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삼의 맛있는 정치> 4·19 혁명과 자유당 정권 몰락의 전말

2024.04.18 09:16:03 호수 0호

1960년에는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을 뽑는 선거의 해였다. 4·19는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해 학생들이 들고일어나 자유당 정권을 종식한 의거였다.



집권 자유당은 후보로서 다른 대안이 없었으므로 이승만 현 대통령과 이기붕 국회의장을 차기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 했다.

3·15 부정선거

자유당은 1959년 초부터 전면적인 선거 준비 작업에 돌입했다. 2월 지방자치법을 개정해 시·읍·면장 임명제를 도입해 득표에 유리한 인사를 임명할 길을 만들고, 자유당 중앙조직위원회에 특수조직책을 두고 이들을 정부 각 부처의 국·과별로 특수임무를 수행토록 보임할 수 있도록 했다.

3월에는 개각으로 경찰과 지방공무원의 총수 격인 내무부 장관에 이기붕 의장과 사적으로 친밀한 최인규를 임명했다. 최인규는 곧 7개 도의 도지사를 경질했다.

6월에는 일찌감치 전당대회를 거쳐 이승만과 이기붕을 대·부통령 후보로 지명해 공식화했다(민주당에선 신구파 간의 갈등으로 후보 선정 문제가 혼미에 빠져있었다. 11월26일에야 전당대회서 조병옥(구파), 장면(신파)을 후보로 선정했다).


11월, 자유당은 본격적인 선거 대책을 세우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자유당 중앙당은 거액의 선거자금을 모으기로 하고 목표액을 50억환으로 책정, 재무부와 국책은행인 한국은행과 산업은행을 비롯한 시중은행 및 굵직한 기업체들로부터 돈을 거둬들여 거의 70억환을 확보했다.

최인규는 경찰 인사이동을 단행해 일선 경찰서장을 연고지 중심으로 재배치했다. 전국 시·읍·면 단위로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 매주 1회씩 회합해 득표 공작을 점검토록 하고 동시에 득표 매수 자금을 살포했다.

최인규는 군수와 경찰서장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 직접 나가 “어떤 비상 수단을 써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을 꼭 당선되도록 하라! 세계 역사상 대통령선거에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느냐? 법은 나중이고 우선 당선시켜 놓고 봐야 한다”고 독려했다.

그는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도 내가 간다. 국가 대업 수행을 위해 지시하는 것이니 군수 및 서장들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훈계한 것으로 후일 밝혀졌다.

11월부터 이듬해 2월 사이에 전국 각급 기관장에게 지령한 부정선거 방법은 ▲유령 유권자 조작 ▲4할 사전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완장 부대 활용 ▲야당 참관인 축출 등을 통한 자유당 후보의 85% 득표 등이었다.

이를 위해 자유당은 당 차원서 관권과 금권을 동원해 폭력배, 연예인, 청년단체, 노동조합 등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을 총동원해 부정선거에 투입하기로 했다.

한편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 박사는 신병 치료 차 1960년 1월29일 미국으로 갔는데 민주당은 조 박사의 형편을 고려해 조기 선거를 반대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농번기를 피한다는 구실로 선거일을 3월15일로 공고했다. 그런데 조 박사는 불행히도 2월15일 현지서 사망했다.

조 박사의 사망으로 대통령선거는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의 당선 확정으로 기울었고, 선거의 초점은 부통령 선거로 옮아갔다. 자유당으로서는 대통령 유고 시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으로 누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정권 유지 여부가 결정되는 사태를 좀 더 예민하게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승만 박사는 만 85세로 언제 유고가 생길지 알 수 없는 데다, 이기붕과 장면과의 대결서 이기붕의 승리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이 같은 상황서 자유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선거 전략을 수정 없이 강행키로 했다.

이에 따라 이해할 수 없는 무리수가 잇달아 일어났다. 과거에도 제2대 총선 이래 선거 때마다 부정선거가 있어 왔지만 3·15 선거에서는 부정선거 계획과 실행의 정도가 예상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 광태의 수준이었다.


