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한국 영화계에서 ‘이야기 잘하는 감독’으로 평가받는 장항준 감독이 ‘천만 감독’이 됐다. 신작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개봉 한 달 만에 누적 관객 1200만명을 돌파한 것이다.
올해 첫 1000만 관객을 넘은 영화가 탄생했다. 이번 흥행은 단순한 숫자를 넘어 침체된 한국 영화 시장에 의미 있는 신호로 해석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프랜차이즈 영화가 아닌 정통 사극 드라마가 천만 관객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극장가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25년 만에
기적 흥행
장 감독은 1969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예술전문대학 연극과를 졸업한 뒤 방송 작가와 연출을 거치며 영화계에 입문한 인물이다. 2002년 영화 <라이터를 켜라>로 감독 데뷔를 한 이후 <불어라 봄바람> <기억의 밤> <리바운드>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선보이며 독특한 연출 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의 이력은 일반적인 영화감독과 다소 다르다. 학창 시절에는 특별히 공부에 흥미가 없었지만, 이야기와 설정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뛰어나 주변 친구들에게 영화 줄거리를 만들어 들려주곤 했다. 온라인에 게시된 장 감독의 고등학교 시절 일화도 눈길을 끈다.
지난 18일 온라인상에는 ‘장항준 고등학교 동창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눈길을 끌었다. 자신을 장 감독의 동창이라 소개한 작성자는 “항준이는 고등학교 때도 범상치 않은 괴짜였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이어 “혼자 흰 머리띠에 ‘필승’이라는 글자를 비장하게 동여매고 공부하는 척하더니, 알고 보니 머리띠 뒤로 만화책을 숨겨보고 있더라”는 유쾌한 폭로를 덧붙여 폭소를 자아냈다.
해당 글을 접한 누리꾼들은 “역시 장항준, 떡잎부터 시트콤 캐릭터였다” “선생님들도 어이없어서 허허 웃으셨을 듯” “사람이 어쩜 저렇게 한결같냐” 등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학창시절을 마친 장 감독은 방송국에서 막내 작가로 일하며 방송 제작 현장을 경험했고, 시나리오 작업을 계기로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장 감독은 영화뿐 아니라 예능과 방송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대중적 친밀도를 쌓았다.
<접속! 무비월드> <알쓸범잡>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특유의 유머와 이야기 전달 능력을 선보이며 ‘영화감독이면서 동시에 이야기꾼’이라는 독특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또 그는 <시그널> <킹덤> 등을 집필한 유명 드라마 작가 김은희와 부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98년 김 작가와 결혼해 슬하에 딸 한 명을 두고 있다. 20대 시절 사수와 부사수로 만나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연예계 대표 잉꼬부부로 통한다. 두 사람은 창작 활동과 방송에서 서로를 언급하며 유쾌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1000만 관객 넘은 이야기꾼 감독의 진화
침체된 한국 영화 시장에 의미 있는 신호
장 감독은 평소 방송을 통해 아내 김 작가와의 결혼을 인생의 ‘신의 한 수’라 표현하며, 아내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외조를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과 유머 감각으로 ‘신이 내린 꿀팔자’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는, 이번 영화의 흥행으로 감독으로서의 저력까지 입증하며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장 감독을 다시 화제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작품이 바로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다. 이 영화는 조선 제6대 왕 단종이 폐위된 뒤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 마지막 시기를 소재로 삼은 사극이다. 작품은 어린 왕 단종과 마을 촌장 엄흥도의 관계를 중심으로 인간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며 역사적 비극을 따뜻한 휴머니즘으로 재해석했다.
영화는 개봉 이후 놀라운 속도로 관객을 끌어모았다. 개봉 5일 만에 100만명을 돌파했고, 12일째 200만, 27일째 900만명을 넘기는 등 빠른 흥행 곡선을 기록했다. 특히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무해한 영화’라는 입소문이 확산되며 세대를 아우르는 관객층을 확보한 것이 흥행 요인으로 꼽힌다.
