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대기업 인사가 마무리됐다. ‘인사 태풍’이 몰아닥친 재계엔 탄성과 비명, 한숨이 교차했다. 주요 기업의 차세대 리더인 ‘포스트 최고경영자(CEO)’자리를 놓고 한 지붕 아래에서 치열한 경쟁관계가 형성됐다. 그중에서도 거물급 CEO들의 거취는 단연 최대 관심사. 과연 누가 살아남고, 누가 자리를 떴을까. 극명하게 희비가 엇갈린 각 기업의 ‘물갈이’결과를 정리해봤다.
‘신상필벌(信賞必罰)’
재계의 인사 특징이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과를 기준으로 가차 없는 신상필벌식 인사가 이뤄졌다. 이에 따라 각 그룹 실세들의 서열지도도 새롭게 짜였다. 전체적으론 ‘안정 속 변화’란 이번 인사의 평가대로 인사 폭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적잖은 변화가 감지된다.
대한민국 1위 기업인 삼성전자의 수장은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관심을 받는 자리다. 그만큼 이 자리를 놓고 매년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삼성전자는 지난 16일 이사회에서 이윤우 부회장의 단독 대표체제를 결정했다.
이 부회장의 ‘원톱’은 이미 예견돼 왔다. 삼성전자는 1년 전만 해도 이건희 전 회장과 이학수 고문(전 전략기획실장), 윤종용 상임고문(전 부회장), 김인주 상담역(전 전략기획실 사장), 최도석 사장 등이 대표이사를 맡았다.
하지만 지난해 이 전 회장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 이후 삼성 CEO들 사이에서 ‘박 터지는’포스트 전쟁이 벌어졌고, 결국 이 부회장이 삼성전자 핵심으로 부상했다. 사실 이 부회장은 ‘포스트 윤종용’ 후보군에서 중량감이 여타 인물들에 비해 낮았다.
그러나 이 부회장은 자신의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하면서 상당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삼성전자 반도체 신화의 초석을 다진 인물. 1970년대 중반부터 삼성전자 반도체사업을 이끌었다.
이 부회장은 대외협력 업무를 원활히 수행하는 등 원만한 성격이 장점으로 꼽힌다. 삼성전자의 주력분야를 책임졌던 만큼 이 전 회장과 돈독한 신뢰관계를 갖고 있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반면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그림자’였던 신헌철 SK에너지 부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SK에너지에 따르면 지난 13일 주총 직후 열린 이사회에서 신 부회장은 등기임원을 사임하고 부회장으로서 SK그룹의 기업문화 발전 기여활동 및 사회공헌 활동에 주력하기로 했다. 그는 이임사에서 “앞으로 기업문화 개선과 사회공헌활동, 프로축구 제주유나이티드 구단주 활동 등의 업무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신 부회장은 최 회장의 최측근에서 참모역할을 해왔다. 특히 SK그룹이 소버린 사태 등을 극복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최 회장의 신임이 두터운 이유다. 신 부회장은 일선 계열사 CEO를 맡았지만, 그룹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후덕하고 투지가 강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 ‘마라톤 경영자’로도 유명하다.
부산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 SK에너지의 전신인 대한석유공사에 입사해 SK텔레콤 전무, SK텔링크 대표, SK가스 대표 등을 거쳤다. 신 부회장은 지난 5년간 SK에너지 대표로 재임하면서 매출과 영업이익을 3배로 키웠다. SK에너지의 매출과 실적은 신 부회장이 취임 전인 2003년과 지난해 각각 13조7886억원과 6713억원에서 45조7373억원과 1조8915억원으로 늘어났다.
LG그룹의 이번 인사 화두는 ‘안정’이었다. 구본무 회장 아래 기존 부회장 체제가 유지됐고, 계열사 사장들도 큰 변동이 없었다.
남용 LG전자 부회장도 구 회장의 신임을 받아 자리이동 없이 그룹의 핵심 LG전자를 그대로 맡게 됐다. LG전자는 지난 13일 주총에서 사외이사 후보들의 선임안을 올리고 최종 인선을 끝냈다. LG전자 사내이사는 남 부회장을 대표이사로 강유식 ㈜LG 부회장, 정도헌 LG전자 부사장 등 사내이사 3명으로 구성됐다.
남 부회장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1976년 LG전자에서 사회 첫발을 내딛었다.
LG그룹 경영혁신추진본부 이사, 비전추진본부 상무, 경영혁신추진본부장 전무, 경영혁신추진본부 부사장, LG전자 멀티미디어사업본부 부사장 등 그룹 내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대기업 인사 마무리…‘안정 속 변화’선택
그룹 실세 서열지도 재편성 “희비 엇갈려”
그러나 1998년부터 맡은 LGT 사장 때 위기를 맞기도 했다. LGT가 추진하던 IMT-2000 사업허가가 취소되면서 ‘사업권 취득에 관여한 사람은 해당 회사 임원이 될 수 없다’는 규정에 걸려 2006년 물러난 것.
이후 2007년 LG전자 CEO로 복귀한 남 부회장은 2007년과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하며 경영 능력을 검증받았다. LG전자는 지난해 본사 기준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27조6385억원, 1조2269억원을 기록해 사상 최대의 실적을 기록했다.
그는 ‘현장 경영’을 중시한다. 해외 출장 중 고객의 집을 직접 방문하는 등 사무실에 있는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다. 평소 성실하고 우직하다는 평이다.
이번 재계 인사 가운데 뭔가 석연치 않은 자리이동도 눈에 띈다. 장경작 호텔롯데 총괄사장의 사임이다.
호텔롯데는 지난 17일 장 전 사장이 등기이사직을 사임하고 상근고문직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밝혔다. 장 전 사장은 이미 지난달 내부 인사발령을 통해 호텔롯데의 상근 고문으로 물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호텔롯데는 호텔롯데, 호텔롯데월드사업부, 호텔롯데면세사업부 등으로 나눠져 각자 대표이사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호텔롯데 총괄사장직은 세 사업부를 지휘하는 역할을 한다. 호텔롯데 측은 “경영 일선에서 자연스럽게 물러난 세대교체 인사”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재계에선 장 전 사장의 사임을 두고 말들이 많다. 장 전 사장은 1994년 조선호텔 사장으로 취임한 뒤 2005년 호텔롯데 대표이사 사장으로 영입돼 지난해 2월 신설된 호텔부문 총괄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불과 1년 만에 사임한 셈이다.
더구나 장 전 사장은 이명박 대통령과 고려대 경영학과 61학번 동기 동창으로 주목을 받았다. 때문에 그의 총괄사장 취임을 놓고 롯데그룹의 ‘MB인맥 껴안기’란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특히 롯데그룹의 염원인 ‘제2롯데월드’건설이 가시화되자 장 사장의 역할론이 부각되기도 했다. 특혜시비가 그것이다.
한편으론 롯데그룹이 이런 인식을 의식해 취임한 지 1년 밖에 되지 않는 장 전 사장을 물러나게 했다는 해석도 있다. 한마디로 ‘역풍’을 미리 막기 위한 의도가 아니겠냐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