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56초 만에’ 사라진 자립정착금의 비밀

2021.03.02 11:59:49 호수 1312호

나라가 주는 돈 보육원이 빼갔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당사자도 모르게 계좌에서 250만원이 빠져나갔다. 입출금 간격은 불과 56초. 18세 고아 박민우씨의 자립정착금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8년 뒤에야 들춰본 거래내역서에는 ‘영락보린원’이라는 낯익은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가 5세 때부터 14년 동안 집으로 여긴 곳, 보육원이었다.

 

▲ (사진 왼쪽)영락보린원에서 용산구청에 제출한 자립정착금 집행 내역 문서와 (가운데)영락보린원에서 박민우씨 계좌로 넣은 자립정착금 입금내역서, (오른쪽)박민우씨가 떼본 당시 거래내역서

부모를 여의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아 몸 붙일 곳 없는 아이. 고아의 사전적 의미다. 최근에는 ‘보호 대상 아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보호자가 없거나 보호자로부터 이탈된 아동 또는 보호자가 아동을 학대하는 경우 등 그 보호자가 아동을 양육하기에 적당하지 않거나 양육할 능력이 없는 경우의 아동’(아동복지법 3조 4호)으로 그 범위도 확대됐다.

고아 대부분
아동 시설로

보호 대상 아동(이하 보호아동)은 보건복지부 현황 파악 기준 2000년 9058명, 2010년 8590명, 2019년 4047명 등 20여년간 감소 추세를 보였다. 보호아동의 절반 이상은 부모의 학대‧빈곤‧실직 등의 이유로 집을 떠나야 했다. 2019년 기준 그 비율은 71%(2865명)에 이른다. 이들은 아동 양육시설과 위탁가정 등에 맡겨졌다. 

2019년 전체 보호아동 가운데 67.6%(2739명)이 아동 양육시설 등 아동 복지시설에서 보호 조치를 받았다. 2020년 1월 기준 서울 17개구에서 운영 중인 아동 복지시설은 30개에 이른다. 시립 민간위탁시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36개까지 늘어난다. 해당 시설들에 보호아동 2283명이 머무르고 있다. 

보호아동은 만 18세가 되면 시설에서 퇴소해야 한다. 이른바 ‘보호 종료’다.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는 “사람에게 보호 종료라는 딱지를 붙이는 경우는 고아밖에 없다”며 “고아들은 시설 입소 과정에서 이미 부모로부터의 보호가 끝났고, 시설에서 나가는 순간 국가로부터의 보호도 끝난다”고 말했다. 


아동복지법에 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보호아동의 위탁보호 종료 또는 아동 복지시설 퇴소 이후의 자립을 지원해야 한다. 그중 하나가 보호 종료 아동의 주거비 등을 지원하기 위한 ‘자립정착금’ 지급이다. 지자체별로 상이하지만 보호 종료 아동 1인당 300만~500만원이 지급된다. 십수년간 시설에 머물다가 사회로 나가게 된 보호종료 아동에게 국가가 쥐어주는 나름의 ‘목돈’인 셈이다.  

비영리 공익재단인 ‘아름다운 재단’에서 조사한 <2014년 자립정착금 사용 실태조사 및 지원방안 연구>에 따르면 1981년 아동복지법의 전면 개정 이후 2000년까지 보호 종료 아동에 대한 자립비용 지급의 근거가 명시됐다. 국가와 지자체가 나눠 부담하던 자립정착금은 2005년 지방이양사업으로 전환되면서 지자체에서 관리하고 있다. 