야당의 유세장에 선거권도 없는 고등학생이 참관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등교시키는  등의 행태로 이들의 항의 시위가 대구, 대전 등지서 일어났다. 3월9일과 10일, 전라남도 여수와 광산에서는 민주당 간부가 테러로 사망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에 긴급 소집된 민주당 확대간부회의는 ‘부정 및 불법 사태를 엄하게 다스려달라는 이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을 채택하는 한편, 전 국민에게 부정선거 거부 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이것은 사실상의 선거 포기였는데 3·15 선거는 치르기도 전에 이미 끝난 셈이었다. 3·15 선거투표는 야당 측이 거의 방관한 상태서 이뤄졌으며, 민주당은 이날 오후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닌, 선거라는 이름으로 이뤄진 국민주권에 대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한 뒤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개표가 시작되자 이승만, 이기붕의 득표가 95%∼99%까지 조작돼 나온 지역이 속출했고, 이런 터무니없는 집계에 놀란 자유당은 최인규에게 득표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최종 집계는 총투표자 1000여만명 중 이승만 960여만명으로 88.7% 득표, 이기붕 830여만명으로 79%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투·개표 상의 공공연한 조작 행위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이날 오후, 마산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로 표출됐다.

3·15 마산 시위와 김주열 학생의 주검

민중에 의한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민중들 사이에 분노의 공감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분노의 공감이 형성돼있다고 할지라도 촉발 요인이 없으면 행동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인위적으로 촉발 요인을 조작하기도 하지만 자발적인 민중에 의한 집합행동이면 우연히 생긴 촉발 요인에 의해 봉기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달리 말하면 운수(運數)라고 할 수도 있고 종교적 관점에선 하늘의 뜻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실 4·19 혁명은 마산서 촉발됐다. (선거 당일)사전투표한 투표함이 넘어져 투표지가 쏟아지는 데 항의하는 유권자들과 정부 측 관리인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선거 무효를 외치는 유권자들로부터 격렬한 데모가 발생했다.


후일 밝혀졌지만 최인규 내무 장관은 발포를 명령했다. 이날 발포로 9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다. 정부는 부정선거란 빨갱이들에 의한 거짓 선동이며 데모도 빨갱이들의 전략적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마산 시민들은 숨을 죽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자유당 정부는 뭔가 불안했던지 23일, 최인규를 내무 장관서 해임하고 그 자리에 홍진기 법무부 장관을 앉혔다.

운수라고 할까? 섭리라고 해야 할까? 3·15로부터 27일 후인 4월11일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 시신 한 구가 떠올랐다. 3·15 당시 실종자로 처리됐던 마산상업고등학교 합격생 김주열군의 시체였다. 눈에 최루탄이 박히고 온몸에 돌을 매단 끔찍한 시신의 모습은 사진만 봐도 경찰이 쏜 최루탄을 눈에 맞아 절명한 사체를 누군가가 바다에 유기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튿날, 16만명의 마산 시민 가운데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보도된 사진과 기사를 접한 전국의 국민은 더 이상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다는 인식이 일순간에 전류처럼 전율했다.

가장 먼저 반응에 나선 이들은 서울 소재의 중·고 및 대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자교와 타교를 가림 없이 사발통문해 “학생들은 더 이상 현실을 좌시할 수만은 없으며 정의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연합 시위를 갖겠다”며 날짜를 4월19일로 잡았다.

학생들은 미리 약속한 중앙청 앞 태평로에 집결해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경무대로 몰려갔다. 경무대는 일체의 반응 없이 학생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경무대 입구인 효자동 좁은 길은 삽시간에 수백, 수천으로 보이는 사상자가 뒹구는 지옥으로 변했다.

4·19로 사망한 인원은 186명, 부상자 1409명으로 집계됐다. 사망자는 초등학생 6명, 중학생 24명, 고등학생 39명, 대학생 24명, 일반인 87명 등 179명이었으며, 경무대 입구서 피격됐다. 서대문 소재의 이기붕 자택 인근서도 발포가 있었다.

이날 발포는 홍진기 신임 내무 장관이 명령한 것으로 후일 밝혀졌다.

집권 자유당이 정권 유지를 하기 위해 정부를 앞장세워 부정선거를 계획, 실행하다가 국민으로부터의 저항에 부딪혀 급기야 다수의 국민에게 총을 겨누고 살상까지 감행하면서 정부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더 이상 정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자유당의 권력 유지는 불가능해졌다. 같은 달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는 당연한 귀결이었으며 이렇게 4·19 사태는 마무리됐다.

김명삼 대기자
<hntn1188@naver.com>

 

저작권자 ©일요시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Copyright ©일요시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