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살인사건’이 또 발생했다. 이번엔 각종 사고의 온상지 고시원이다. 범인은 세상이 싫다며 스스로를 외톨이로 만든 30대 남성. 이미 몇 해 전부터 계획해 실행한 이번 범행은 실로 잔혹하다. 출근준비를 하거나 야근을 하고 와 자느라 건물 안에 사람들이 가장 많은 시간대를 골랐고, 복도로 나오게 하려고 불을 질렀다. 가까스로 불을 피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범인의 날카로운 흉기. 결국 6명이 사망하는 참극으로 마감했다. 이번 사건으로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고시원의 문제점이 부각되고 있다. 방치할 수 없는 고시원의 문제점을 분석했다.
한번 터졌다 하면 수많은 사상자를 낼 수밖에 없는 고시원 사고가 또 발생했다. 이전의 고시원 사고와 다른 점은 사이코패스에 의한 계획된 범행이라는 것.
“살기 싫어서…”
범인은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D고시원에 살던 정모(31)씨. 세상에 대한 원망과 자기비하로 가득 차 은둔형 외톨이에 가까운 삶을 살던 정씨는 몇 해 전부터 범행을 모의했다. 그리고 지난달 20일 오전, 잔인한 범행을 실행에 옮겼다.
먼저 정씨는 3층 자신의 방 침대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3~4층에서 살던 투숙자들은 “불이야”라는 외침에 너도나도 복도로 뛰어나왔다. 정씨는 뛰어나오는 사람들을 준비한 흉기로 마구 찔렀다. 연기 속에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고글까지 쓴 정씨는 침착하게 흉기를 휘둘렀고 6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극을 만들었다.
무고한 시민을 거침없이 살해한 정씨의 범행동기는 어이없게도 “세상이 싫어서”라는 것.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그의 일기장은 대표적인 ‘묻지마 범죄’라는 것을 보여줬다.
정씨의 묻지마 범죄가 많은 희생자를 낳은 것은 사건이 고시원이란 공간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고시원이 가진 많은 문제점은 또 한 번 대형참사를 낳았고 문제를 해결할 법적장치조차 없다는 점에서 또 다른 사고를 예고하고 있다.
고시원의 문제점 중 하나는 화재에 매우 취약한 구조라는 것. 대부분의 고시원은 쪽방형태의 열악한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 건물에 최대한 많은 방을 만들기 위해 벌집형태의 밀폐구조로 만든데다 복도도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것이 대부분이다. 대피로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 화재가 발생했을 때 한꺼번에 방안에서 사람들이 나올 경우 사고가 나는 것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또 스프링클러가 구비되지 않은 고시원이 많고 창문조차 없는 방도 많아 고시원에서 벌어진 화재는 많은 희생자를 낳을 수밖에 없다. 정씨가 불을 질러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겠다는 계획을 벌인 것도 이같은 고시원의 특성을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지난 7월, 용인 고시원 화재사건이 벌어진 뒤 경기도내 고시원에 대한 소방안전점검을 실시한 결과 86개소가 부적합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부적합한 시설을 규제할 기준이 없다는 것.
소방본부 관계자는 “고시원은 등록 및 신고 등의 규제를 받지 않아 안전관리를 체계적으로 하거나 규제 기준을 적용하기가 어렵다”며 화재로 인한 인명피해에 노출된 고시원에 대해 말했다.
이처럼 화재를 피하기가 힘든 구조란 것에 비해 화재의 위험성은 늘 도사리고 있다. 환기가 잘 안 되는 좁은 공간에서 흡연을 하거나 취사도구를 이용하거나 난방기를 틀어놓을 경우 화재는 빈번해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문제점은 고시원에 거주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쉽게 고시원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 물론 고시원으로 들어오기 전 총무의 눈을 피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24시간 총무가 자리를 지키지 않는 한 낯선 침입자들을 모두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도난사고나 성범죄 등 각종 범죄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고시원이란 공간. 서울 구로구의 한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직장인 이모(26·여)씨는 “샤워를 하고 방에 들어왔는데 웬 남자가 침대에 누워 변태스런 행각을 벌여 아연실색한 적이 있다”며 끔찍한 기억을 떠올렸다.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수에 비해 관리자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도 문제점 중 하나. 대부분의 고시원은 24시간 상주하는 한 명의 총무가 전체 건물을 관리한다. 총무가 할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입주자에게 방을 배정해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화장실 청소, 식당에 간단한 반찬을 구비해 두는 일까지 총무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기에 밤낮으로 고시원생들과 낯선 침입자들까지 관리를 해야 하는 중요한 임무까지 모두 1인의 총무가 해야 한다. 고시원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각종 사고를 막기에 관리자가 떠안은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도 고시원이 가진 문제점이다.
법적제재 방법 “없다”
그리고 보증금을 내고 최소한 1년은 사는 여타 월세, 전셋집과 달리 한두 달만 살고 금방 뜰 수 있는 집이란 것도 빈번한 사고에 한몫을 차지한다. 잠시 머물다 가는 장소라는 생각은 입주민들에게 ‘위생적이고 안전하게 방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잊게 한다. 이 때문에 소소한 사고나 화재 등이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고시원이 숙박시설이 아닌 근린생활시설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 고시원이 고시생들의 공부방이 아니라는 것쯤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원룸 등에 비해 방세가 적고 보증금이 없다는 이유로 고시원은 형편이 넉넉지 않은 사람들이 주거공간으로 애용하는 곳으로 변질됐다.
그러나 법적으로 고시원은 숙박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소방시설 설치신고와 사업자등록만 마치면 별다른 제재 없이 영업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안전관리에 소홀할 수밖에 없어 갖가지 참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
이같은 각종 문제점 속에서 벌어진 또 한 번의 참극은 예고된 인재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묻지마 범죄로 다시 불거진 고시원의 위험천만한 이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