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크리스마스 며칠 전부터 기지촌 거리엔 캐롤송이 울려 나오고 있었다. 그 음습한 골목엔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곡조가 묘한 효모 발효 작용을 일으켰는지 남녀 행인들의 마음을 부푼 빵처럼 들뜨게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엔 한낮부터 잔칫날처럼 블루문뿐만 아니라 모든 홀과 거리가 흥청대는 느낌이었다. 동두천 전체가 하나의 요상스런 소행성으로 변해 들썩거리는 것 같았다.
야릇한 미약
미군들보다 오히려 한국인들이 더 흥분한 모습이었다. 홀 여자들은 서양 대목을 맞아 달러깨나 벌어들일 작정으로 그랬다더라도 그 외의 사람들은?
아니, 기지촌 여자들의 마음속에서도 달러뿐만이 아닌 어떤 소망이나 추억과 꿈이 꿈틀거리고 있지 않았을까?
청운은 거렁뱅이 신세로 서울 거리를 떠돌던 시절에 명동이나 퇴계로에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은 적이 있었다.
성당과 교회는 그런 날일수록 오히려 평소보다 좀 외로워 보였다. 상점들의 불빛이 화려찬란하게 빛나는 번화가로 들어서면 사람들이 마치 밀물처럼 넘쳐흘렀다.
젊고 아름답고 활기찬 남녀들은 미소를 지으며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 어떤 꿈과 꽃구름이 어디에선가 곧바로 기다리는 것처럼…
천국이 바로 이 땅에 나타난 듯이…
하지만 그건 신을 향해 가는 인고의 행렬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의 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하기야 선남선녀들의 멋지고 예쁘게 꾸민 얼굴도 자세히 보면 화장한 가면일 뿐 그 속엔 욕망에 들뜬 버마재비나 불나방과 하루살이의 모습이 어른거리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그 어떤 국경일보다 더 휘황스럽지만 실상은 야릇한 미약에 취한 섹스 축제가 아닐까?’
청운은 일전 한푼을 구걸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그 군중 속에 슬쩍 끼어들었다가 비껴나기도 하며 생각했다. 고독했기에 그런 어설픈 생각을 했는지도 몰랐다.
그들의 발밑에 붙은 먼지보다도 하찮은 인생이란 기분이 얼핏 들었다. 하긴 다음날 주워 읽은 신문에서도 크리스마스 이브의 향락 추구적인 세태에 대해 일침을 가하고 있긴 했다.
성聖탄절이 아닌 성性탄절…콘돔 판매 급증…이브엔 로맨틱해지는 청춘 남녀의 본심은 참된 사랑이 아닌 사이비 욕망이 아닐까?
크리스마스 3개월 이후 낙태수술 급증…사랑을 버리고, 이기적인 장미꽃과 칼을 든 현대의 슬픈 모정…이런 추세라면 올해에 이어 다음해엔 더 많은 불법 낙태수술이 횡행할 듯…징글벨의 복음이 태아 유령의 구슬픈 울음으로 변하기 전에 대책 필요….
그렇게도 찬란하던 이브였건만 성탄절 당일엔 도시가 무슨 역병이라도 지나간 폐허처럼 잠잠했다. 과도한 성축제 후의 일그러진 휴식일까.
교회나 성당은 오히려 평일보다 한산하고 고즈넉한 풍경 속에 놓여 있었다. 청운의 마음속엔 지난밤의 고독감이 아직껏 깊이 남아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마술 같은 향연 속에 참여하지 못한 선망이나 박탈감이랄까.
신도들이 예배를 마치고 돌아간 텅 빈 성당 안으로 청운은 쭈뼛쭈뼛 들어섰다. 그리고 어둠 속에 희뿌옇게 떠오른 마리아 상을 향해 중얼거렸다.
“성모님, 우리 어머니를 찾도록 좀 도와주십시오. 당신께서는 죽은 아드님을 안고 슬퍼하시지만, 제 어머니는 살아 있는 어린 자식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어머닌 어디선가 울고 계실 겁니다. 비록 사이비 종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자식마저 버린 무정한 모정이래도 전 엄마가 그립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왠지 더욱 더….”
