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만들 수 있는데도 만들지 않는 정치가 있다. 지금 민생회복지원금이 그렇다. 과거에는 법으로 밀어붙였고, 지금은 예산으로 풀고 있다. 같은 정책인데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 변화는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권력의 위치가 바뀌면서 정치의 작동 방식 자체가 바뀌었다는 신호다.
2024년 8월2일,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위한 특별조치법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발의한 이 법은 전 국민에게 25만원에서 35만원의 지역화폐를 지급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고물가로 위축된 소비를 살리고 소상공인을 지원하겠다는 목적도 분명했다.
그러나 8월13일, 당시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이 행사되면서 상황은 뒤집혔다. 그리고 9월26일, 국회 재표결에서 법안은 최종 부결됐다. 이 사건은 정치권에 분명한 교훈을 남겼다. 법은 통과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민주당은 야당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특별조치법’이라는 방식이었다. 이 법은 본질적으로 1회성이다. 반복을 전제로 한 제도가 아니라, 특정 시기 위기를 넘기기 위한 단발 대응이다. 야당 입장에서는 지속 가능한 제도를 설계할 수 있는 권한보다, 일단 한번이라도 실행시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한번을 위한 법’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 한번조차 실행되지 못했다. 대통령 거부권 앞에서 법은 멈췄고, 정책은 현실로 내려오지 못했다.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 법을 발의했던 인물이 이제 대통령이 됐다. 거부권이라는 변수는 사실상 사라졌다. 같은 법을 다시 만들면 이번에는 통과와 집행이 모두 가능하다. 조건은 오히려 더 좋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지금은 야당의 정치가 아니라 집권의 정치다. 야당일 때는 ‘한번이라도 실행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1회성 특별법이 필요했다. 그러나 집권 이후에는 다르다. 정책을 반복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위치다. 그때마다 특별조치법을 만드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오히려 예산을 통해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추가경정예산이다. 법은 기준을 만들지만, 예산은 결과를 만든다. 법은 충돌을 부르고 시간이 걸리지만, 예산은 통과되는 순간 바로 집행된다. 지금 정치가 선택한 것은 명확하다. 입법의 완성도가 아니라 실행의 속도다. 국민이 체감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지급이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또 하나의 변화를 만들었다. 1차, 2차 민생지원금 당시까지만 해도 “포퓰리즘”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3차는 다르다. 반대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일부 비판은 존재하지만, 정책 자체를 부정하는 수준은 아니다. 구조적 반대가 기술적 논쟁으로 축소됐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대통령 지지율도 한몫 했다. 현재 대통령 지지율은 60%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환경이다. 경제 불확실성과 글로벌 긴장, 그리고 중동의 이란 사태까지 겹친 상황이다. 통상적으로 이런 환경에서는 지지율이 흔들린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다. 상황은 좋지 않은데 지지율은 높다. 이 역설이 지금 정치의 구조를 설명한다.
결국 남는 것은 신뢰다. 국민은 지금 상황을 ‘정부의 실패’로 해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서도 버티고 있다’는 서사로 받아들인다. 이 구조에서는 정책이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의 연장선에서 작동한다. 민생지원금이 조용히 받아들여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야 지지율 격차도 이 흐름을 반영한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격차는 30%p에 달한다. 이는 단순한 우열이 아니라 구조적 격차다. 정치적 에너지가 정당이 아니라 대통령 개인에게 집중되는 구조다. 이 구조에서는 정책 저항이 약해지고, 정책 수용성은 높아진다.
결국 지금 우리는 하나의 전환을 보고 있다. 1회성 특별법의 정치에서, 반복 가능한 예산의 정치로 이동하고 있다. 야당일 때는 법이 필요했고, 집권 이후에는 예산이 필요해졌다. 같은 정책이지만, 권력의 위치에 따라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이 변화에는 분명한 양면성이 있다. 속도는 체감을 만들지만, 깊이를 약하게 만든다. 법을 통한 논쟁과 조정이 줄어들면 정책은 빨라지지만, 검증은 약해진다. 조용한 정치는 안정일 수도 있지만, 견제의 부재일 수도 있다.
민생회복지원금은 단순한 재정 정책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 방식의 변화다. 1회성 특별조치법에서 추경으로, 정치가 선택한 길은 원칙이 아니라 실행이다. 법은 막힐 수 있지만, 돈은 막히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가 법을 버렸다.
여기서 한가지 경고를 남겨야 한다. 과거 여소야대 상황에서 윤석열정부는 필요한 법안이 국회에서 번번이 막히자 시행령을 통해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시행령 정부’라는 비판을 받았다. 입법을 우회한 행정의 확대였다.
지금은 반대의 조건이다. 여대야소의 이재명정부는 법을 만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입법으로 풀어야 할 사안까지 반복적으로 추경으로 처리하기 시작한다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입법의 역할이 약화되고, 정치가 예산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추경 정부’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상황에 따라 방식을 바꾼다. 그러나 방식이 반복되면 그것은 전략이 아니라 구조가 된다. 시행령이 구조가 되면 행정이 비대해지고, 추경이 구조가 되면 입법이 약해진다. 지금 우리는 ‘법의 정치’를 지나 ‘예산의 정치’로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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