고아들 자립 위해 지원
구경도 못해보고 증발

서울시의 경우 보호 종료 아동의 수에 따라 자립정착금을 자치구에 교부한다. 그러면 자치구에서 자립정착금을 신청한 보호 종료 아동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이전까지는 자치구-시설-보호 종료 아동 순으로 전달됐던 자립정착금은 2019년 이후 자치구에서 보호 종료 아동의 통장에 직접 넣어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보호아동들이 자립정착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조윤환 대표는 “고아들이 자립정착금의 존재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며 “고아 출신인 나도 2001년 퇴소 때까지 자립정착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주변에서 자립정착금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서울 용산구 소재 영락보린원에서 2001년 퇴소한 박민우씨도 마찬가지였다. 영락보린원(당시 신의주 보린원)은 1939년 한경직 목사가 신의주 제2교회에서 설립한 아동 양육시설이다. 사회복지법인 영락사회복지재단이 운영하는 아동 복지사업의 일환이다. 34명의 직원들이 54명의 보호아동들을 돌보고 있다. 

4~5세 때 영락보린원에 입소한 민우씨는 만18세인 2001년 11월14일 영락보린원에서 나왔다. 퇴소 당시 민우씨에게 주어진 건 117만원가량 들어있던 자신 명의의 통장과 도장이었다. 자립생활관으로 거처를 옮긴 민우씨는 이 돈을 쪼개고 아껴서 사용했지만 2002년 5월 잔고가 바닥났다. 
 

▲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 ⓒ고성준 기자

자립생활관에 내야 할 월세 등을 벌기 위해 민우씨는 닥치는대로 일해야 했다.

민우씨는 “그 당시 한 푼, 한 푼이 정말 소중했다. 몇 만원의 월세가 없어 자립생활관에서 쫓겨나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올해로 39세가 된 민우씨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기 그지없다. 코로나19 시국과 겹쳐 월세 30만원을 마련하는 것조차 빠듯하다. 


지자체에서
자립 지원

민우씨가 자립정착금에 대해 알게 된 건 올해 초였다. 2002년부터 20년 가까이 친분을 유지해온 조윤환 대표와 대화하던 중 자립정착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 민우씨는 조 대표에게 영락보린원으로부터 자립정착금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조 대표가 그 길로 영락보린원에 확인 작업을 시작했다. 

몇 차례의 실랑이 끝에 영락보린원은 ‘보내시는 분’ 영락보린원, ‘받으시는 분’ 박민우로 250만원이 입금된 입금내역서를 조 대표에게 공개했다. 우리은행 후암동 지점에서 2002년 3월28일 오전 10시13분에 거래된 내역이었다.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한 돈이 계좌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민우씨는 신분증을 가지고 은행을 찾았다. 

하지만 민우씨 계좌의 잔고는 862원뿐이었다. 민우씨와 조 대표는 거래내역 확인을 위해 ‘예금거래 실적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증명서에는 2002년 3월28일 10시13분38초에 ‘영락보린원’ 이름으로 250만원이 현금으로 입금된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돈은 입금된 지 불과 56초 만인 2002년 3월28일 10시14분34초에 ‘자기앞수표’로 몽땅 빠져나갔다. 입출금은 같은 은행 지점에서 일어났다.

민우씨의 계좌에 250만원이 입금됐다 채 1분도 안 돼 돈이 출금된 것이다. 이 돈은 민우씨의 자립정착금이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영락보린원의 ‘2002년 아동복지시설 자립정착금 집행 보고’에 따르면 영락보린원은 2002년 6월4일 ‘2002년 아동복지시설 퇴소아동 자립정착금을 아래와 같이 집행했기에 그 결과를 보고합니다’라는 내용의 문서를 용산구청에 보냈다.

영락보린원은 민우씨를 포함한 보호종료 아동 6명에 자립정착금을 250만~300만원씩 집행했다고 기재했다. 집행일자는 2002년 3월28일, 2002년 6월3일 등이다. 그러면서 영락보린원은 ‘무통장 입금증 사본 6매’를 첨부했다. 조 대표가 민우씨의 자립정착금 지급 여부를 문의했을 당시 영락보린원이 공개한 입금내역서로 추정된다. 

영락보린원의 ‘누군가’가 은행을 찾아 민우씨의 계좌에 250만원을 넣었다가 바로 다시 뽑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영락보린원에서 용산구청에 제출할 입금내역서를 뽑기 위해 형식상 민우씨의 계좌로 돈을 보낸 게 아니냐는 해석도 뒤따른다.

