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경제1팀] 재벌가 혼맥은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한두 다리만 건너면 사돈’이란 말이 통용될 정도로 ‘그들만의 성’은 갈수록 견고해지고 있다. 물론 재벌가문은 정·관계 및 학계 쪽으로도 거대하고 강력한 연줄망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사세 확장을 위해 권력층과의 정략결혼도 서슴지 않는다. 전략적 통혼을 통해 최고의 부와 명예, 권력을 한 손에 쥘 요량에서다. 5년 전인 2004년 시사지 최초로 재벌가 혼맥을 집중 해부해 독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일요시사>가 2009년 새해를 맞아 새 식구를 포함한 재벌가 신 혼맥을 유형·테마별로 새롭게 재구성해 봤다.
“재벌가 자녀들을 만나려면 어딜 가야 하죠?”
얼마전 뜬금없이 한 독자로부터 걸려온 전화 문의다. 본지에 연재되고 있는 ‘재벌가 신혼맥’기사를 보고 전화했다는 이 독자는 “동생이 서울에서 잘나가는 명문대 출신에 현재 대형병원 의사인데 명문가로 장가를 보내려고 집안 식구들이 모두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다”며 “혼기 꽉 찬 재벌가 자녀가 누구인지, 이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 심지어 꼬시는(?) 방법까지 말해 달라”고 다짜고짜 물었다.
최근 브라운관에 ‘재벌 열풍’이 한창이다. 방송 3사 드라마가 하나같이 그렇다. 귀족이 등장하지 않는 시나리오가 없을 정도로 필수 배역이다.
그중에서도 재벌 2세와 가난한 집안의 딸의 사랑을 다룬 KBS <꽃보다 남자>가 ‘막장 드라마’란 비판에도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시청자들이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귀족들을 통해 상대적 박탈감보다 대리만족을 더 얻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드라마는 현실과 전혀 다르기 마련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신분을 뛰어넘는 재벌과 서민의 결혼은커녕 만남 자체가 어렵다는 얘기다.
재계 한 관계자는 “부와 명예, 권력 등을 바탕으로 한 ‘귀족 가문화’현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재벌가 2∼3세와 보통 사람의 사랑은 ‘언감생심’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며 “간혹 결혼에 성공한 재벌과 서민의 로맨스로 주목을 받는 사례도 있지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실제 재벌가에서 아무리 자유연애가 증가하는 추세라지만 따지고 보면 ‘그 집안이 그 집안’이다. 어려서부터 자라온 환경이 한 울타리에 있는 탓이다. 명문 유치원에서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자연스레 친분을 쌓다가 대학, 미국 유학시절까지 관계를 유지하며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지는 게 ‘스페셜 코스’다.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의 차남 조현범 부사장과 이명박 대통령의 3녀 수연 씨가 대표적이다. 국내 3대 사립초등학교로 분류되는 서울 리라초등학교 동문인 이들 커플은 줄곧 관계를 유지하다 조 부사장이 미국 보스턴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본격적인 교제를 거쳐 2001년 결혼에 골인했다.
마찬가지로 명문 사립초교인 경기초교를 같이 나온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손녀이자 정몽필 전 인천제철 사장의 딸 유희 씨와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의 아들 지용 씨도 열애 끝에 1999년 결혼식을 올렸다.
특히 재벌가 자녀들의 필수 코스인 해외 유학은 결혼의 교두보나 다름없다. 혼기를 앞둔 ‘예비 회장님’과 ‘미래 사모님’들의 만남이 활발히 이뤄지는 곳은 미국. 뉴욕과 동부 아이비리그를 거점으로 인연을 맺고 결혼에 이르는 커플이 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지난 몇 년간 재벌가 혼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지난해 9월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장녀 경후 씨는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이 회장의 사위 정종환 씨는 미국 컬럼비아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뉴욕 씨티은행에서 근무하고 있다. 두 사람은 미국 유학 중 만났다. 경후 씨도 지난해 초 미국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했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외아들 윤홍 씨도 같은 해 8월 중견기업 오너의 딸과 결혼했다. 윤홍 씨가 워싱턴대학에서 MBA 과정을 밟다 배우자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허 회장의 장녀 윤영 씨도 뉴욕대학에서 유학하던 중 김영무 김앤장 대표변호사의 장남 현주 씨를 만나 교제하다 2006년 10월 화촉을 밝혔다. 두 사람은 모두 서울대 출신으로 윤영 씨는 영문학을, 현주씨는 법학을 각각 전공한 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해왔다.
