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정운찬·정동영·정세균 대권가도 ‘4정 전성시대’
당 대표·총리·대통령실장 ‘3정’, 친분·이해관계로 얽혀
정치권에 ‘4정 시대’의 막이 올랐다. 여야에 정씨 성을 가진 이들이 당 대표 등 거물급 인사들인데다 공교롭게도 모두 잠재적인 차기 대권주자로 주목받는 이들이다. 여권에는 한나라당의 새 선장이 된 정몽준 대표와 험난한 인사청문회를 거친 정운찬 국무총리가, 야권에는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정동영 무소속 의원이 나란히 버티고 있다. 청와대의 정정길 대통령실장까지 포함하면 ‘정씨’가 여야 정치권과 청와대까지 장악하고 나선 모양새다. 때문에 정가 일각에서는 “정씨들의 전성기가 열린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오지만 이들 사이의 정치 함수는 좀 더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다.
여야 정치권에 실세로 분류되는 이들이 모두 ‘정씨’로 바뀌었다. 박희태 대표가 10월 재보선 출마를 위해 떠난 자리를 정몽준 대표가 이어받았으며,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은 국무총리에 인준됐다. 1년이 훌쩍 넘도록 민주당의 안방을 차고 앉은 정세균 대표와 지난 4월 재보선으로 원내 복귀한 정동영 의원까지 모두 ‘정씨’다.
그러나 ‘정씨’라고 같은 정씨는 아니다. ‘나라 이름 정(鄭)’을 쓰는 이와 ‘고무래 정(丁)’은 발음만 같을 뿐 엄연히 다른 뜻을 품고 있다. 그리고 이는 묘하게도 4명, 혹은 5명의 정씨 사이의 함수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여권 3정 체제
당정청 ‘정씨 천하’
정몽준 대표와 정운찬 총리, 정정길 실장 등 당정청의 요직을 차지한 정씨들은 모두 ‘나라 이름 정(鄭)’을 쓴다. 이 때문일까. 이들은 유기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정 대표와 정 총리는 모두 대권에 뜻을 두고 있다. 정 대표는 집권 여당의 수장을 맡은 것을 기반 삼아 ‘킹메이커’에서 ‘킹’으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고 정 총리는 조직과 자금을 이유로 도전을 포기했지만 대권을 향한 꿈을 완전히 저버리지는 않았다. 고로 이들은 넓은 의미에서 경쟁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012년 대선에서 여권 대표주자는 한명일 것이고 대권 도전을 위해서는 누군가 이기거나 지는 결과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나쁘지 않다. 우선 박근혜 전 대표라는 대권 경쟁의 선두에 선 인물이 있는데다 이들이 이제 막 출발대에 섰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정 대표는 박희태 전 대표로부터 대표직을 이어받았으나 9월 정기국회, 10월 재보선, 내년 4월 재보선, 6월 지방선거까지 수많은 시험대를 거쳐야 하는 처지다. 당장 정기국회에서 야당의 정치 공세를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한편 정부 정책이나 예산안 처리를 효과적으로 해내야 하고 이 와중에 10월 재보선이라는 중간평가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재보선의 결과에 따라 갈림길에 서게 된다.
10월 재보선에서 3곳 이상의 승리를 거둘 경우 당 대표직에 대한 압박감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을 뿐더러 당내 입지가 한결 탄탄해지게 된다. 반면 패배할 경우 다시 2월 조기전당대회 주장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미니총선으로 확대된 10월 재보선에서 패배할 경우 다시 한 번 거세게 불어닥칠 당 쇄신에 대한 주장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경우 그의 리더십이 당 안팎에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물러나야 하며 이는 대권 도전에 치명상이 될 수 있다.
당을 장악하는 것도 그가 해야 할 일이다. 문제는 그에게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오랜 무소속 생활을 하다 한나라당에 들어온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이 아니어서 당 사무총장 이하 당직자들이 그의 당 운영을 위해 사표를 던졌어도 그 자리를 대체할 만한 ‘내 사람’이 없다는 것.
정 대표로부터 지역구를 물려받은 안효대 의원, 현대건설에서 근무한 신영수 의원, 처조카 사위인 홍정욱 의원, 2002년 대선 당시 국민통합21에서 호흡을 맞춘 전여옥 의원 정도가 그와 가까운 인사로 분류된다.
때문에 정 대표는 장광근 사무총장을 위시한 다수의 당직자들을 유임시키고 전략기획본부장에 전여옥 의원, 홍보기획본부장에 친박계 이계진 의원을 임명했다. 또한 정보위원장에 이철우, 기획위원장에 권택기, 대외협력위원장에 신영수, 국제위원장에 홍정욱, 지방자치위원장에 여상규, 법률지원단장에 김재경 의원을 각각 인선했다.
