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코미디계의 큰 별이 졌다. 마지막까지도 “무대에 다시서고 싶다”는 의지를 불태웠던 ‘비실이’ 배삼룡. 그러나 많은 이들의 사랑과 영원을 뒤로한 채 결국 그는 세상을 떠났다. 고인을 보고 코미디언의 꿈을 키웠던 수많은 후배들은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으며 수많은 굴곡으로 얼룩진 고단한 인생이었지만 마지막 가는 길은 외롭지 않았다. 고 배삼룡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했다.
국민 울리고 웃겼던 배삼룡 지병 이기지 못하고 사망
웃음 뒤에 숨겨진 굴곡진 인생사 국민들 안타깝게 해
‘비실이’ 배삼룡이 향년 84세를 일기로 우리곁을 떠났다. 2007년 천식과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쓰러진 뒤 병원신세를 졌던 배삼룡은 결국 지난달 23일 새벽 1시40분 숨을 거뒀다.
돌이켜보면 단 한순간도 편치 않았던 코미디언 인생을 죽음으로 마감한 고 배삼룡. 수십년간 팬들의 뇌리 속에 비실이로 기억됐던 그는 그야말로 코미디계의 산증인이었다. 지난 1964년 MBC 코미디언으로 데뷔해 영화 ‘요절복통 007’을 비롯해 ‘운수대통’, ‘마음약해서’,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철부지’등의 많은 작품과 각종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와 친숙한 코미디언으로 최고의 웃음을 선사해왔다.
웃음 뒤에 감춰진 눈물
보는 이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던 배삼룡만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추억하는 이들은 적지 않다. 그가 유행시킨 ‘개다리춤’은 지금도 코미디언이라면 섭렵해야 하는 첫 번째 과제로 인식될 정도다. 이처럼 코미디계의 전설로 남아있던 배삼룡이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것은 몇 년 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팬들을 즐겁게 했던 코미디언이 아니었다. 가냘픈 몸을 산소 호스에 의지한 병약한 노인에 불과했다.
지난해에는 밀린 진료비 때문에 법정소송에 휘말려 안타까움을 더하기도 했다. 현대아산병원 측이 지난해 8월 배삼룡의 가족을 상대로 진료비 청구 소송을 제기해 승소해 빚쟁이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이 같은 배삼룡의 기구한 말년은 그의 코미디언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낯선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그의 실제 인생은 브라운관 안의 모습과는 달리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관객을 웃기기 위해 우스꽝스런 분장과 몸짓으로 무대에 섰지만 무대 뒤에서는 남몰래 눈물을 삼켜야 했다. 무대에 서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어머니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 집을 나온 배삼룡은 유랑극단의 밑바닥에서부터 희극인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 후 길고 긴 무명시절을 거쳐 유랑극단의 스타로 선 배우 인생은 TV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1964년, 지상파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시작해 ‘웃으면 복이와요’ ‘쇼반세기’ ‘부부만세’등을 거치며 일약 국민스타로 도약하게 된다. 당시 구봉서, 서영춘과 함께 트로이카 체재를 구축한 배삼룡은 당대 최고의 별로 떠올랐다. 그의 인기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는 ‘배삼룡 납치사건’이다. 1973년 MBC와 TBC가 배삼룡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대낮에 납치극을 벌인 것. 그는 명실 공히 방송가 최고의 블루칩이었다.
이처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배삼룡의 인기도 차츰 식어갔다. 게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5공화국은 그를 ‘저질 코미디언’으로 몰아세웠고 급기야 TV에서 퇴출됐다. 이후 배삼룡은 홀연히 미국으로 잠적해 팬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했다. 사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두 번의 이혼과 사업실패를 겪으며 심신도 지쳐갔다.
그러나 그의 몸속에는 여전히 희극인의 피가 끓고 있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다시 무대에 서기도 했다. 공연 ‘그 시절 그 쑈’, ‘눈물의 여왕’ 등에 출연하며 마지막 남은 코미디언으로서의 열정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지만 변한 세상은 더 이상 그의 코미디에 웃어주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건강도 점차 악화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앓아온 흡인성 폐렴은 결국 그의 말년을 초라하게 만드는 결정타를 제공했다.
그리고 끝내 쓰러져 병실에 입원한 모습으로 팬들에게 돌아오게 된 것. 병실에 누워있으면서도 그는 가정사로 속앓이를 해야 했다. 친아들 배동진 씨와 양아들이자 코미디언 출신 가수인 이정표와의 감정싸움이 표출된 것. 이후 두 사람은 오해를 풀고 화해한 것으로 종지부를 찍었으나 투병중인 아버지를 사이에 둔 이들의 갈등은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마지막 함께한 후배들
투병 중 겪은 또 다른 비운의 가정사는 세 번째 부인에게 이혼소송을 당한 것. 배동진 씨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가 투병중일 때 세 번째 어머니 측에서 이혼을 요구했다. 어머니도 투병 중으로 인지 능력이 거의 없는 상태로 어머니의 오빠가 대리인을 자처해 이혼소송을 제기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건강악화와 소송, 가정불화 등에 휘말리면서 힘든 말년을 보냈던 배삼룡의 마지막은 외롭지 않았다. 지난달 25일 오전 7시40분 엄수된 배삼룡의 발인제에는 150여명의 유가족과 동료, 후배들이 참석해 눈물로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다.
이날 방송인 송해는 배삼룡의 희극 철학을 전하며 고인의 뜻을 기렸다. 송해는 조사를 통해 “가물한 70년대 ‘형님 먼저 아우 먼저’를 회상해본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그 한 구절이 우리를 무척 즐겁게 해줬다. 그런데 형님. 꼭 형님이라고 먼저 가시고 동생이라고 나중에 가야하나. 너무 하신다”고 말했다. 이어 송해는 “전 국민을 즐겁게 하겠다는 높은 결심이 너무 보기 좋았다.
‘비실비실 국민 영웅’ 너무나 듣기 좋은 칭호였다. 내 아픔을 뒤로 하고 서민들에게 웃음을 준 희극 철학을 잊을 수 없다”며 고인의 지난날을 되짚었다. 이어 후배 대표로 나선 코미디언 이용식은 “그동안 지나간 일이 한 편의 필름처럼 지나간다. 하늘나라에 계신 이주일 선생님과 김형곤이 있는 그 곳에서 방송국을 차려서 천국에서 하고 싶은 희극을 계속하라. 편안히 가라”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