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범죄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가운데 피해자 한 명이 목숨을 끊었다. 등록금으로 쓰기 위해 모아둔 돈을 전화 한통으로 날린 여대생이 이를 비관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수년 동안 사라질 줄 모르고 진화를 거듭하던 보이스피싱이 결국 사람까지 잡는 무서운 범죄가 됐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전화사기. 불황 속 서민들을 더욱 떨게 만드는 보이스피싱 범죄를 취재했다.
지난달 31일 오후 3시경, 경남 김해에 살던 A(20·여)씨는 자신의 집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우체국 직원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전화 속 인물은 A씨에게 “발송되지 않은 신용카드가 우체국에 있다. 돈을 송금하면 보안장치를 마련해주겠다”고 말하며 계좌번호를 알려주며 돈을 보내라고 했다.
A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집 인근 금융기관의 현금지급기에서 두 차례에 걸쳐 640여 만원을 계좌 이체했다. A씨가 보낸 돈은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과 어머니에게 맡긴 돈을 합친 것으로 대학교 등록금을 내기 위한 돈이었다.
그러나 곧 자신이 보이스피싱에 낚였다는 것을 알아 차렸고 이날 오후 5시36분경 112신고센터에 피해사실을 신고한 뒤 인근 지구대에서 조사를 받았다.
한순간의 실수로 거액의 돈을 날린 자신을 비관하던 A씨. 할 수만 있다면 전화를 받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A씨는 이날 오후 8시15분경, 집 근처 아파트 15층 복도로 가 투신했다. A씨는 결국 숨을 거뒀다. 20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한 것은 어이없게도 사기전화 한 통이었던 것이다.
A씨가 투신한 아파트 복도에는 ‘사기 피해를 당해 부모님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의 유서가 담긴 손가방이 있어 경찰은 보이스피싱을 비관한 자살인 것으로 사망경위를 보고 있다.
경찰은 전화금융 사기 용의자를 검거하기 위해 해당 현금 지급기의 폐쇄회로(CC)TV에 찍힌 사진을 확보하는 한편 수취계좌 번호와 통화 내역 등을 추적하고 있다.
이처럼 애써 마련한 등록금을 한순간에 사기로 날리게 만들 만큼 보이스피싱 수법은 날로 진화되고 치밀해지고 있다. 몇 년 전 보이스피싱이 세상물정에 어두운 시골노인들이 흔히 당한 범죄였다면 지금은 그 누구라도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교묘한 사기범죄로 발전한 것이다.
그 결과 지난해 접수된 보이스피싱 피해사례가 7만 건이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해 ‘110 정부민원안내 콜센터’에 접수된 보이스피싱 신고 건수가 총 7만7177건이었으며 피해액은 21억9115만원(월평균 1억8000만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보이스피싱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흉흉한 세태를 이용해 가족 또는 친구를 납치했다거나 교통사고가 발생해 돈이 필요하다는 등의 협박으로 통장에 입금을 요구하는 방법이 많이 쓰이고 있다.
정모(45·여)씨는 얼마 전 “당신 딸을 납치해 데리고 있는데 당장 700만원을 입금하지 않으면 딸을 죽일 것”이라는 협박전화를 받고 급히 돈을 송금했다. 돈을 입금한 뒤 딸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정씨는 웃으며 귀가하는 딸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정씨의 딸은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에 갔다가 아무 일 없이 하교한 것.
정씨는 전화사기에 걸려든 것을 깨닫고 경찰에 신고했고 수사 끝에 정씨에게 사기전화를 건 대만인 L씨를 검거했다. 경찰서에서 L씨는 “돈을 찾아 국외로 송금하는 일을 했다”며 “하루에 1억원까지도 인출해 봤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또 다른 유형은 검찰이나 경찰 등 공무원을 사칭해 인적사항, 계좌번호 등을 요구하는 경우다. 주로 ‘사기사건에 당신이 연루됐다’며 인적사항을 요구하거나 어딘가로 통장의 돈을 옮기라는 등의 주문을 하는 수법이다.
