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몽키하우스’ 미군 위안부 수용소 (23)기지촌이 발칵 뒤집혔다

2026.04.27 04:29:58 호수 1581호

“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크리스마스 이브엔 온 거리가 흥청망청했던 데 비해 정작 성탄절 당일이 되자 왠지 썰렁한 풍경이었다. 간밤에 진탕 마시고 정욕까지 탕진해서 그런지 몰랐다.

혹은 비밀스런 아름다운 사랑마저도…거리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도 허전해 보였다.

한산한 골목엔 겨울바람만 윙윙 불어대며 흙먼지를 날렸다.

낙엽 여인

하지만 오후가 되자 고요하던 기지촌은 갑자기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살인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블루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텍사스 클럽의 이층 뒷방에 사는 한 양색시가 처참한 꼴로 살해당했다는 얘기였다.

피해 여성의 곱던 얼굴은 마구 얻어맞아 시퍼렇게 멍들고 부어올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쪽 유방이 잘려나간데다 음부엔 콜라병이 깊이 박히고 항문에서 직장까지 우산을 찔러넣었으며, 입에는 성냥개비를 한 움큼 쑤셔넣은 끔찍스런 모습이었다고 목격자들은 질린 목소리로 전했다.

새벽녘에 비명소리를 들었다는 말도 나왔다. 양키 놈의 짓이 분명하다면서 입술을 짓씹으며 울부짖는 여자도 있었다.

“그렇게 착실하고 사근사근하던 애가 뭘 잘못했다고 그토록 비참하게 죽인 거야, 응? 설마하니 좆을 안 빨아 줬다고 그랬을까. 흐흑, 시골 부모 모시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온 심청이 같았던 애가….”

“그 골방에서 무슨 개수작이 있었는지 누가 알겠어. 아무튼 살인자가 잡혀얄 텐데.”

그렇지만 미군 앰뷸런스가 나와 시체를 싣고 간 것으로 끝이었다. 미군 헌병들은 여자들의 탄원과 호소를 보곤 눈살을 찌푸렸을 뿐 별다른 조사를 하지 않았다.

미군들이 감쪽같이 모두 귀대한 후 부대의 철문은 굳게 닫히고 출입금지령이 내렸다.

미군부대는 한국 경찰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설령 살인자라 하더라도 미군 군적을 지닌 자라면 일단 그 속으로 잠입해 버린 이상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치 신성한 솟대의 공간처럼, 범죄자들은 그 속에 숨어 있다가 미국으로 귀대해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한국 정부나 경찰은 자기 나라의 국민이 비참하게 강간 살해당했다 하더라도 미군 측에 맡겨 둘 수밖에 없었다. 그건 소파(SOFA), 즉 한미주둔군지위협정 때문이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선 아무런 보도도 없었고, 다음날 배달된 신문 한구석의 ‘휴지통’란에 짧은 가십성 기사로 요리돼 나와 있을 뿐이었다.

설움을 참지 못한 여인들이 철문을 잡고 흔들며 울부짖었지만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발만 더욱 짙어질 뿐 묵묵부답이었다.

(*1992년 10월 28일 동두천시 보산동에 있는 미군전용클럽 종업원이던 윤금이 씨가 피살되었다. 이 사건으로 미군 범죄의 심각성이 전국적으로 인식되었다. 범행 자체로도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지만, 범행 미군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보여진 한미관계의 불평등으로 인해 더욱 분노했다. 동두천 시민사회단체들은 대책위를 꾸려 투쟁했으며 ‘미군 손님 안 받기 운동’ 등이 이어졌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섣달 그믐날 밤, 클럽 일을 마친 청운은 피에로와 함께 백발 할매가 하는 희망집에 들렀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인데 낡은 판잣집 안엔 여자들이 삐걱거리는 의자에 걸터앉아 칼국수를 홀짝대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둘은 구석쪽에 자리잡았다.

“죽은 년만 억울하지 뭐, 살인자는 이미 아메리카로 날아 버렸을걸, 늘 그랬듯이.”

“언니야, 그래도 우리나라가 있는데 흉악한 살인범을 그냥 두겠어?”

“호호호. 요 계집얘야, 넌 신삥이라 잘 모를 거야. 미군 놈이 설령 살인마에 강도에 성폭행범이라 하더라도…한국 경찰과 군인은 절대루 잡을 수가 없어. 소파인지 뭔지 한미동맹 협정을 그렇게 해놨기 땜에 설령 우리나라 대통령이나 장관도 멍하니 닭 쫓던 개처럼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지.”

“히히, 설마 그럴려구?”

“아니, 이년이! 맛있는 칼국수 사줬더니 잘 처먹으면서 말은 개좆겉이 희뜹게 하구 앉았네. 앞으로 니가 좀더 실제적으루다가 경험을 해봐야 요지경 속을 알 거야.”

텍사스 클럽 이층 뒷방
한국 여성 처참히 살해

“언니야가 너무 과민반응 하는 거 아냐? 난 미국 사람들 좋던걸.”

“이 쌍년이 지금…같은 똥갈보가 죽었는데도, 넌 마치 갈보가 아니라 마치 꿈속의 공주인 양 지껄이는구나. 미친년 같으니!”

“언니야, 칼국수 한 그릇 사주면서 너무하네. 난 미친년이 아냐!”

“이년아, 미친년에 그런 년만 있다더냐? 너같이 혼을 빼놓고 미국놈 좆 빠는 게 미친년이지.”

“언니 정말 너무해. 위로는 못해줄망정.”

어린 여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

“야 이년들아, 다 처먹었으면 지랄 떨지 말고 어서 가서 엎어져 자든지, 한 놈이라도 잡을 궁리나 해!”

갑자기 백발 할매가 창구로 얼굴을 내밀곤 소리쳤다.

“누님, 제가 동생 데리고 왔어요. 누님, 모든 사람마다 숨 횟수가 정해져 있대요. 예를 들어 나는 10억 번, 청운이 동생은 15억 번, 누님은 20억 번 식으로요. 하지만 누님은 우리보다 숨을 더 많이 쉬셨으니 이제 5억 번밖에 남아 있지 않는지도 몰라요. 헤헤, 그러니까 괜히 욕하느라 숨쉬지 말고 어서 뭔가 맛있는 걸 주세요.”

피에로가 헤롱거리며 말했다.

“욘석아, 흰소리 작작 늘어놔! 타고난 제 숨 쉬고 나서 죽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목숨 값이 가랑잎보다 못한데 뭘 처먹을래?”

백발 노파는 한숨을 휘유 하고 쉬었다.

“칼국수에 쐬주도 한 병 줘요.”

“코끝이 발그레한데 또 마셔?”

“오늘 같은 날 한잔 안 하구 뭘 해요, 누님 우리가 외로운 누님과 망년회를 하려고 이렇게 왔잖아요.”

“난 세월 다 잊었다.”

국민들 분노

한마디 던지곤 주방으로 들어갔다. 음식이 나왔을 때는 수다를 떨던 여자들도 슬슬 다 빠져나가 버리고 두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청운은 우선 다대기를 떠 넣고 저은 후 두 손으로 그릇을 모아 들곤 칼국수 국물을 후루룩 들이켰다. 겉으론 비록 평범한 싸구려 칼국수처럼 보였지만 그 맛은 그윽했다.

그동안 몇 번 와서 먹었지만 허기뿐만 아니라 속을 은근히 풀어 주는 감칠맛은 늘 다름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저작권자 ©일요시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Copyright ©일요시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