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광풍’이 무섭다. 학생부터 회사원, 주부들까지 그 누구도 도박 중독에서 자유롭지 못한 세상이다. 심지어 탑골공원의 노인들이 재미삼아 하던 윷놀이도 도박판으로 변질될 정도다. 한탕주의에 빠져, 잃은 돈을 되찾겠다는 욕심에 도박에 발을 들이는 사이 도박중독자들의 한숨만 늘어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마카오의 유명 카지노 호텔에 한국인 전용 도박장인 속칭 ‘서울방’까지 만들어져 유명인들을 끌어들인 것이 밝혀져 또 한 번 ‘도박공화국’의 진면목을 보여주기도 했다.
일확천금 노리고 도박장 찾다 중독에 빠진 이들 급증
잃은 돈 만회하겠다는 생각할 때부터 중독자로 풍덩
주부, 학생, 미성년자 등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도박에 미쳐
인터넷도박 등 곳곳서 손쉽게 도박할 수 있어 중독자 양산
“도박을 하는 순간에는 가족도, 친구도, 통장잔고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도박을 하는 동안 느끼는 희열과 일확천금을 얻는 꿈밖엔 없었다. 손가락을 자르고도 다시 도박장을 찾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어떤 것보다 강한 것이 도박 중독이다.” 10여 년 전 처음 화투판에 발을 들였다가 최근에야 도박 끊기에 성공했다는 A(46)씨. 그는 누구보다 도박 중독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도박에 빠져 건강도, 직장도 잃고 술에만 의지해 살던 그는 수년에 걸쳐 간신히 단도박의 꿈을 이뤘다.
재산도 가족도 훨훨
모두 잃어도 멈출 수 없어
무서운 의지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도박판을 멀리하게 됐지만 화투장만 봐도 가슴이 뛴다는 것이 솔직한 A씨의 심정. A씨는 “화투판에 있다 보면 자식 등록금을 훔쳐와 화투를 치는 사람, 집안 살림을 팔아 자금을 마련해 온 사람 등 보통 사람들이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며 도박 중독의 무서움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또 “경기가 어려울수록 도박장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이 많은데 도박 중독에 빠지면 가족까지도 잃게 된다는 걸 안다면 섣불리 도박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아버지와 떨어져 지방에서 살고 있는 B(19)양은 도박중독에 빠진 아버지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도박에 빠져 있다는 걸 눈치 챈 것은 지난 5월. 그때는 매달 자신과 어머니에게 오던 생활비가 2개월째 끊긴 상태였다. 사업이 어려워서 어쩔 수 없다고 여기던 B양의 생각이 틀렸단 걸 알게 된 것은 친척들에게 빚 독촉 전화가 오고부터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보내야 한다”며 1억원에 가까운 돈을 여러 친척들에게 나눠 빌렸고 돈을 받지 못한 친척들이 B양의 어머니에게 독촉 전화를 한 것. B양의 아버지가 1억원이 넘는 돈을 날린 까닭은 강원도 카지노에 출입을 하기 시작해서다.
올해 초부터 사업이 조금씩 기울면서 자금난을 겪던 아버지는 우연한 기회에 카지노에 출입하게 됐고 게임으로 돈을 따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잃는 돈이 커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사채를 빌려 쓰는 바람에 카지노를 뜨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다 B양의 이모, 삼촌 등 친척들에게까지 손을 벌렸고 그 돈을 갚지 못하자 돈을 빌려준 친척들이 B양의 어머니를 압박한 것이다. B양은 “이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카지노를 떠나지 못하고 일확천금을 노리고 있다”며 “한탕을 노리고 가족들마저 등진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처럼 도박에 발을 들인 사람들 중 도박중독자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최근에는 카지노를 찾는 사람 가운데 79%가 ‘과도한 도박’을 하고 있는 도박 중독에 빠져있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강원대 이태원(사회학) 교수팀은 지난해 강원랜드를 방문한 629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해 발표한 논문 ‘과도한 도박의 부정적 영향들’에서 79%가 도박 중독 또는 중독 위험군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과도한 도박을 하는 사람(496명) 중 44%는 1000만원 이상을 잃고도 계속 카지노를 출입하고 있었고 1억원 넘게 잃은 사람은 18%에 달했다. 또 3명 중 1명가량은 한 달에 10회 이상 카지노를 찾았다. 도박 중독이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선 33%가 직장 업무에까지 크고 작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답했다. ‘자살을 자주 고려한다’고 답한 사람도 10%에 이르는 나타났다.
“내가 왜 중독자야?”
모르는 사이 폐인의 길
이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중독자의 길을 걷게 하는 도박. 문제는 도박의 종류도, 도박을 할 수 있는 곳도 너무나 흔해져 도박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의 수도 크게 늘고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주부나 대학생, 미성년자 등 도박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들조차도 쉽게 도박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것도 문제점 중 하나다. 최근 심심찮게 드러나는 주부도박단의 실체도 이 현상을 말해 준다. 남편의 도박중독에 가슴을 쳤던 옛날 주부들과는 달리 요즘 주부들은 무료한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해, 일확천금의 환상을 쫓아 도박판에 뛰어들고 있다.
