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혼맥은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한두 다리만 건너면 사돈’이란 말이 통용될 정도로 ‘그들만의 성’은 갈수록 견고해지고 있다. 물론 재벌가문은 정·관계 및 학계 쪽으로도 거대하고 강력한 연줄망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사세 확장을 위해 권력층과의 정략결혼도 서슴지 않는다. 전략적 통혼을 통해 최고의 부와 명예, 권력을 한 손에 쥘 요량에서다. 5년 전인 2004년 시사지 최초로 재벌가 혼맥을 집중 해부해 독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일요시사>가 2009년 새해를 맞아 새 식구를 포함한 재벌가 신 혼맥을 유형·테마별로 새롭게 재구성해 봤다.
1970년대 ‘표심’을 놓고 정치권에서 촉발돼 ‘망국의 병’으로까지 불리는 지역갈등의 폐해는 재계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능력보다 지역으로 임직원을 평가하는 등 출신 지역을 따져 ‘편 가르기’ 행태가 만연한 것.
정권에 따라 되풀이되는 특정지역 기업 손보기와 반대로 밀어주기 행태는 재계 판도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지역 편중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지역감정의 골은 서서히 메워지고 있는 추세지만 전통적인 낡은 사고는 하루아침에 고쳐지지 않고 있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통상 영·호남 커플이 그렇다.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의 남녀가 결혼하면 ‘남북의 벽’보다 높은 ‘동서의 벽’을 허물었다는 칭호를 받기 일쑤다. 지금은 전혀 아니지만 멀지 않은 과거만 해도 서로 만나기 힘든 견우와 직녀에 비유될 만큼 양가의 허락이 쉽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재벌가의 경우 특히 더하다. 철저한 계산대로 이득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그래서인지 재벌가의 혼사는 동향 가문과의 결합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지역색이 짙은 색안경을 벗은 재벌 집안의 결혼 사례가 주목받는 이유다.
최근 갈라선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장남 재용(삼성전자 전무)씨와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의 장녀 세령씨 커플은 결혼 당시 영·호남 재벌가의 결합으로 떠들썩했다. 그전까지 두 그룹이 ‘미원-미풍’조미료를 앞세워 그야말로 사활을 건 전쟁을 벌인 까닭도 전형적인 영·호남 대표기업이란 지역적 특수성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잘 알려진 대로 영남재벌이다. 이병철 창업주가 1910년 2월 태어난 곳이 경남 의령이고,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 간판이 내걸린 곳이 대구다. 이후 삼성그룹은 부산과 구미 등 영남권에 속속 계열사를 세우면서 사업 영역을 넓혀갔다.
대상그룹의 시발점도 부산이다. 고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주는 1956년 부산에 국내 최초로 조미료 공장인 ‘대림상공’을 세웠는데 그 회사가 바로 대상그룹(옛 미원그룹)이다.
하지만 대상그룹은 대표적인 호남기업으로 각인되고 있다. 임 창업주는 1920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이리농림고를 졸업하고 줄곧 전북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다. 게다가 순창 공장과 전분당 공장도 각각 전북 순창과 군산에 있어 대상그룹엔 항상 호남기업이란 꼬리표가 붙는다. 1998년엔 서울 방학동 미원 공장을 군산으로 이전하기도 했다.
주목할 점은 이재용-임세령 결혼에 앞서 삼성그룹과 대상그룹의 양가 혼맥을 살펴보면 영·호남 지역색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창업주의 3남 이 전 회장의 고향도 경남 의령이다. 그의 부인 홍라희씨는 전북 전주 출신. 이들은 중매로 만나 1967년 5월 결혼했다. 홍씨는 이승만 정권 시절 내무부장관을 지낸 고 홍진기 중앙일보 명예회장의 2녀4남 중 장녀다. 홍 명예회장이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뒤 전주에서 판사 생활을 하다 1945년 7월 홍씨를 얻었다.
임 창업주의 장남 임 명예회장은 1949년 5월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사나이’의 부인은 고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의 3녀이자 박삼구 회장의 여동생 박현주씨다.
결국 호남 집안인 금호가와 대상가, 영남집안인 삼성가가 사돈을 맺은 셈이다. 이건희-홍라희, 이재용-임세령, 임창욱-박현주 모두 결혼 전 이미 부친 또는 모친들의 ‘사전 교감’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1980∼1990년대만 해도 재벌가뿐만 아니라 일반 가정도 지역감정이 팽배해 배우자 선택에서 출신지가 중요한 잣대로 평가됐다”며 “보수적인 재벌가는 지역색이 더욱 심해 배우자의 고향이 다른 영·호남 집안끼리 사돈을 맺는 경우를 보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재벌가 영·호남간 혼사로 유명한 집안은 금호아시아나그룹 일가다. 금호가는 까다롭게 사람 들이기로 소문난 집안이다. 고 박인천 창업주가 생전 자식들의 혼사에 신경을 쓴 나머지 전국을 돌며 사돈을 직접 고른 일화는 유명하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금호가의 혼맥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박 창업주는 슬하에 5남3녀(성용-경애-정구-강자-삼구-찬구-현주-종구)를 뒀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혼맥을 자랑한다. 금호가는 관료·정치인 집안을 중심으로 국내 굴지의 기업들과 혼맥을 잇고 있다.
금호가의 ‘상류층 인연 맺기’는 지역의 높은 벽도 허물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전남에 뿌리를 둔 현재 가장 잘 나가는 호남 기업이다. 1901년 7월 전남 나주 출생인 박 창업주가 1946년 미국산 중고택시 2대로 시작한 ‘광주택시’가 모태다.
하지만 혼맥은 영남으로 뻗어있다. ‘탈호남’을 추구한 박 창업주는 타 지역 상류층과의 혼사를 추진, 다수의 사돈이 영남권 명문가로 이뤄져 있다.
