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실업대란’이란 말도 식상할 정도다. 매일매일 뉴스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 단어는 이제 더 이상 지금의 상황을 유효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구직자는 자신의 처지를 일러 ‘실업인생’이라고 표현한다. 인생 자체가 ‘실업’이란 얘기다.
희망 자체가 사라져버린 세대,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런 자신의 처지를 자조할 수밖에 없는 세대란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풍속도들도 생겨나고 있다. 고시원이 고시를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 ‘저가형 숙박시설’이 된 것도, 정상적인 일거리가 없으니 경품 행사에 응모해 ‘현물’을 늘릴 수밖에 없는 ‘경품족’이 등장한 것도 ‘실업인생 시대’의 슬픈 초상화다. 예전에 없었던 새로운 시대의 풍속도, 과연 어떠한 것이 있을까.
‘희망 자체 사라져버린 세대’라 자조, 신풍속도 형성
고시 준비하는 고시원 ‘저가형 숙박시설’로 전락
현재 우리나라의 실업률은 3%대다. 언뜻 보면 이는 전체 100명 중에 97명이 직업이 있고 3명이 직업이 없다는 얘기다. 통계상으로만 보자면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회’이자 어떤 면에서는 ‘완전 고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고시원살이 ‘시험족’
주구장창 시험 준비
그러나 이는 여지없는 ‘착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숫자가 현실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는 대표적인 경우다. 이 실업률은 최근 3개월간 구직활동을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냥 취업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경우나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이 수치에서 완전히 배제가 된다. 어떤 면에서 이 통계는 오히려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직업이 없으면 활발히 구직활동을 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실업률은 ‘완전 고용’에 가깝다. 그만큼 구직활동을 하는 사람이 적다는 얘기이고 이는 무언가 왜곡돼도 단단히 왜곡됐다는 것이다. 직업이 없지만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 그만큼 절망에 빠져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이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중에는 고학력자가 많다. 2008년 현재 국내의 대졸이상 비경제활동인구는 총 250만 명을 넘어섰다. 가히 엄청난 수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23년간 고시준비를 하던 한 고시생이 고시원에서 자연사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나이는 45세. 평생을 시험 준비만 하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됐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얘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고시생들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시험’을 위해 죽고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합격’이란 이 단 한마디의 희열과 그 이후의 화려한 삶을 꿈꾸는 그들은 쪽방에 가까운 고시원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때로 아침에는 회사원들의 바쁜 출근길을 구경하기는 하지만 언젠가 이뤄질 자신의 꿈을 되새기며 스스로를 위안하는가 하면 직장인들의 회식 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모두들에게 대접받는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기도 한다.
이렇게 부러움과 희망, ‘저들보다 더 잘될 수 있다’는 생각이 뒤섞여 감정이 복잡해지지만 역시나 그들이 돌아올 곳은 고시원의 책상일 수밖에 없다.
5년째 고시 준비를 하는 이모(33)씨는 “솔직히 지금의 몇 년을 시험에 투자한다는 것이 아깝기도 하지만 미래의 화려한 삶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 아까운 일도 아닌 것 같다. 지금 허접한 직장을 잡아봐야 퇴사와 전직을 하며 인생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지금 좀 고생하더라도 안정적인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씨는 이어 “지금이 불경기라고는 하지만 언제 불경기가 아닌 적이 있었나. 우리 세대는 호경기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호경기, 불경기라는 것 자체가 없다. 그저 이렇게 묵묵히 공부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 인생에도 희망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또 “얼마 전에 고시원에서 사망한 45세 고시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험이라는 것이 잘되면 좋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말 그대로 인생을 허비하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희망을 가져보기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라도’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이제 더 나이가 들게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시험 아니고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공부를 하기는 하지만 보장되지 않은 합격을 향해 가는 길은 힘들고 지난할 뿐이다”라고 한숨을 쉬었다.
돈 버는 건 이렇게라도
수단 안 가리는 ‘경품족’
수없이 많은 취직 원서를 냈지만 딱 그만큼 실패한 탁모(33)씨. 이제 그는 자신의 인생관을 완전히 바꿔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새로운 직업을 붙여줬다. 이른바 ‘경품응모 연구가’. 말 그대로 각종 경품이 있는 응모 대회에 참여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그가 이제껏 받은 상품은 만만치 않다. 드럼 세탁기와 PDP, TV를 비롯해 청소기, 요리기구 등 말 그대로 짭짤한 것들이다.