방송 3사 ‘재벌 드라마’열풍…“서민 대리만족”인기
시나리오일 뿐 현실선 ‘언감생심’꿈도 못꿀 로맨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장녀 연경 씨는 워싱턴대학에서, 김영대 대성그룹 회장의 3남 신한 씨는 미시간대에서 유학 중에 만난 상대와 각각 지난해 5월과 6월 결혼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손자인 일선 씨도 조지워싱턴대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다가 같은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던 구태회 LG그룹 고문의 손녀 은회 씨를 만나 1996년 웨딩마치를 울렸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수료하던 중 노태우 전 대통령의 외동딸 소영 씨와 교제하기 시작해 수년간 사귄 끝에 1988년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고 박정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3녀 은혜 씨와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의 차남 재명 씨도 보스턴대에서 유학중 만나 교제를 시작해 2001년 12월 혼인했다.
결혼업체 한 관계자는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브라운, 코넬, 컬럼비아 등 아이비리그 대학이 집중돼 있는 미국 동부지역과 패션·미술 등 예술 관련 대학이 밀집해 있는 뉴욕에 재벌그룹 일가 2∼4세들이 몰리고 있다”며 “이 도시들이 재벌들의 ‘사교의 장’으로 꼽히면서 ‘재벌가 자녀와의 로맨스를 꿈꾸면 미국으로 떠나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설명했다.
미국 유학처가 같다고 해서 모두 결혼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핑크빛 라인을 형성하는데 ‘사교모임’만 한 촉매제 역할이 없다. 현지에 따르면 미국에서 유학 중인 재벌가 자녀들은 최소 한 달에 한 번씩은 정기적으로 ‘서클’모임을 갖는 것으로 알려졌다.
학연, 지연 등 끈끈한 우정이란 고리로 연결돼 있는 재벌 사교모임은 일반적으로 총수 모임, 부인 모임 그리고 2·3세 모임으로 나눠진다. 총수나 부인이 참여하는 서클은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는 모임인 만큼 경영이나 봉사 등의 목적이 분명하다.
경영자 모임인 ‘브이소사이어티’ ‘한국YPO’ ‘서울YEO’‘경영연구회’등은 회원들 간 호형호제가 자연스러울 만큼 각별한 친밀감이 형성돼 있다는 게 클럽 관계자의 전언.
총수 부인·딸·며느리 등으로 구성된 재벌가 ‘안방마님’들의 친목·봉사모임은 봉사활동 및 자선단체인 ‘미래회’, 대한적십자사 지원을 명목으로 구성된 ‘수요봉사회’와 ‘부녀봉사 자문위원회’등이 대표적이다.
동문 친목단체로는 ▲서울대·이화여대 출신 ‘명우회’ ▲이화여대 출신 ‘알프회’와 ‘이영회’ ▲숙명여대 출신 ‘숙지회’ ▲신일고 출신 ‘신수회’ ▲서울고·중앙고 출신 ‘푸른회’ ▲고려대 출신 ‘크림슨 포럼’등이 있다. 또 취미모임인 ‘팍스’ ‘센추리’ ‘이스라’ ‘스플래쉬’ ‘서현회’ 등도 ‘이너서클’로 형성된 사교클럽으로 유명하다.
이들 모임에서 쌓인 친분은 아들·딸의 혼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국내 명문 학교 →입학미국 뉴욕 또는 동부 아이비리그 유학→
상류층 사교모임 가입→강남 멤버십 클럽 출입→전문 마담뚜 친분 유지
최근 파경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외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와 임창욱 대상그룹 회장의 장녀 세령 씨는 각각 모친 홍라희 씨와 박현주 씨가 불자모임인 ‘불이회’에서 가깝게 지내면서 1997년 두 사람의 교제를 주선했고 이듬해 결혼했다.
2006년 5월 결혼한 한진가의 조원태-김미연 부부도 경기여고 선후배 사이이자 불교 신자로 친분을 쌓아온 양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알려졌다.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 정원(두산건설 부회장) 씨와 공군 참모총장과 민자당 국회의원을 지낸 김인기 전 의원의 딸 소영 씨는 양가 부친이 동창회 모임에서 혼담을 나눈 게 인연이 돼 결혼에 성공했다. 박 명예회장과 김 전 의원은 경동고 선후배 사이다.
박 명예회장의 동생인 박용만 ㈜두산 부회장의 장남 서원씨와 범LG가인 구자철 한성그룹 회장의 외동딸 원희 씨의 2005년 6월 결혼도 두 부친 간 ‘절친’ 관계가 원동력이 됐다. 박 부회장과 구 회장은 경기중·고교 동창으로 오랜 기간 양가가 친분을 쌓아왔으며 서원 씨와 원희 씨도 이 같은 인연으로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다 미국 유학 시절 장래를 약속했다고 한다.
