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실버존 없는 고령사회

2026.04.02 08:38:46 호수 0호

보호 기준은 아직도 과거

대한민국은 이미 ‘초고령사회’의 문턱에 서 있다. 노인은 빠르게 늘고, 어린이는 빠르게 줄고 있다. 그러나 도로 위의 질서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보호의 기준이 인구 구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미래에 들어와 있지만, 제도는 바뀌지 않고 있다.

이 괴리는 도로 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어린이를 보호하는 정책은 정교하게 설계돼있다. 초등학교 주변에는 어김없이 어린이보호구역, 이른바 스쿨존이 존재한다. 제한속도, 단속 카메라, 과태료 강화까지 체계가 촘촘히 갖춰져 있다. 사회적 합의도 분명하다. 어린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춰버린다는 점이다. 보호의 기준이 특정 연령에서 끊겨버렸다.

노인들도 보호 대상인데 현실은 정반대다. 이들은 신체 반응 속도가 느리고, 시야도 좁은 데다 순간적인 판단 시간도 길다. 도로 환경에 가장 취약한 집단인 셈이다. 실제 교통사고 통계에서도 노인 사망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보호구역(실버존)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보호가 가장 필요한 곳에 제도가 없다.

즉 우리나라 도로에는 ‘보호의 불균형’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다. 어린이를 위한 구역은 촘촘하게 존재하지만, 노인을 위한 구역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일부 지역에 ‘실버존’이 지정돼있지만, 상징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법적 기준도, 전국적 체계도 부족하다. 존재는 하지만 작동하지 않는 제도, 이것이 현재의 실버존이다.

경로당 주변은 하루 중 가장 많은 노인이 오가는 공간이지만, 이 주변 도로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속도는 그대로이고, 운전자 행동도 달라지지 않는다. 표지판 하나 없이 방치된 경우도 많다. 어린이가 다니는 길에는 온갖 장치가 설치되는데, 노인이 모이는 길은 그렇지 않다.

농촌 지역은 더 심각하다. 노인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시골 마을인데도 도로에는 보호 개념 자체가 희박하다. 보행로가 없는 경우도 많고, 차량과 사람이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이곳에서 사고가 나면 피해는 더 크다. 그러나 정책의 관심은 도시 중심, 학교 중심에 머물러 있다. 고령사회의 핵심 공간이 정책 밖에 놓여 있다.

문제는 단순한 예산이 아닌 기준의 문제다. 우리는 ‘누구를 우선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제대로 설정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어린이가 많았고, 그래서 스쿨존이 확대됐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인구 구조가 바뀌었는데, 보호의 구조는 그대로다. 정책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면, 그것은 실패다.

스쿨존과 실버존의 차이는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설계 철학의 차이다. 스쿨존은 ‘예방’을 중심으로 설계돼있어 사고가 나기 전에 막는 구조다. 반면 실버존은 ‘사후 대응’ 수준에 머물러 있다. 사고가 나야 문제로 인식되는데, 이 차이가 결국 생명과 직결된다. 예방 없는 보호는 보호가 아니다.

이제는 ‘왜 실버존이 부족한가가 아니라, 왜 지금까지 확대되지 않았는가’로 질문을 바꿔야 한다. 답은 명확하다. 정치적 우선순위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어린이 보호는 사회적 공감이 크고, 정책 효과도 눈에 보인다. 반면 노인 보호는 조용하다. 목소리가 작고, 이슈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뒤로 밀린다.

그러나 국가는 ‘목소리의 크기’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닌 ‘위험의 크기’로 움직여야 한다. 지금 가장 위험한 집단은 누구인가. 데이터는 이미 답을 주고 있다. 노인 교통사고 사망률은 다른 연령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은 여전히 과거 기준에 묶여 있다. 이것은 정책의 지연이 아니라 방치다.

실버존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것도 상징이 아니라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 경로당, 노인복지시설, 전통시장, 농촌 마을 중심 도로까지 포함하는 전국적 기준이 필요하다. 속도 제한, 단속 강화, 물리적 장치 설치까지 스쿨존 수준의 체계를 갖춰야 한다.

여기서 정부의 역할이 분명해진다. 행정지침 수준이 아니라 국가 기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국토교통부와 경찰청이 통합 기준을 만들고, 전국 어디서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실버존 설계 원칙을 제시해야 한다. 지역에 맡겨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책임져야 할 안전 영역이다.

국회 역시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 지금 국회는 정쟁과 권력 다툼과 관련된 법안에는 놀라운 속도를 보인다. 그러나 정작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법안에는 그만한 속도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다. 무엇을 먼저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의 우선순위 문제다.

이제 국회는 답해야 한다. 정권을 둘러싼 싸움의 법이 아니라,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법을 먼저 만들 의지가 있는가. 실버존을 의무화하고, 기준을 법으로 명확히 하고, 전국 단위로 강제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다.

고령사회는 단순한 인구 변화가 아니다. 국가 운영 방식 전체를 재설계해야 한다. 의료, 복지, 노동뿐 아니라 도로와 교통도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많은 영역에서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노인 안전’에서는 여전히 뒤처져 있다.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다.

도로 위의 질서는 국가의 철학을 보여준다. 누구를 먼저 멈추게 하는가, 누구를 위해 속도를 줄이는가. 그 기준이 바로 국가의 방향이다. 지금 우리는 어린이 앞에서는 멈추지만, 노인 앞에서는 그대로 달리고 있다. 이 모순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이제 바꿔야 한다. 실버존을 늘리는 차원을 넘어, 보호의 기준 자체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고령사회에 맞는 도로, 고령사회에 맞는 속도, 고령사회에 맞는 법. 정부는 기준을 만들고, 국회는 그것을 법으로 완성해야 한다. 스쿨존이 국가의 과거를 보여줬다면, 실버존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

지난 31일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서울시장 경선후보 1차 토론회를 가졌다. 그러나 사회자의 공통 질문이나 후보 간 주도권 토론에서 고령사회 문제는 단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직면한 현실이 토론 의제에서 빠져 있어 안타까웠다. 2차 토론회부터는 고령사회 문제, 실버존 문제도 전면에 올라오길 바란다.

<skkim59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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