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소송서 지지 않는 나라가 국부 지킨다

2026.03.17 09:42:42 호수 0호

쉰들러·엘리엇·론스타 승소가 보여준 법률 국가 경쟁력

국가 경쟁력은 산업이나 군사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글로벌 경제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경쟁 무대가 있다. 바로 국제 소송이다.



다국적 기업과 글로벌 금융자본은 투자 분쟁이 발생하면 국제중재와 소송을 통해 국가를 상대로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한다. 실제로 여러 나라가 이런 소송에서 패소하며 수천억원에서 수조원에 이르는 국부를 잃어왔다. 그래서 현대 국가 경쟁력에는 법률 대응 능력, 즉 소송에서 국익을 지켜내는 힘이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최근 한국 정부가 ISDS(국제 투자 분쟁)에서 연이어 승소했다는 소식은 이런 의미에서 단순한 법률 뉴스가 아니다. 스위스 승강기 기업 쉰들러와의 소송,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와의 취소 소송, 그리고 오랜 기간 이어졌던 론스타 사건에서 연이어 유리한 결과를 얻으면서 국제 분쟁 대응 능력이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국제 투자 분쟁에서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던 한국이 이제는 소송에서도 국익을 지켜내는 국가로 변하고 있다는 신호다.

가장 최근의 사건은 쉰들러 ISDS 소송 승소다. 스위스에 본사를 둔 글로벌 승강기 기업 쉰들러는 과거 현대엘리베이터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금융 당국의 규제 조치로 손해를 입었다며 2018년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제중재를 제기했다. 청구 금액은 무려 약 3200억원이었다.

PCA(국제상설중재재판소)는 지난 14일 한국 정부의 조치가 정당한 규제 권한 범위 안에서 이뤄진 합법적 행위라고 판단하며 쉰들러의 청구를 전부 기각했다. 단순히 배상 책임을 면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정부가 방어 과정에서 사용한 소송 비용 약 96억원까지 쉰들러가 부담하라는 판정도 내려졌다. 완벽한 100% 승소였다.


두 번째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 사건이다. 엘리엇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해 자신들에게 손해를 입혔다며 정부를 상대로 국제중재를 제기해 약 1조원 규모의 배상금을 요구했다

 PCA는 초기 중재 판정에서 한국 정부가 약 1600억원을 배상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후 우리 정부는 취소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지난 2월 주요 판단이 뒤집히며 약 1600억원 규모의 배상 부담을 방어했다. 국제중재 판정이 뒤집히는 경우는 드물다는 점에서 이 결과는 한국 정부의 법률 대응 능력이 크게 강화됐음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세 번째는 가장 길고 복잡했던 론스타 사건이다.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는 외환은행 매각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며 국제중재를 제기했고, 이 사건은 10년이 넘는 국제 분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약 4000억원 규모의 배상금과 이자 부담이 전액 취소되는 결정이 내려졌다. 여기에 더해 취소 소송 과정에서 발생한 소송 비용 약 73억원을 론스타가 지급하라는 판정까지 나오면서 사실상 한국 정부의 완승으로 평가됐다.

세 사건을 합치면 의미는 더 분명해진다. 쉰들러 사건에서 3200억원, 엘리엇 사건에서 약 1600억원, 론스타 사건에서 약 4000억원 규모의 배상 부담이 사라졌다. 단순 계산만 해도 약 8800억원 이상의 국부 유출을 막아낸 셈이다. 여기에 소송 비용 환수까지 더하면 실제 경제적 효과는 그보다 더 크다.

국제 소송에서 승패는 단순한 법률 문제를 넘어 국가 재정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이 같은 결과는 결코 작은 의미가 아니다.

이번 연속 승소의 가장 큰 원인은 전략적 대응 체계의 변화다. 과거에는 국제 투자 분쟁이 발생하면 대응이 늦거나 전략이 일관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국제중재 전문 인력과 글로벌 로펌이 체계적으로 협력하면서 대응 구조가 크게 개선됐다.

사건 초기부터 국가 규제 권한의 정당성을 명확히 정리하고 국제법 논리를 체계적으로 구축한 것이 승소의 핵심 요인으로 평가된다.

또 하나의 강점은 규제 정당성 논리의 확립이다. 국제 투자 분쟁에서 핵심 쟁점은 국가의 정책이나 규제가 투자자 권리를 침해했는지 여부다. 이번 사건들에서 중재 재판부는 한국 정부의 조치가 공익을 위한 합법적 규제 권한 범위에 속한다고 판단했다.

즉 투자자 보호와 국가 규제 권한 사이의 균형에서 한국 정부의 정책이 정당성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로 향후 다른 국제 분쟁에서도 중요한 선례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한국이 항상 국제 소송에서 강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론스타 초기 중재 판정이다. 당시 일부 배상 판정이 내려지면서 국제 사회에서는 한국이 투자 분쟁 대응 경험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나왔다. 또 다른 사례로는 다야니(Dayyani) 사건이 있다.

이란 투자자가 한국 기업 인수 과정에서 손해를 입었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한국 정부는 약 730억원 규모의 배상 판정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패배 이후의 변화였다. 정부는 이후 국제 투자 분쟁 대응 체계를 전면적으로 재정비했다. 전문 인력을 확대하고 국제중재 경험을 축적하며 대응 전략을 체계화했다. 그 결과 최근 사건들에서는 오히려 상대 기업의 주장 구조를 무너뜨리는 공격적인 대응이 가능해졌다.

과거의 경험이 오히려 지금의 승리를 만든 셈이다.

국가 경쟁력의 관점에서 보면 이번 승리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글로벌 기업과 금융자본은 투자뿐 아니라 소송을 통해서도 이익을 추구한다. 따라서 국가가 법률적으로 취약하면 정책 결정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 규제하면 소송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판정들은 한국이 정당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경제학의 고전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국가의 부가 생산과 시장 활동에서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글로벌 경제에서는 새로운 요소가 등장했다. 국가가 국제 소송에서 국익을 지켜내는 능력이다. 만약 소송에서 패소해 수천억원이 해외로 빠져나간다면 그것 역시 국부의 손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국부론에는 ‘소송에서 지지 않는 국가’라는 요소도 포함돼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계는 지금 보이지 않는 법률 경쟁을 벌이고 있다. 무역 분쟁, 투자 분쟁, 규제 분쟁이 모두 국제 법정에서 다뤄진다. 이 싸움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에 따라 국가의 재정과 정책 공간이 달라진다. 군사력과 경제력만큼이나 법률 역량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 요소가 되는 시대다.


쉰들러, 엘리엇, 론스타 사건에서의 연속 승리는 한국이 이제 그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는 나라가 됐음을 보여준다. 한때 국제 소송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던 국가가 이제는 국익을 지키는 법률 강국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 경쟁력의 새로운 영역이 조용히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수천억원의 국부를 지켜낸 판결문 속에서 이미 확인되고 있다.

국가는 산업뿐 아니라 법정에서도 국부를 지켜야 한다. 국제 소송에서 지지 않는 나라만이 정책을 지킬 수 있고 국부를 지킬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법률 전쟁에서 이기는 힘이 새로운 국가 경쟁력이다.

<skkim59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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