업계 관계자는 “박 창업주는 최고급(?) 며느릿감을 찾기 위해 영남권 명문가에 직접 찾아다니며 사돈 맺기를 간청한 것으로 알려졌다”며 “일각에선 금호가가 고전한 영남권에서 사세 확장을 위해 통혼을 정략적으로 이용했다는 지적도 있다”고 전했다.
박 창업주의 차남 고 박정구 회장은 경북 안동 지역구에서 4선 의원을 지낸 김익기 전 국회의원의 딸 형일씨와 혼인했다. 김 전 의원은 역시 호남 대표 기업인인 고 박병규 해태그룹 창업주와 사돈관계이기도 하다. 김 전 의원의 딸 형신씨와 박 창업주의 장남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은 부부사이다.
박 회장의 장녀 은형씨도 영남 재벌가로 시집갔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차남 선협(포천아도니스CC 사장)씨와 결혼한 것. 김 전 회장이 1936년 12월 대구 출생인 탓에 대우그룹은 영남기업으로 분류된다.
박 창업주의 3·4남 박삼구 그룹 회장과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도 영남권 명문가인 이정환 전 재무장관의 차녀 경렬씨와, 위창남 전 경남투금 사장의 차녀 진영씨와 각각 백년가약을 맺었다. 박 창업주의 장녀 경애씨도 경상도 출신 배태성 전 제헌의원의 장남 영환(삼화교통 회장)씨에게 시집갔다.
금호가는 부산이 연고지인 LG그룹 일가와 사돈을 맺어 또 한 번 지역의 벽을 넘었다. 고 박성용 명예회장의 외아들 재영씨는 구자훈 LIG손해보험 회장의 3녀 문정씨와 결혼했다. 구 회장은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손밑 동생(고 구철회씨)씨의 3남이다.
1947년 부산 연지동에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면서 역사가 시작된 LG그룹은 다시 삼성그룹과 사돈을 맺고 있어 영·호남간 혼맥은 ‘LG-삼성-금호-대상-대우-해태’등으로 연결된다. 구 창업주의 3남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이 창업주의 차녀 숙희씨는 1958년 웨딩마치를 울렸다.
영남-호남 ‘동서의 벽’ 허문 로열패밀리 혼사 주목
‘경상 며느리, 전라 사위’사돈 연고지 잣대 평가
영남기업으로 꼽히는 롯데그룹도 호남 쪽으로 혼맥이 닿아 있다. ‘호남 자본’으로 설립된 삼양그룹 일가와 두 다리 건너 사돈지간인 것.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동생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의 차남 신동윤 율촌화학 부회장은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의 동생 희선씨와 결혼했다. 김 회장은 고 김연수 삼양그룹 창업주의 장남 고 김상준 삼양염업사 명예회장의 사위다. 김 회장의 부인은 김 명예회장의 차녀 정희씨다. 결과적으로 롯데가가 동부가를 통해 삼양가와 혼맥으로 연결된 것이다.
1922년 10월생인 신 회장의 고향은 울산 울주. 그는 연말연시와 명절을 고향에서 보내며 매년 마을 잔치까지 열 정도로 ‘고향 사랑’이 각별하다. 그룹 야구단인 롯데자이언츠의 연고지도 부산이다.
고 김연수 삼양그룹 창업주는 호남 지방의 대지주였다. 1896년 10월 전북 고창에서 거부의 후예로 태어났다. 그는 1924년 ‘삼수사’를 설립해 전남 장성에서 농장경영과 전북 줄포에서 간척사업을 처음 시작해 지금의 삼양그룹을 일궈냈다.
김 창업주의 형이 바로 고 김성수 동아일보 창업주다. 김 창업주의 손자 고 김병관 동아일보 명예회장의 차남 재열(제일모직 전무)씨와 이건희 전 회장의 차녀 서현(제일모직 상무)씨도 부부 인연을 맺어 영호남 혼맥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정치권 영·호남 혼사는?
‘결혼은 결혼일 뿐이고…’
추미애-서성환 부부/ 천정배-최병렬 사돈
지역감정 촉발지인 정치권에서도 영·호남 집안간 사돈을 맺은 사례를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천정배-최병렬 사돈과 추미애-서성환 부부다.
천정배 민주당 의원과 최병렬 한나라당 전 대표는 2007년 1월 사돈이 됐다. 천 의원의 맏딸 지성씨와 최 전 대표의 조카 재만씨가 결혼식을 올린 것. 두 사람은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사법연수원에서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서울대 법학과 97학번인 지성씨는 2004년 사법시험(46회)에 합격해 2006년 1월 연수원을 수료한 뒤 서울중앙지법 예비판사로 근무하고 있다. 서강대 법학과 94학번인 재만씨는 2005년 사시(47회)에 합격해 2007년 1월 연수원을 수료했다.
천 의원은 “서로 당은 다르지만 영·호남은 물론 여야간의 화합이 됐다”며 “집안의 경사를 넘어 잘된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추미애 민주당 의원은 ‘영남의 딸, 호남의 며느리’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판사복을 벗고 정치에 입문한 추 의원은 대구 출신으로 경북여고를 졸업한 정통 TK(대구·경북) 출신. 한양대 법대에 진학한 추 의원은 같은 과 동기였던 전북 정읍 출신의 남편 서성환 변호사와 결혼해 ‘영호남 법조인 부부’로 유명하다.
[바로잡습니다]
본지 지난 3월1일자(685호) 22면 「임창욱 대상그룹 회장 ‘삼성 결별’노림수」제하의 기사내용 중 풀무원은 대상그룹 계열사가 아니므로 바로잡습니다. 풀무원과 대상그룹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