대학생 김모(24)씨는 얼마 전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전화 속의 남자는 자신이 형사라고 주장하며 “당신이 사기사건에 연루됐으니 법원에 출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 남자는 “당신의 계좌에 있는 돈이 사기단에 의해 빠져나갈 수도 있다”며 “현금인출기를 이용해 계좌의 돈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주문했다.
전화사기로 등록금 날린 여대생 비관하다 스스로 목숨 끊어
날로 진화하는 보이스피싱 수법에 속수무책 당하는 사람들
뭔가 꺼림칙했지만 돈을 날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김씨는 계좌의 돈을 모두 다른 계좌로 이전하고 환급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돈은 환급되지 않았고 그제야 보이스피싱에 걸려들었음을 알았다. 김씨는 “초기의 멘트와 연결 시스템 등이 워낙 정교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고 토로했다.
뿐만 아니다. 은행, 신용카드사, 금융감독원 등의 직원이라고 사칭한 뒤 카드연체금을 보내라는 사기법, 전화국 직원을 사칭해 연체된 전화요금을 보내라는 사기법, 우체국 직원을 사칭해 택배나 카드발급을 빌미로 돈을 보내라는 사기법 등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같이 다양한 수법으로 벌어지고 있는 전화사기가 쉽게 이뤄지는 요인 중 하나로 발신번호의 조작이 가능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교환기나 소프트웨어 설치로 간단하게 발신자 번호를 조작할 수 있는 것.
특히 휴대폰의 SMS문자 서비스를 이용할 때는 발신번호를 쉽게 바꿀 수 있어 전화사기에 유용하게 이용된다. 그런데 이 같은 행위를 제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이런 허점을 이용해 검찰과 법원 등 국가기관의 전화번호가 발신자번호로 표시되도록 조작해 철저하게 피해자를 속이는 것이다.
이처럼 요리조리 법망을 피해 빈번하게 전화사기가 일어나자 애꿎게 피해를 보는 곳도 있다. 계좌번호나 인적사항이 필요한 공공기관이나 금융기관 등에서 걸려온 전화를 사기전화로 의심하고 정보를 주지 않아 업무에 차질을 빚게 만드는 것이다. 전화사기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자를 양산할 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손실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시간도, 장소도, 대상도 가리지 않고 시시때때로 걸려오는 사기전화. 몇 가지 사전지식만 가지고 있어도 전화사기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
알아 둘 지식으로는 ▲현금인출기를 통해 세금과 보험금을 환급하는 경우는 없다는 점, 수사기관이 전화를 통해 개인의 금융 정보를 파악하는 경우는 없다는 점 ▲가족 납치 및 교통사고 협박의 경우는 당황하지 말고 전화 내용을 메모해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점 ▲공무원을 사칭하는 경우 먼저 해당 기관에 확인해야 한다는 점 등이 있다. 이를 숙지하고 낯선 전화를 대한다면 사기꾼이 아무리 교묘한 말로 접근해도 걸려들 위험성은 줄어들 것이다.
보이스피싱범에 통장 명의 빌려준 20대
통장 6개 빌려줘 전화사기 도와
충북 충주경찰서는 지난 2일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용의자에게 자신 명의의 통장을 만들어 제공한 김모(28)씨를 전자금융거래법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1월30일 경기도 시흥시 농협 지점에서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전화금융사기 용의자에게 자신 명의의 통장 6개와 현금카드를 만들어 준 혐의다. 김씨가 만들어 준 통장 등은 실제 전화금융사기에 사용되면서 박모(67)씨에게 300여 만원의 피해를 입혔다고 경찰은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김씨는 용의자들이 생활정보지에 낸 허위광고에 속아 대출금 담보 명목으로 통장을 발급받아 제공한 것으로 조사됐다”면서 “보이스피싱은 물론 이런 식의 허위광고에도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