흥행의 여파는 문화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영화 속 배경이 된 단종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조선왕조실록’ 관련 서적 판매가 증가하는 등 역사 콘텐츠 소비에도 영향을 미쳤다. ‘왕사남’ 흥행 돌풍은 출판 시장과 관광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천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면서 극 중 단종의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관련 역사서 판매와 유배지 방문객도 함께 늘어나는 모습이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영화 왕사남이 개봉한 지난달 4일부터 이달 2일까지 약 한 달 동안 ‘조선왕조실록’을 키워드로 한 도서 판매량은 개봉 이전 기간보다 2.9배 증가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도 2.1배 늘어 영화 흥행이 독서 수요로 이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역사적 비극
휴머니즘으로
판매 상위권에는 대중 역사서가 이름을 올렸다.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왕이 들려주는 조선왕조실록> 등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여러 권으로 구성된 이덕일의 <조선왕조실록> 시리즈 가운데서는 세종 문종 단종’편이 특히 주목받았다.
단종을 주인공으로 한 고전소설 <단종애사>도 재조명받고 있다. 이광수가 1928년부터 1929년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작품으로, 작가 사후 70년이 지나 저작권이 소멸된 상태다.
영화 개봉 이후 출판사 새움이 새 판을 선보였고 열림원과 더스토리도 출간을 앞두고 예약 판매를 진행 중이다. 먼저 나온 새움판 <단종애사>는 지난 3일 기준 교보문고 소설 부문 일간 베스트 22위에 오르며 전날보다 무려 14계단이나 상승했다.
영화 인기는 관광지에도 영향을 미쳤다. 강원 영월군에 따르면 삼일절 연휴였던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2일까지 사흘 동안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와 장릉을 찾은 관람객은 총 2만6399명으로 집계됐다.
설 연휴 방문객까지 합치면 올해 들어 두 곳을 찾은 인원은 4만4315명에 달한다. 이는 지난해 연간 방문객 26만3327명의 약 34% 수준이다. 특히 청령포 방문객 비중이 전체의 약 60%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영월군은 최근 영화 <왕사남>의 주요 배경으로 청령포가 등장한 영향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왕사남>은 폐위된 단종 이홍위(박지훈)가 영월 유배지 청령포에서 촌장 엄흥도(유해진)와 마을 사람들을 만나 교감하며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2024년 <파묘> <범죄도시4> 이후 약 2년 만에 국내 영화 천만 관객 기록을 갈아 치웠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장 감독 특유의 유쾌한 이미지가 영화 홍보와 맞물려 흥행을 가속화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과거 라디오 방송에서 “천만이 되면 개명과 성형을 하겠다”고 농담 섞인 공약을 내걸었는데, 영화가 실제로 천만 관객을 눈앞에 두자 이 발언이 다시 화제가 되며 온라인에서 화제를 모았다.
장 감독이 영화 <왕사남> 개봉을 앞두고 농담처럼 내걸었던 성형, 개명 등 ‘천만 공약’의 이행 여부가 또 다른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영화 흥행을 바라며 우스갯소리로 던진 공약이지만, 왕사남이 실제로 천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면서 장 감독은 급히 타개책을 찾았다.
허무맹랑한 공약은 없던 일로 하고, 대신 관객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소소한 이벤트를 연다.
유쾌하게
영화 홍보
지난 5일 배급사 쇼박스는 장 감독이 오는 12일 정오에 서울시 중구 서울신문사 광장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커피차 이벤트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장 감독이 직접 참석해 시민들과 소통하는 시간도 마련할 예정이다.
장 감독은 전날 SBS 파워FM <배성재의 텐>에 출연해 커피차 이벤트를 추진하게 된 배경을 소개하기도 했다. 장 감독은 “우리끼리 얘기지만, 뱉은 말을 어떻게 다 지키고 삽니까”라며 "“웃자고 한 얘기였고, 제가 대안으로 시내에서 시민들을 위해 커피차 이벤트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함께 출연한 <왕사남> 제작사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장원석 대표도 “(천만 관객은) 정말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웃자고 한 얘기지, 조금이라도 달성 가능성이 있었다면 맨정신에 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수습했다. 장 감독은 영화 개봉 직전인 지난달 1일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 <왕사남> 천만 관객 돌파 시 성형과 개명, 귀화, 요트 선상 파티 등을 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한편, 한국 영화 산업 측면에서도 이번 흥행은 의미가 크다. 최근 몇 년간 극장 관객 감소와 콘텐츠 소비 변화로 인해 한국 영화계는 침체를 겪어 왔다. <왕사남>의 이런 성과는 최근 영화 흥행의 흐름이 된 입소문과 뒷심이 가장 극적으로 작동한 결과라 눈길을 끈다.
