씨는 사건 당일 오후 11시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술 약속을 잡은 뒤 약속장소에 나가기 직전 불을 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가 하면 지난달에는 홧김에 투숙하던 모텔에 불을 질러 재산피해를 입힌 20대도 덜미를 잡혔다. 지난달 6일 오전 5시쯤 경남 창원시 명서동의 한 모텔에 투숙하던 정씨는 함께 투숙한 동거녀가 말다툼을 하다 밖으로 나가자 화가 치밀어 올랐고 라이터로 침대시트에 불을 붙였다.

이 불로 정씨가 투숙한 3층 객실이 모두 타 2억2000만원 상당의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모텔에 투숙하던 30여명은 급히 대피해 인명 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달 14일에는 부부싸움을 한 뒤 화를 참지 못해 집에 불을 지른 사건도 벌어졌다. 안양의 한 다가구주택에 사는 임모(67)씨가 방화를 저지른 장본인. 임씨는 이날 밤 9시55쯤 외출했다가 이틀 만에 집에 온 아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자 화가 나 침대에 불을 붙였다.
 
이 불로 2800만원 상당의 재산피해가 발생했고 불을 피해 창문에서 뛰어내린 아내 강모(66)씨는 다리를 다쳤다. 전문가들은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해 사람을 해하고 방화를 저지르는 등의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이들 가운데는 사회적 외톨이로 외로운 생활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살아 건전하게 화를 표출하거나 해소하는 방식을 찾지 못하고 분노로 돌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실제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란 용어가 처음 생긴 일본에선 이들이 벌이는 충동적 범죄가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다. 1970년대 일본 사회에 등장한 이들은 90년대 중반부터는 밤에 거리로 나와 행인을 폭행하거나 살해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낮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둘러 1명을 살해하고 7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가나가와씨 역시 전형적인 은둔형 외톨이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은둔형 외톨이들의 범죄는 우리나라에서도 심심치 않게 벌어져 충격을 준 바 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홧김범죄 역시 외톨이 성향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이들의 범죄를 막을 방안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분노로 바뀌는 ‘화’
화 풀 장치 마련해야


정신의학 한 전문가는 “모든 외톨이들이 잠재적인 범죄자나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는 아니지만 타인과의 의사소통도, 스트레스나 분노를 표출할 통로도 마땅치 않은 외톨이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이들에 비해 홧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라며 “이들을 당장 사회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힘들다면 마음속에 담고 있는 분노를 터트릴 수 있는 장치라도 마련해 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일요시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Copyright ©일요시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