그의 눈에 맺힌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뺨 위로 굴러 툭 떨어졌다. 갑자기 그는 흐흐 하고 허탈하게 웃고 나서 다시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지촌 거리에도 캐롤송 울려 퍼져
백인 전용과 흑인 전용 업소 구별
“아마 성모님은 이 세상 모든 고아들의 어머니이시겠지요? 그런데 당신 친아들의 생일 날 이 세상은 음주가무와 문란한 성 축제로 요란벅적했다고 합디다. 차라리 당신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아니, 저 같은 거렁뱅이는 우리나라의 원래 풍속대로 긴 동짓달 겨울을 견디며 고통 속에서도 모닥불 가에서 순박한 꿈을 지닐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 땅에서 이방인 같은 존재가 되지 않고….”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계속 중얼댔다.
“성모 마리아님, 당신의 아드님께서 성스러운 탄생을 하신 날이 과연 오늘이 맞습니까? 사실은 오늘이 아니라 어느 여름날 누구보다도 친히 낳으신 당신께서 잘 아시겠지요. 어떤 허접스런 잡지책에서 보니 크리스마스는 성 니콜라스 그리고 예수님은 지중해에 가까운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자랐으니만큼 황색의 아시아인에 더 가까울 텐데…하얀 피부에 멀쩡한 미국인처럼 그려져 있는 건 어찌된 일인가요?”
“만약 이것이 잡지에 한갓 흥밋거리로 소개된 유언비어가 아니라 ‘예수님의 위조’라면 어머니 된 분으로서 얼마나 가슴 쓰린 노릇입니까. 그래도 세계 각국에 알려진 예수님의 모습은 저마다 그 나라 사람들의 인상을 닮는 법이라는데, 우리 한국 땅에 소개된 예수님은 그저 미국인이 만들어낸 모습과 완전히 판박이입니다. 하하하 혹시 모조된 아드님의 얼굴 때문에 한국 땅의 마리아님은 한결 수심이 깊고 쓸쓸한지도 모르겠습니다만…하하, 이건 농담입니다. 죄송합니다.”
청운은 마치 유령처럼 맥없이 성당을 걸어나와 정처없이 거리를 배회했었다.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흰 눈이 내린다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찬 겨울이 왔다
썰매 타는 어린애들은 해 가는 줄도 모르고
눈길 위에 썰매를 깔고 즐겁게 달린다
긴긴 해가 다 가고 어둠이 오면
오색 빛이 찬란한 거리 거리에 성탄 빛
추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마음껏 즐기자
맑고 흰 눈이 새 봄빛 속에 사라지기 전에….
청운은 황량하고 처량하기만 했던 옛 크리스마스의 추억에서 깨어났다. 오후 다섯 시가 지나자 병영 근무를 마친 미군들이 화려하면서도 편리한 사복으로 갈아입고 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희끗거리던 눈발이 함박눈으로 변했는지 그들은 백설을 뒤집어쓴 채 캐롤송을 휘파람으로 불며 히히덕댔다. 제법 흥청거리는 분위기이긴 했지만 결코 평소보다 소란스런 편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미군들에게 있어 크리스마스는 신성한 날이었다. 평생토록 인간의 고통을 사랑으로 치유해 준 예수라는 분이 이 세상에 온 날인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어릴 때부터 그분이 베푼 진리와 자비를 가슴속에 새기며 자라나 성탄절이면 감사의 마음을 표하게 된다. 마치 한국의 개천절이나 석탄일 같다고나 할까.
섹스 축제
그런 날 술 한잔 마시며 축제의 기분이 젖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평소보다 사건과 사고가 적었다.
여느 땐 백인과 흑인은 서로 견원지간처럼 미워하며 으르렁거렸다. 서로 고약한 냄새가 난다며 비웃었다.
백인은 흑인을 옛 선조들이 그랬듯 짐승처럼 무시했으며, 흑인은 그런 백인들을 살육자의 자식으로 여기고 증오했다. 그렇다 보니 클럽마저도 백인 전용과 흑인 전용 업소로 나뉠 정도였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