시청‧구청
나 몰라라?


다시 말해 민우씨의 자립정착금이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김병삼 영락보린원 원장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영락보린원 이름으로 민우씨 계좌에 250만원을 입금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통장을 본인(박민우씨)이 갖고 있는데 어떻게 돈을 빼 가냐”면서 “기자님이 제 통장에서 돈을 빼 갈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누가 돈을 출금했는지는 모르지만 통장이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로 경찰과 논의 중에 있고,(박민우씨 등을)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고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그 당시 근무한 직원은 현재 아무도 없다”고 덧붙였다. 이어 “(박민우씨는)자립생활관으로 전원된 것”이라고 말했다. 영락보린원에서 퇴소한 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보건복지부 아동권리과 직원에 따르면 자립생활관은 시설을 퇴소한 아동이 입소하는 곳이다. 실제 자립생활관 입소를 위해서는 보호가 종료됐다는 내용의 증명서가 필요하다. 해당 직원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전원은 시설에서 시설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시설에서 자립생활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은 전원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김병삼 원장의 설명과 배치되는 부분이다.

사회복지법인 영락사회복지재단 신동원 사무처장은 “책임질 일이 있으면 당연히 책임져야겠지만, 아무런 근거 없이 뭘 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식적인 확인 없이는 법인에서 돈이나 보상 등을 해주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공식적인 확인을 위해 수사 의뢰를 할 생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민원인 측에서 그렇게 한다면 응하겠다”고 밝혔다. 

영락보린원서 입금한 내역 확인
“통장이 그 자리 있었던 것” 해명

자립정착금을 교부하고 집행하는 서울시청과 용산구청에서는 현재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

서울시청 여성가족정책실 가족담당관 아동복지팀 직원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심증은 있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다는 점에서 확실히 뭐라 말씀드리긴 어렵다”면서 “서울시는 자립정착금을 교부할 뿐 관리‧감독은 자치구가 맡고 있기 때문에 개입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용산구청 어르신청소년과 아동보호팀 직원 역시 “영락보린원과 민원인 양 측이 해결할 문제”라고 전했다. 이어 “구청은 자립정착금을 시설에 제대로 분배했고, 또 증빙서류도 제대로 받았다”며 “자립정착금을 받지 못했다는 민원인이 나와 사실 좀 난감한 부분이 있다”고 언급했다. 

서울시청과 용산구청은 영락보린원을 대상으로 한 자립정착금 전수조사 결과를 언급했다. “용산구청에서 문제가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서울시청) “문제는 발견할 수 없었다”(용산구청) 등이다. 전수조사는 영락보린원이 2002년부터 최근까지의 자립정착금 관련 서류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조 대표는 “시청이나 구청에서 말하는 전수조사는 ‘입금내역서’를 바탕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민우도 정상적인 입금내역서는 있다”며 “퇴소한 고아들을 상대로 연락을 취해 자립정착금 수령 여부를 따져보는 게 진정한 전수조사”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전국 보육원을 대상으로 자립정착금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전수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아동복지법상 미성년자 고아들의 후견인은 아동 양육시설의 원장이다. 고아들에게는 친부모나 마찬가지다. 원장은 고아들의 통장을 개설하고 해지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민우씨 역시 퇴소 당시 통장을 받을 때까지 해당 계좌의 존재를 몰랐다고 주장했다. 

입금내역서로만
전수조사 했다?

조 대표는 “매년 사회로 나오는 고아의 수가 2500~2600명 수준이다. 많은 수 같지만 지자체별로 나눠보면 얼마 되지 않는다. 자립정착금을 지원하고 고아들에게 전화 한 통만 해도 수령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휴대폰이 없어 연락이 어렵다면 고아들이 직접 수령하게끔 하는 방법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사건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수사할 수 없다는 걸 안다”면서도 “하지만 경찰에서 사실규명 작업은 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립정착금은 퇴소하는 고아들에게 목숨줄이나 다름없다. 시설에서 벼룩의 간을 빼먹는 짓을 할 수 없도록 국가가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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