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대학원 교수 남침 가능성 시사…북한 “전면전 태세” 예고
잠수함 등 이용 남침 시나리오 가동…NLL경계선 무력화
북한의 남침 시나리오가 대두되고 있다. 국정원 소속 국가정보대학원 김영환 교수가 ‘남침 임박설’을 주장했고, 북한이 “전면대결태세에 진입할 것”이라고 발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통일부·국정원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다. 김 교수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일축하며 북한의 강경대응은 남한을 압박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주장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남침을 주장하는 뒷배경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역대 남침 사건들을 토대로 남침 시나리오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봤다.
지난달 15일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소속 국가정보대학원 김영환 교수가 ‘대국민 안보보고서’라는 제목의 개인보고서 70여 페이지를 언론을 통해 공개해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김 교수는 본문에서 보안사 부사관 출신인 고(故) 정지용 씨 등의 증언에 따른 언론보도를 인용, “북한이 김포 인근까지 장거리 지하터널을 연결시켜 놨다”며 “북한의 기습남침을 방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남침 도발 가능성 가시화
북한, NLL 침범 예고
이어 그는 “대통령과 정부, 그중에서도 특히 국방부에 대해 장거리 지하터널에 대한 대책을 포함한 전방위적인 남침 방지책 수립을 촉구해야 할 것”이라면서도 “장거리 지하터널의 존재를 부정하는 국방부에게 지하터널을 찾으라고 한다면 이는 사실상 찾기를 포기하는 것이므로 국방부는 군사적 대응책만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를 두고 국정원이 “교수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른 의견으로 국정원의 공식 보고서나 논문이 아니며 국정원의 입장이나 견해도 아니다”고 설명함으로써 북한의 남침 가능성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지난달 17일,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는 이명박 대통령을 ‘역도’라고 지칭하면서 서해 해상경계선을 넘는 남침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논란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전면대결태세에 진입할 것”이라고 밝혔던 것.
특히 지난달 30일에는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정치 군사적 대결 상태 해소와 관련한 모든 합의사항들에 대한 무효화를 일방 선언하고, 남북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에 있는 서해 해상군사경계선에 관한 조항들을 폐기한다”고 밝혀, NLL(서해 북방한계선)의 의미가 완전 사라지게 됐다. 즉 언제든지 남침을 할 수 있다는 얘기인 셈이다.
이 때문에 ‘남침 시나리오’에 점차적으로 무게가 기울어지고 있다. 최근 북한의 발언으로 인해 인터넷 검색 순위에서 ‘남침’, ‘핵무기’, ‘잠수함’ 등이 상위 순위에 올랐다는 점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모습이다. 결국 ‘남침 시나리오’의 진원지는 김 교수 ‘대국민 안보보고서’, 촉발제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 발언인 셈이다.
비록 남한은 북한에 비해 전투력은 앞서지만 ‘핵’으로 인해 여전히 위기감이 팽배한 상태다. 더욱이 북한이 “북·미 관계가 외교적으로 정상화된다고 해도 미국의 핵위협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핵보유 지위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 상태라 ‘북핵’에 대한 불안감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북한이 남한을 압박한 경우는 비일비재했지만, 매번 남침 시나리오가 도사리고 있는 것.
문제는 실제로도 남침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점이다. ‘땅굴’, ‘비행기 폭파’, ‘잠수함’ 등을 이용한 남침이 대표적이다. 남침 사건은 지난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는 대부분 국가원수 암살 테러를 위한 남침사건이 주류를 이뤘다. 1968년 1월21일 발생한 김신조 간첩일당 청와대 피습사건이 대표적인 남침이자 국가원수 암살 테러 사건이다.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군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한 것.
게릴라전 특수훈련을 받은 31명은 그해 1월13일 북한국 정찰국장으로부터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작전지시를 받았다. 대통령관저 폭파와 대통령 암살, 주한 미대사관 폭파와 대사관원 살해, 육군본부 폭파와 고급지휘관 살해, 서울교도소 폭파, 서빙고 간첩수용소 폭파 후 북한간첩 대동 월북 등이 바로 그것.
작전지시를 받은 이들은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돌파하는 등 치밀하게 행동했다. ‘미군담당 군사지역에 잠입’, ‘얼음판 횡단’, ‘산악행군’을 통해 서울시내 세검동파출소 관할 자하문 초소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약 400여m를 행진하던 무렵 경찰병력과 첫 접전을 벌였고, 자동소총을 쏘며 수류탄을 투척했다. 이 과정에서 종로경찰서장이 총탄에 맞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민간인 5명도 살해된 대표적인 남침 사건이다.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도 손꼽힌다. 지난 1970년 6월22일 국립현충원에 무장공비가 잠입, 현충문에 폭약을 설치하다 실패한 것.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을 위한 테러 사건이었다.
아웅산 국립묘지 암살테러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1983년 10월9일 미얀마를 친선 방문중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 및 수행원들을 향한 테러 사건이었다.