지난달 4일 개봉 직전 예매자는 15만4000여명으로 높지 않았고, 첫날 관객 수도 12만명을 밑돌아 우려를 자아냈다.
하지만 SNS에서 호평이 늘면서 개봉 2주차 주말에 관객이 더 많아졌고, 설 연휴에 경쟁작 <휴민트>를 따돌리면서 본격적인 흥행 가도에 올랐다. 개봉 4주차인 삼일절 휴일에는 하루 관객 80만명을 넘기며 개봉 이후 최고 관객 수를 찍었다. 역주행 영화는 많지만 개봉 4주차에 최고 관객 수를 기록하는 건 유례가 드물다.
무해한 영화 평가 ‘왕사남’ 열풍
‘김은희 남편’ 수식어 “이젠 안녕”
영화가 처음 공개됐을 때 만듦새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았다. 극 초반의 작위적인 이야기 전개와 어설픈 컴퓨터그래픽 등이 지적받았다. 그럼에도 관객들의 지지가 확산된 데는 조선에서 가장 비운의 왕으로 꼽히는 단종의 실화와 역사의 이면에서 찾아낸 엄흥도라는 인물의 존재가 현재적 의미로 다가왔다는 분석이다.
역사학자인 심용환 역사엔(N)교육연구소장은 “단종의 죽음은 조선 전기에는 금기로 취급되다가 후기에 이르면서 복권되고 엄흥도라는 인물이 부상하는 등 조선시대 이래로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의 소재가 되어왔다”며 “영화는 왕의 비극에 머물지 않고 엄흥도로 상징되는 평범한 사람의 시선에서 슬픔과 용기를 그려내며 내란 사태로 민주공화국의 정당성이라는 문제에 부딪혔던 한국 사회의 분위기나 한국인들의 지친 마음에 더 크게 다가온 측면이 있다”고 짚었다.

홍수정 영화평론가는 이 영화처럼 비극의 정치사를 다룬 <서울의 봄>에 대한 대중의 호응에 주목하면서 “두 영화는 역사의 현장으로 거슬러 올라가 비극을 막아보려는 인물을 그리면서 숨겨진 욕망을 건드린다”며 “<왕과 사는 남자>는 과거 자신이 지지하는 통치자를 지키지 못했다는 대중의 무의식 속 좌절감에 감응한다”고 말했다.
<왕사남>의 손익분기점은 260만명, 순제작비는 100억원가량으로, 제작비가 많이 드는 사극 장르라는 점을 고려하면 크지 않은 규모의 영화다. 볼거리도 화려하지 않고 이야기도 복잡하지 않다. 제작비 200억~300억원대의 대작 장르물이 실패를 거듭하는 최근 극장가에서 지난해 최고 흥행작 ‘좀비딸’과 함께 중급 영화 제작 활성화의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올해 초 순제작비 30억원대의 중저예산 멜로영화 <만약에 우리>에 이어 <왕사남>을 잇따라 성공시킨 투자배급사 쇼박스의 조수빈 홍보팀장은 “자극성이 강한 장르물이 주류를 이루는 오티티(OTT) 시리즈와 달리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영화에 대한 요구들이 있는 것 같다”며 “<파묘> <좀비딸> 등 최근 흥행작들을 보면 강력한 서사의 힘 못지않게 캐릭터 간의 밀도 있는 관계성이 중요한 관람 포인트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종 스코어
어디까지?
이 영화의 최종 스코어가 어디까지 이를지도 관심사다. 영화 산업 침체로 3~4월 한국 영화 경쟁작이 없어 <왕사남>의 독주는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장 감독은 데뷔 이후 코미디, 스릴러, 스포츠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성과 이야기성’을 동시에 추구해온 감독이다. 그리고 지금, 그의 이름 앞에는 또 하나의 기록이 추가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