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8대 국회 국정감사가 막을 내렸다. ‘혹시나’했던 기대는 ‘역시나’로 끝났다. 뻔한 질문에 뻔한 답변들이 오갔다. ‘국감 스타’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툭 하면 지역구 민원성 발언이 나왔고, 자기 당 감싸기에 급급했다. 기업 관련 국감은 더 그랬다. 불황 늪에서 할 일이 산더미인 수십명의 기업인들만 불러놓고 눈치만 살피다 돌려보냈다. 상대적으로 재벌그룹에 직격탄을 날린 ‘재벌 저격수’들이 부각된 이유다.
매년 국감의 단골 메뉴는 재벌이다. 그중에서도 기업 CEO, 특히 재벌그룹 총수의 출석은 초미의 관심사다. 각기 다른 예민한 사안으로 여론의 도마에 오른 기업들이 10월만 다가오면 바짝 긴장하는 이유다.
하지만 올해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긴장은커녕 여유마저 흘렀다. 이번 국감장 도마에선 재벌 소스가 흔치 않았던 탓이다. 또 경제 불황도 맞물렸다. 다만 몇몇 의원들만 재벌을 향해 독설과 직격탄을 날려 눈길을 끌었다.
악연 계속될까
‘재벌 저격수’로 가장 주목을 받은 인물은 재정위 소속 이종구(한나라당) 의원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제정책 브레인 중 한명으로 꼽히는 이 의원은 재벌그룹 중에서도 ‘한화 저격수’로 통한다. 그는 올해도 어김없이 한화그룹을 집중 포화했다.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가 초점이었다.
이 의원은 지난달 9일 국세청 국감에서 “외환위기 때 한화그룹은 대주주로 있던 충청은행과 한화종합금융에서 각각 1조5천억원씩 모두 3조원의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무책임한 기업”이라며 “한화그룹이 이 빚을 제대로 갚지 않은 채 2001년 대한생명을 인수한 만큼 특별관리와 세무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 의원은 최근 한화그룹의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대해 “DJ 정권 하에서 정경유착으로 헐값에 대한생명을 인수하더니 이제는 그 대한생명을 자금줄로 대우조선해양마저 인수했다”며 “부도덕한 기업과 기업주에게 대우해양조선을 인수하도록 놔두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지난 17대 국회에 입성한 이 의원은 줄곧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가 원천 무효라고 주장해 왔다. 허위 컨소시엄 구성, 분식회계, 금융기관 부실책임, 뇌물공여 등을 문제 삼았다.
이 의원과 한화그룹이 앙숙이 된 것은 2001년부터다. 당시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에 재직 중이던 이 의원은 인수 자격 부적격을 이유로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를 반대하다 결국 좌천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의원 측은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단지 의혹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새롭게 뜬 ‘재벌 저격수’도 눈에 띈다. 주인공은 법사위 소속 주광덕(한나라당) 의원. 검사 출신인 주 의원은 이번 국감에서 현대·기아차그룹을 타깃으로 삼았다.
주 의원은 지난달 23일 법무부 국감에서 재벌들에 대한 사법부의 양형을 지적하면서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을 걸고 넘어졌다. 그는 “비자금 조성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뒤 지난 8월 특별 사면된 정 회장이 당초 법정에서 약속했던 7년간 8천4백억원 사재 환원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며 “1년 내 1천2백억원 환원 약속은커녕 6백억원을 들여 설립한 ‘해비치 재단’도 유명무실한 상태”라고 비판했다.
정무위 소속 조문환(한나라당) 의원도 떠오르는 ‘재벌 저격수’다. 역시 초선인 조 의원은 미래에셋그룹의 비리 의혹을 캐고 들었다.
그는 지난달 24일 금융위원회 및 금융감독원 국감에서 “미래에셋그룹이 지난 10년간 금융권 펀드의 20%를 차지하는 굴지의 금융그룹으로 성장한 데는 박현주 회장 1인 지배 구조 하에 계열사들의 각종 부당거래와 비리, 금융당국의 비호, 정권과의 유착 등이 밑거름이 됐다”며 “미래에셋그룹 관련 의혹에 대해 전면적인 재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 의원은 이어 “금융당국이 지난해 펀드광풍을 일으킨 인사이트펀드 상품판매를 방조해 사실상 특혜를 줬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미래에셋은 지난 7월 기준 국내 금융권 전체 펀드 3백50조원 중 20%인 68조5천3백81억원을 운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날까지 미래에셋 인사이트펀드는 설정액 4조7천7백30억원 중 50%의 손실을 초래했다.
조 의원은 박 회장 주도로 이뤄진 계열사 간 부당 자금거래 의혹도 제기했다. 박 회장은 당초 국감 증인 리스트에 올랐으나 최종 선정과정에서 제외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법사위 소속 박민식(한나라당) 의원은 ‘회장님’들을 싸잡아 공격해 눈길을 끌었다. 초선인 박 의원은 지난달 23일 법무부 국감에서 무차별적인 재벌총수들의 사면을 문제 삼으며 ‘회장님 구하기 7대 비책’을 소개했다.
그는 ▲끌면서 무마시키기 ▲불구속 수사 요구 ▲영장 기각 ▲집행유예 ▲법정구속 피하기 ▲구속집행정지 노리기 ▲사면 등 7단계 사면 순서를 나열하면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등을 예로 들었다.
박 의원은 “사법당국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해 다른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며 “사법당국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없도록 재벌 회장을 더 공정하고 투명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국감에서 타깃이 된 그룹들은 달갑지 않은 표정이 역력하다. 하지만 각 사안에 대해선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 자칫 18대 국회 임기 동안 악연이 계속될까 하는 우려에서다. 앞으로 4년간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이어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