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 불황의 우울한 그늘 ‘2008 노숙자’

2008.11.18 10:04:34 호수 0호

겨울이 두려운 그들 “바람만 피할 수 있다면…”

불황의 그늘을 체감할 수 있는 곳 중 하나는 노숙자들이 밀집한 지하철역, 터미널 등이다. 이곳에 가면 대낮부터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초라한 행색의 노숙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최근에 일자리를 잃고 둥지를 튼 신참 노숙자부터, 몇 년간 가족 품을 떠나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고참 노숙자까지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가진 채 거리를 전전하는 이들. 계속되는 경제 불황은 IMF 이후 줄어들었던 노숙자의 수를 증가시킬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청년실업은 20~30대의 젊은이들까지 거리로 내몰고 있는 실정이다. 찬 바닥에 누워 세상과 등진 노숙자들의 사연을 들어봤다.

지난 11일 오후, 노숙자들의 천국으로 자리매김한 서울역광장의 벤치는 어김없이 모로 누워 잠을 청하는 노숙자들의 차지였다.



대낮부터 깡소주를 마시며 지나는 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ㄱ씨도 이들 중 한 명. 자신을 피해 걸음을 옮기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다가와 말을 붙이는 기자에게 ㄱ씨는 비교적 호감을 가지고 대화에 응했다.

“가족 볼 면목이 없어서”
자신을 30대 중반이라고 소개한 ㄱ씨는 한 눈에 봐도 노숙자라고 하기엔 젊어 보였다. 그가 거리로 나온 것은 1년 전. 지방에서 사업을 하던 ㄱ씨가 서울의 거리를 전전하게 된 까닭은 수억원의 빚 때문이라고 한다. 몇천만원에 불과했던 빚은 몇 개월 사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빚쟁이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괴롭혔다. 가족들의 원성을 참다 못한 ㄱ씨는 결국 이들을 피해 서울까지 올라와 노숙생활을 하게 됐다.


1년간의 노숙생활은 많은 것을 바꿔놨다고 한다. 이전에는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썼고 체면유지에도 공을 들였지만 지금은 자신의 육신 하나 건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됐다.

ㄱ씨는 “처음 노숙을 했을 땐 ‘젊은 놈이 왜 저러고 사나’ 하는 시선이 두렵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이젠 그런 눈길에도 이골이 났다”며 “다가오는 겨울과 추위가 두려울 뿐 남들의 시선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며 연신 담배를 빼물었다.

가족들 생각이 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잠시 눈시울을 붉히다가 말없이 소주를 들이켰다.

술기운 때문인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횡설수설하던 ㄱ씨는 “나보단 형편이 나을 것 같은데 라면 값이라도 주고 가쇼”라며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천원짜리 몇 장을 건네자 그는 빠른 걸음으로 상점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ㄱ씨가 떠난 벤치는 몇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노숙자의 차지가 됐다.

이처럼 지속되는 경기불황은 한창 일할 나이의 청년들까지 거리로 내몰고 있다. 부산노숙인지원센터에 따르면 부산지역 노숙자의 20% 이상이 20~30대라고 한다. 이는 IMF 당시 쏟아져 나온 노숙자들이 대부분 명퇴 등으로 직장을 잃은 40~50대의 중년층이었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실제로 이날 서울역에도 ㄱ씨뿐만 아니라 청년으로 보이는 노숙자들이 상당수 있어 청년실업의 그늘을 실감케 했다.


서울역뿐만 아니라 용산역, 잠실역, 영등포역, 고속터미널 등 노숙자들의 쉼터로 각광(?)받는 장소엔 어김없이 노숙자들이 늘고 있다. 특히 기온이 내려가면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역 안은 더 많은 노숙자들로 붐비고 있다. 이들은 바쁘게 지나치는 시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밤낮 없이 술에 취한 상태로 추위와 외로움을 견디고 있었다.

이들 사이에는 간간이 여성노숙자들도 섞여있었다. 늘어나는 노숙자의 수만큼이나 여성노숙자도 증가하는 추세다. ‘노숙인다시서기센터’에 따르면 서울의 여성 노숙자 수는 1999년 1백75명에서 2007년 5백42명으로 크게 늘었다. 10년 전에는 남성노숙자 수의 10%에도 못 미치던 여성노숙자의 수가 8분의 1 수준까지 높아진 것.

남성노숙자들 틈바구니에서 보호막 없이 생활하고 있는 이들 여성들은 위태롭기 그지없어 보였다. 실제로 이들을 상대로 한 폭력이나 성폭력도 공공연히 일어난다. 심지어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을 하는 경우도 발생하는 것이 현실.

남성노숙자들과 다를 것 없이 종이박스와 담요, 비닐봉지 등이 유일한 방패막인 여성노숙자들이 폭력이나 성범죄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영등포역 근처에서 살고 있는 한 시민은 “밤에 영등포역에 와 보면 여자 노숙자 하나를 놓고 주먹다짐을 벌이는 노숙자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며 “술 취한 남자들 사이에 있는 여자 노숙자들을 보면 늘 위태위태한데 이들을 보호할 장치가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우려했다.

이처럼 각종 위험성을 안은 채 길거리와 지하철역 등의 흉물로 전락하고 있는 노숙자들. 문제는 경기한파로 그 수가 뚜렷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 IMF 이후 꾸준히 감소하던 노숙자의 수가 10여년 만에 늘어나는 추세로 돌아서고 있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작년 7월 3천14명에서 8월 2천9백90명으로 줄면서 3천명 이하로 내려간 서울시 노숙자의 수가 올해 9월에는 2천9백29명을 기록했다. 3천명을 넘어서는 것도 시간문제다.

이는 무료급식 이용자 실태를 봐도 알 수 있다. 전국 주요 도시 무료급식소와 관련단체 등에 따르면 노숙자, 기초생활수급자 등 극빈층을 대상으로 운영 중인 전국 주요 무료급식소의 인원이 올해 들어 20~1백% 가량 늘어났다. 그중 인천 지역의 경우 노숙자 쉼터 3곳에서 무료급식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지난 6월말까지 8백13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5백60명에 비해 45.2% 급증했다.

서울시도 특별대책 마련 나서
전문가들은 노숙자의 수가 올 연말이나 내년 초가 되면 크게 늘어날 것이란 우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대부분의 노숙자들이 거리생활을 하게 되는 절차에는 공통점이 있다. 곧바로 길거리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PC방이나 고시원, 쪽방, 찜질방 등 적은 돈으로 지낼 수 있는 장소를 전전하다 길거리로 내몰린다는 것. 현재 이 장소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고 있다는 것으로 미뤄 노숙자의 수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는 것.

한편 서울시는 늘어나는 노숙자들을 위해 이번 달부터 특별보호대책에 나선다. 서울시는 현재 50여명인 거리노숙인 상담반을 77명으로 늘이고 영등포 지역에 노숙자를 수용하는 응급 구호방을 겨울 동안 임시 운영한다고 밝혔다. 또 노숙인들의 일거리를 제공하는 특별 자활 사업규모를 늘여 이들의 자활을 도울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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