재벌 2·3세들이 사교 목적으로 결성한 모임은 은밀하게 만남이 이뤄지는 경우가 대다수다. 비공개적으로 활동하며 회원명단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2006년 4월 재벌 2·3세 사교모임인 ‘베스트’ 멤버들이 이른바 ‘묻지마 투자’를 했다가 560억원을 날린 사건이 일어나 사회적인 파장이 일기도 했다.
‘상류 1%’들이 모이는 ‘만남의 광장’은 주로 서울 강남 압구정동과 청담동 일대 사설 멤버십 클럽이다. 청담동 F클럽과 압구정동 G클럽, 논현동 D클럽 등이 소문난 아지트다. 이들 클럽은 상위 1%가 주 고객. 강남 부근에만 10∼20곳이 성업 중이다.
모두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한다. 어지간한 재력으론 명함도 못 내민다. 불황으로 대부분의 업소들이 ‘울상’을 짓고 있는 와중에도 전혀 경기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부모가 억지로 배우자를 정해주는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는 재벌가도 적지 않다. 재벌가 혼사를 주선하는 중매쟁이 이른바 ‘마담뚜’가 아직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상류층만 타깃으로 한 결혼정보업체를 통한 만남이 트렌드가 됐지만 서울 한남동 등 강북지역의 전통적인 부촌엔 여전히 마담뚜들이 들락날락하고 있다.
마담뚜들이 받는 소개비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양가에서 판단해 주는 대로 받는다. 만약 결혼이 성사될 경우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을 챙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은밀히 활개치는 마담뚜들의 직업은 고급 음식점 주인, 명품 의류샵 디자이너, 연예인 캐스팅 담당 등이다. 아직 일부는 고급 룸살롱(소위 텐프로 이상)의 마담들도 있다. 최근엔 은행 PB센터 관계자들이 상류층의 중매를 서기도 한다. 이들은 서비스 차원에서 비슷한 수준의 자사 고객들을 골라 연분을 찾아준다.
마담뚜들은 한쪽으로 기우는 상대방이 아닌 비슷한 조건을 가진 집안을 찾는다. 또 다른 타깃 1순위는 법조인들이다. 혼기가 꽉 찬 모 그룹 총수의 딸 A씨는 여러 명의 마담뚜들이 붙어 법조인을 중심으로 맞선을 보이는 등 남편감을 물색하고 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아 마담뚜들이 진땀을 흘리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수년 전 재벌 집안간 결혼으로 세간의 화제를 모은 B회장과 C회장 자제들도 사정은 같다. 두 회사는 이들이 지인의 소개로 만나 결혼한 것으로 언론에 보도자료를 뿌렸지만 실제론 마담뚜가 개입했다는 후문이다.
재벌가 결혼 ‘오해와 진실’
‘엄마한테 물어보고…’
재벌가 자녀들이 생각하는 재벌가의 결혼은 어떨까.
결혼정보회사 웨디안이 지난해 프레스티지(VIP)회원들 중 가장 최상위층으로 꼽히는 258명에게 ‘명문가 결혼에 대한 생각’을 주제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 결혼 시 가장 중요시하는 조건으로 41%(106명)가 ‘사회적 명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꼽았다.
이어 ‘결혼상대자의 능력’ 35%(90명), ‘결혼상대자의 외모’ 13%(34명), ‘재산’ 11%(28명)의 순이었다.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의 횟수’를 묻는 질문엔 ‘거의 없었다’가 56%(144명)를 차지했다.
특히 ‘자신이 상류층에 속해서 결혼이 쉽다고 생각하나’에 대해선 76%(196명)가 ‘오히려 더 힘들다’고 응답했다. 이어 ‘상류층이라 결혼이 더 쉽다’11%(28명), ‘특별히 어렵거나 쉬운 게 없다. 보통이다’7%(18명), ‘잘 모르겠다’ 6%(16명)의 순이었다.
부모님의 의견을 얼마나 존중하냐는 질문엔 81%(209명)에 해당하는 대다수의 응답자가 ‘부모님의 의견이 크게 작용한다’고 응답했고, ‘부모님보다 내 의견을 중시한다’는 19%(49명)에 그쳤다.
웨디안 한 관계자는 “전문직 남성이나 외모가 뛰어난 여성들이 프레스티지급의 회원을 소개해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며 “프레스티지급의 경우 본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부모님의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 또한 빠질 수 없는 기준이 되기에 쉽게 소개해줄 수 없어 난처한 상황을 많이 겪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