물론 처음에는 현물 자체를 타는 것에 만족했다. 매번 새롭게 늘어나는 살림살이는 취직 못한 백수의 한이라도 푸는 듯했다. 어차피 그것들을 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지만 그는 현물을 확보했으니 돈을 번 것과 크게 차이는 없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하는 그에게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현물을 확보한 후 그것을 싼 가격에 되팔면 오히려 ‘장사’가 될 듯했다. 또한 자신의 물건을 사는 사람들도 정상적인 거래보다 더 싸게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도움이 될 듯했다. 물론 물건을 파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인터넷을 이용하거나 지인을 활용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듯 했다.
이것저것 다 안 되네
“차라리 공짜로 살자”
그가 현재 한 달에 응모하는 경품행사는 10여 개 정도가 된다. 하지만 그는 ‘확률’에 의존하는 경품행사에는 잘 참여하지 않는다. 무작위 추첨은 당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사연’을 찾는 라디오 방송 등을 주요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일을 한 이후로 ‘스토리 텔링’에 대한 자신만의 노하우가 쌓이기도 했다. 그는 훗날 이러한 능력을 기반으로 게임시나리오 작가를 꿈꾸고 있다.
탁씨는 “내 나름대로는 절망에서 희망을 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을 평생의 직업을 삼을 수는 없겠지만 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늘 실업의 우울함을 달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이런 작은 일을 통해서라도 스스로 위로를 하고 희망을 찾고 싶었다. 물론 지금도 취업을 위한 시도와 또 다른 자격증을 따려는 노력을 멈추지는 않는다.
‘경품족’은 실업인생 시대 ‘슬픈 초상화’
백화점 시식코너·영화관 ‘공짜족’ 가득
그러나 그런 활동을 하는 중에서도 작은 희망을 찾아나가는 데 이 일이 도움이 된다면 충분히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강변했다. 차라리 ‘공짜’의 한길만 파는 고학력 실업자도 있다. 어차피 돈을 벌지 못한다면 쓰지도 말자는 주의다. 가장 쉽고 간편한 것은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배를 채우는 방식이다.
인근의 백화점이나 대형 마켓을 몇 군데 정해 놓고 일정 시간을 두면서 돌아가며 시식 코너에 가는 식이다. 몇 번 가서 점원이 눈치를 주거나 알아채는 것 같으면 당분간 그곳은 발길을 끊고 점원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지혜로운 시식코너 이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영화 다운로드를 위해 필요한 돈은 ‘무료 충전소’에 가입해 충당한다. 이곳에 개인 정보를 제공하면 각종 무료 포인트를 주는 경우가 많고 이는 영화를 다운로드 받을 때 유용하다.
집에 들어가는
돈을 줄여라
취직을 못했다고 문화생활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취직도 못했는데 문화생활에 돈을 쓰기는 더욱 힘들다. 그러니 역시 최적의 방법은 이렇게 무료로 문화생활을 즐기는 법이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고시원에는 고시생들이 없다. 말이 고시원이지 이제는 ‘저가형 숙박시설’로 굳어진 지 오래라고 할 수 있다. 고시원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고시원에 진짜 고시생은 20%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보증금이 필요 없는 선불 월세형인 관계로 지방에서 올라온 직장인이나 월세를 아끼려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다. 특히 엄연히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직업을 갖지 못한 채 알바로 연명하는 이들에게 고시원은 가장 훌륭한 주거 형태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먹는 것이야 어떻게든 아낄 수가 있다. 하다못해 ‘평생 라면만 먹고 살아도 장수하더라’는 모 TV 방송의 프로그램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
그러나 문제는 자는 것이다. 노숙을 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월세가 비싼 곳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싸게는 20만원 정도로 형성되어 있는 저가형 숙박시설이 이들에게 제일 좋은 삶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실업률이 점점 더 올라갈수록 이러한 ‘진풍경’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