지난 1월 등장한 ‘바카라 주부도박단’은 최근 주부들의 도박판 가담 실태를 여실히 보여줬다. 150여 명이 넘는 가정주부들은 조직폭력배가 운영하는 카지노의 유혹에 빠져 살림도 내팽개친 채 ‘바카라’에 중독됐다. 이들이 건 판돈은 무려 280억원. 순진한 주부들을 꼬여내 돈을 갈취한 일당은 서울 동대문구에서 활동하는 한 조직폭력단이었다. 이들은 지난해 10월 서울 장안동의 한 건물을 빌려 가짜 간판을 내건 뒤 카지노 기계로 가득 찬 게임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 중 ‘모집책’들은 ‘바카라 도박은 다른 도박에 비해 쉽고 승률이 높다’는 말로 주부들을 유혹했다. 여기에 각종 이벤트를 시행해 주부들을 유혹한 결과 주부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입소문이 퍼질수록 주부들은 늘어만 갔고 하루 150여 명에 달하는 주부들이 도박에 빠졌다. 심지어 지방에서 올라와 원정도박을 한 주부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기승을 부리고 있는 온라인 도박 사이트 역시 도박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들을 한순간에 도박중독자의 길로 이끌고 있다.
취업준비생 이모(30)씨 역시 온라인 도박으로 인해 빚을 져 밤잠을 설치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씨가 온라인도박으로 진 빚은 무려 1000만원. 직장도 없는 신세인 그에게 이 돈은 큰돈일 수밖에 없다. 이씨가 처음 온라인 도박에 빠져든 것은 3년 전 우연히 PC방에 가면서부터다. 인터넷을 서핑하던 중 눈에 포커게임이 들어왔고 친구와 재미삼아 게임을 즐기는 도중 쪽지 하나가 왔다고 한다.
그것은 사이버머니를 현금처럼 쓰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내용의 광고쪽지였다. 이에 혹한 이씨는 당장 쪽지 속 사이트에 들어가 회원가입을 했고 1만원을 들여 사이버머니를 구입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실력인지 운인지 게임을 하는 족족 돈을 땄고 용돈으로 쓰고도 남을 만큼 적지 않은 돈을 벌게 됐다.‘이쯤에서 그만둘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은 계속해서 불어나는 사이버머니였다.
‘타짜’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큰돈을 벌게 되자 그때부터 좀 더 판을 키웠다. 베팅금액은 하루하루 늘어만 갔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승률은 예전 같지 않았다. 승리의 신은 더 이상 이씨의 편이 아니었고 돈을 잃기 일쑤였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이미 대출까지 받아 온라인게임에 쏟아 부었던 터라 대출금이라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에 몇 년 전 사라졌던 바다이야기 게임이 인터넷에서 버젓이 성행하고 있는 것을 봤다. 이씨는 바다이야기로 건너 와 다시 한 번 자신의 운을 시험해봤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그는 번번이 돈을 잃기만 했다. 결국 대출금을 갚기 위해 사채까지 얻어 써 급기야 1000만원이 넘는 빚더미 속에서 한숨을 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이씨는 “수입이라곤 없는 내 상황에서 1000만원이라는 돈을 어떻게 갚을지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며 “취업하기만을 기다리는 부모님을 볼 낯이 없어 연락을 끊은 지도 몇 달이 지난 형편”라고 깊은 한숨을 토했다.
이처럼 도박 중독은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인생까지 멍들게 하는 무서운 병이다. 그러나 매일 도박장을 찾으며 수천만원의 돈을 잃으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은 대부분 “나는 절대 도박중독자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박을 끊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 있게 말하는 사이 폐인의 길을 한 발자국씩 걸어가는 것이 도박의 위험성이다. 한국도박중독예방치유센터는 도박중독자가 되는 진행과정을 세 단계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그중 1단계는 ‘따는 시기’다. 이는 자신의 수입에 비해 매우 큰돈을 따면서 도박으로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달콤한 환상에 빠지는 시기다. 도박에 대한 강한 흥미가 생기는 것도 이때다. 물론 돈을 잃을 때도 있지만 도박자들은 딴 것에 대해서만 회상하는 경향이 있고 잃은 것에 대해서는 부정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힘든 노동활동 없이 큰돈을 한 번에 거머쥐어 본 경험은 도박장으로 걸어가는 걸음을 가볍게 할 수 밖에 없다. 2단계는 ‘잃는 시기’다. 도박으로 돈을 딴 경험만을 떠올리다가 자신이 돈을 잃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때다. 이때 도박중독자들은 도박을 중단하지 않고 잃은 돈을 되찾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잃게 된다.
‘따는 시기’에 맛 들려
나락 속으로 빠져들어
마지막 3단계는 ‘절망의 시기’다. 이 시기에 도달한 도박자들은 이성적·도덕적 판단을 하지 못한다. 도박을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행각을 벌이는 것도 이 시기다. 도박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비윤리적 행동이 다음의 큰 승리를 위해 치러야 할 과정이라고 합리화한다. 재산을 잃어가면서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이를 지키기엔 너무 많은 길을 걸어왔다. 마약중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힘으로 도박을 조절하지 못하고 조울증, 공항장애 등의 정신장애로 고통 받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도박의 강력한 중독성은 두뇌 반응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병이라고 할 수 있다”며 “스스로 도박을 끊기 어려운 만큼 의사나 상담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조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