실제 전 전 대통령 및 수행원들이 아웅산 국립묘소에서 참배하는 틈을 노렸다. 암살을 위해 아웅산 국립묘지 건물 천정에 원격 조종폭탄을 사전에 설치, 폭발시킨 것. 이로 인해 한국 부총리·장관 등 수행원 17명이 순국했고,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미얀마 당국 수사 결과 이 사건은 북한 독재자 김정일 위원장의 친필지령을 받은 북한 정찰국 특공대에 의해 저질러졌던 것으로 밝혔다.
북한, 남한 주요인사 타깃
‘혼란 가중 시켜라’
북한의 남침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대담해졌다. 항공기 테러를 저지르는 등 한반도 전체에 위기감을 조성하려했던 것. 1969년 항공기 납북·1987년 대한항공 858기 공중폭발 테러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1969년 12월11일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은 최초의 항공기 테러 사건이다. 승객 47명과 승무원 51명을 태우고 강릉에서 서울로 향하던 대항항공 YS-11기가 대관령 상공을 비행 중 고정간첩에 의해 강제 납북된 것. 그러나 정작 북한은 “두 조종사에 의한 자진 입북”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북괴의 공중 해적 행위를 규탄하고 승무원·승객 전원 송환을 촉구했다. 결국 3달여의 협상 끝에 탑승자 51명 중 39명이 판문점을 통해 남한으로 돌아왔다. 귀환한 이들은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의 만행을 폭로하기도 했다.
1987년 대한항공 858기 공중 폭파 테러는 영화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유명한 남침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한 대한항공 858기가 아랍 에미르트의 수도 아부다비에 기착한 뒤 방콕으로 향하던 중 태국 해안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당시 대한항공 858기에는 중동에서 귀국하던 한국인 근로자 등 승객 93명과 외국인 2명, 승무원 20명 등 모두 115명이 탑승해 있었다.
문제는 일본인 2명이 바그다드에서 탑승한 뒤 아부다비 공항에 내렸고, 이중 김현희가 위조여권을 사용한 사실이 바레인 공항에서 밝혀졌던 것.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들은 담배 속에 숨겨둔 독극물을 삼켜 자살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남자는 숨지고 김씨는 중태에 빠졌다.
목숨을 건진 김씨는 한국으로 신병이 넘겨졌는데 조사결과 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 공작원으로서 “88서울올림픽 개최방해를 위해 KAL기를 폭파하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필 공작명령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무장공비 테러도 남침을 위한 대표적인 방법으로 사용됐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빼놓을 수 없는 무장 공비 테러 사건이다. 1968년 10월30일부터 11월2일까지 3차례 걸쳐 울진·삼척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을 15명씩 조를 편성, 군복·신사복·등산복 등으로 위장하여 침투했던 것.
무장공비들은 주민들을 모아 남자는 남로당, 여자는 여성동맹에 가입하라고 강요, 총검으로 위협했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초등학생 1명이 무참히 살해됐다.
충남 광천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도 마찬가지다. 북한 노동당 소속 무장공비 1개조 3명이 군사정찰 및 사회혼란을 목적으로 1978년 11월 충남 홍성군 광천읍 부근 해안으로 침투했다. 광천 소재 밀봉산에서 화목을 채취하던 부녀자 3명 중 2명을 조우하자, 노출을 우려해 여인들을 살해하고 현장을 이탈했다. 더군다나 이 과정에서 무장공비들을 사살하지 못해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기도 했다.
북한의 남침은 오히려 대담해졌다. 해상 도발을 감행했던 것.
실제 1967년 발생한 해군 제56함 피침사건은 동해 휴전선 근해에서 명태잡이 어선을 보호하던 해군 함정이 북한군 육상 포대로부터 집중 포격을 받아 침몰된 유명한 사건이다. 이 교정에서 승무원 79명 중 39명이 전사하고, 14명 중상, 16명 경상을 입기도 했다. 북한은 어로작업 중이던 민간 어선 약 70여 척을 납북시키려고도 했다.
1999년 서해 북방한계선 침범사건도 있다. 북한 경비정 6척이 꽃게잡이 어선을 앞세워 북방한계선을 넘었던 것. 영해를 침범해 들어온 북한군에 경고를 무시하자, 선제사격을 가함으로써 남북 남정간의 치열한 해상 전쟁이 진행됐다.
여전히 불안한 남북관계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른다
이외에도 1996년에는 강릉에서 북한의 소형 잠수함이 남침하면서 강릉비행장·영동발전소 등을 정밀 촬영하기도 했다. 이들의 주임무는 전쟁에 대비하여 한국의 군사시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강원도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에 참석하는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역대 남침 사건을 종합해볼 때 북한은 휴전선 도발, 무장공비 침투 등 총 400여 차례에 걸쳐 남침을 시도했다.
이처럼 북한의 남침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더욱이 최근에는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가 “NLL 경계선을 파괴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함에 따라 일각에서는 얼마든지 남침을 감행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불거지고 있다. 때문에 이명박 정부에서는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북한의 도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특히 최근에는 국정원 소속 국가정보대학원 김 교수가 남침 도발 가능성을 제기한 만큼 북한의 도발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