여권 한 인사는 “정 대표가 입당 후 당내 170명가량의 의원 대부분과 한 차례 이상 식사자리를 갖는 등 접촉면을 늘려왔다”며 “‘정몽준계’로 불리는 이는 별로 없지만 정 대표의 거침없는 당직 인선은 그가 오랫동안 당내 인사들을 주목해왔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정 총리의 사정도 정 대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 시험대에 올라 수많은 과제들을 접하고 있는 것.
그는 인사청문회에서 제기된 수많은 의혹에도 불구, 총리에 임명됐다. 하지만 인사청문회에서 난 수많은 흠집 덕에 대권주자로서는 큰 상처를 받았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유기적 관계는 ‘필수’
개인적 친분은 ‘양념’
또한 정치권 최대 논란으로 떠오른 세종시 문제와 직면했다. 세종시를 ‘변경’할 것이라고 밝혀 ‘원안 추진’을 주장하는 이들과 마찰을 빚고 있는 것. 녹색성장, 행정구역개편, 4대강 살리기 사업 등 현 정부의 주요 정책들도 그의 몫으로 돌아왔으며 야권은 이번 국감을 ‘정운찬 국감’으로 삼겠다고 벼르고 있다.
정 총리는 취임 후 “큰 소리에 굴하지 않고, 작은 소리를 크게 듣겠다. 낮은 곳을 보듬고, 흩어진 민심을 한 군데로 모으겠다”면서 “세종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강구하고 집행하는 데 명예를 걸겠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와 정 총리 모두 시련을 이겨내고 ‘성장’해야 하는 처지라 후일 대권주자로 마주칠 수 있다는 점은 잠시 뒤로 미뤄둬야 할 처지다. 오히려 당정청이라는 톱니바퀴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들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정 대표와 정 총리, 여기에 정 실장이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있다는 것은 서로에게 ‘덧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서로 소통해야 하는 당정청의 세 축이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서로가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토대를 가지는 셈이라는 이유에서다.
정 대표와 정 총리는 서울대 경제학과 선후배 사이로 1978년 정 대표가 미국 컬럼비아대로 6개월간 유학을 갔을 때 이 대학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던 정 총리와 종종 어울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 대표와 정 실장은 울산대에서 인연을 맺었다. 정 대표가 1983년부터 이사장을 맡아온 울산대에 정 실장을 총장으로 영입해 한동안 함께 일했다. 정 실장은 지난 2003년부터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5년간 울산대 총장을 지냈다.
정세균·정동영 ‘동성이몽’
‘성은 같은데, 갈 길은…’
각각 ‘고무래 정(丁)’과 ‘나라 이름 정(鄭)’을 쓰는 정세균 대표와 정동영 의원 사이에는 바람이 흐르고 있다. 언제든 냉기를 품을 수 있고 거세게 몰아칠 수 있는 바람이다.
이들은 지난 4월 재보선 과정에서 쌓은 앙금이 적지 않다. 재보선 출마를 두고 정 대표와 정 의원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선당후사’를 강조하며 정 의원의 출마를 만류했고 정 의원은 탈당 후 재보선에 출마, 살아 돌아왔다. 특히 민주당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호남에서 민주당 후보가 아닌 정 의원의 ‘무소속 연대’가 표심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는 것은 정 대표와 정 의원 사이에 깊은 골이 패이게 했다.
이들은 ‘복당’으로 애증의 관계를 더 깊게 했다. 정 대표는 민주개혁진영의 통합을 외치면서도 ‘순차적 복당’을 주장했다. 친노 진영과 구민주계, 시민사회진영이 당의 품으로 돌아오고서야 정 의원에 대한 복당을 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친노 인사와 구민주계 등이 복당했지만 정 의원의 복당에 대한 여론은 이전보다 나아졌을 뿐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논의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애증관계의 속내에는 정 대표와 정 의원이 모두 차기 대권주자라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견해다. 정 대표는 1년 이상 제1야당을 이끌면서 차기 대선주자 명단에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리고 있다. 리더십과 관련 당 안팎에서 잡음이 나오고 있지만 대권 도전에는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았다는 것.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의 대선후보였던 정 의원이 당으로 돌아와 세를 구축할 경우 리더십의 부재로 생기는 잡음이 둑을 무너뜨릴 구멍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야당 한 인사는 “‘정의 전쟁’이라는 말이 언론에 자주 노출될 정도로 정 대표와 정 의원의 대립각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면서 “당 안팎에서 거론되는 ‘민주개혁진영의 통합’을 위해서는 정 의원이든 누구든 모두 당에서 안고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당 일각에서는 10월 재보선을 계기로 이들의 관계에 변화가 찾아올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민주당이 재보선에서 패배할 경우 정 대표의 입지가 좁아지는 동시에 민주개혁진영의 통합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정 의원의 복당을 논의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날 것이고, 민주당이 절반의 승리 이상을 거둘 경우 정 의원의 복당이 다시 정체기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여권의 ‘정씨’들이 힘을 합쳐 나가는 것과 달리 야권의 ‘정씨’들은 동성이지만 다른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는 말로 ‘4정 시대’를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