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자 다른 마을이 나왔다. 피에로는 한 골목 속으로 접어들었다. 좁은 길 양쪽으로 시멘트 벽에 함석지붕을 얹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조그마한 흐린 창문엔 왠지 의심쩍게 모두 견고한 쇠창살이 달려 있었다.
길바닥엔 녹슨 깡통이나 빈 담뱃갑 그리고 깨어진 술병 조각 따위가 나뒹굴었다. 그 위엔 하얀 눈송이도 내려앉자마자 곧 사그라져 버렸다.
미국 노래
좀더 가자 낡아빠진 기와지붕을 인 작은 한옥이 나왔다. 담벽 너머로 마당이 훤히 보였다. 우물가에 여자들 몇이 쭈그러 앉아 머리를 감거나 손빨래를 하며 시시덕거렸다.
한 여자가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설거지통에 쏟아 붓자 그릇이며 유리잔 따위가 부딪혀 쟁그라운 소리를 냈다.
이마나 어깨에 내려앉는 눈송이를 먼지인 양 털어내는 하얀 손도 보였다. 문간방에서는 얼굴이 작고 창백한 한 여자가 문을 열어 놓은 채 엎드려 하늘을 쳐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방 한켠에 놓인 옷장과 화장대 따위가 얼핏 바라다 보였다. 전축에서 잡음이 섞인 멜랑콜리한 곡조의 미국 노래가 흘러나왔다.
피에로가 휘파람으로 그 곡을 따라 불자 담배 피던 여자는 멀뚱히 쳐다보며 동그란 연기를 만들어 띄어 보냈고, 다른 여자들은 담벼락 위로 얼굴만 쑥 드러난 희극적인 그의 표정을 향해 깔깔댔다.
“헤이, 짝퉁 채플린, 찬밥이라도 한술 뜨고 가.”
“헤헤, 내일 구수한 된장찌개 끓여 주면 얼음밥이라도 구수히 먹지롱.”
“된장은 없고 치즈뿐인데 어쩐다니. 차라리 치즈 국을 끓여 줄까나?”
여자들은 아무런 사심 없이 까르르 깔깔 웃어댔다. 그 순간만큼은 속세의 번뇌를 벗어난 선녀들 같았다.
하지만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철둑길이라도 있는 듯 기차가 요란스런 소음을 내며 지나가는 바람에 그 웃음소리는 갈가리 찢겨 삼켜져 버리고 말았다.
둘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기지촌의 중심지로 들어가기 전의 길목에 허름한 판자집이 하나 있었다. 피에로를 따라 청운은 그곳으로 들어섰다.
탁자 세 개가 놓인 작은 간이식당 같았다. 젊은 여자 몇이 둘러앉아 수다를 떨며 허연 김이 오르는 칼국수를 후룩후룩 먹고 있었다.
“누님, 잘 주무셨지유?”
피에로가 빈 탁자 밑의 의자를 꺼내 걸터앉으며 말했다.
“이눔아, 지금이 몇 시관데 그딴 소리냐.”
주방 앞쪽의 의자에 앉아 있던 호호백발 할머니가 대꾸했다.
“히히, 누님은 시간이 굳어 있다면서 뭘 그러우.”
“그래, 욘석아, 내가 한이 많아서 그럴 뿐이지.”
뚱뚱한 그 할머니는 일어나서 주방으로 들어서며 구시렁거렸다.
“구름아, 우리도 칼국수 먹을까?”
“응, 그래.”
청운은 피에로의 물음에 대답하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아냐, 할매 칼국수도 이 동네 사방에 소문난 일미지만…앞으로 먹을 기회가 많을 테니 오늘은 그냥 가정식 백반을 먹자. 국이 시원할 거야.”
“응, 좋아.”
피에로가 주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누님, 밥 주세요.”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피에로는 난로 위의 주전자를 들어 보리차를 컵에 따랐다.
“여긴 간판도 없고 메뉴표도 없어. 그냥 할매집이라고도 하고 또 누가 붙였는지 모르지만 입에서 입으로 퍼져 희망집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그리고 여기 메뉴표가 없는 건 칼국수와 백반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야. 하지만 앞으로 자주 들르다 보면 내 말이 헛소리란 걸 알게 될 거야. 히히.”
그때 백발 할머니가 주방에서 소리쳤다.
“야, 가져가!”
“옛, 누님!”
피에로가 재빨리 뛰어가더니 커다란 둥근 쟁반을 들고 왔다. 구수한 시래깃국 내음이 콧속으로 스며들어 뇌를 깨웠다.
흐린 창문에 견고한 쇠창살
길바닥엔 깨어진 술병 조각
수북히 담긴 쌀밥엔 보리가 점점이 섞여 구미를 돋우었다. 반찬은 멸치가 들어간 두부조림, 마늘장아찌, 잘 익은 김치가 전부였다.
청운은 우선 국그릇을 들어 반쯤 훌훌 마시곤 밥을 쏟아 부었다. 그러곤 슬슬 비벼 한술 가득 뜬 후 김치를 얹어 맛나게 먹었다. 간간이 마늘을 집어 사각사각 씹었다.
옆 테이블의 아가씨들과 실없는 수다를 떠느라고 밥을 반밖에 못 먹은 피에로는 자기 밥을 청운에게 떠넘기려고 애썼다.
“형 덕분에 정말 맛있게 먹었어. 하지만 더 이상은 땡.”
청운은 웃으며 마치 종을 흔들 듯 손사래를 쳤다.
피에로는 수다를 멈추고 갑자기 밥상 앞으로 돌아앉더니 순식간에 밥과 반찬을 먹어치웠다. 무슨 마술이라도 부린 듯 그릇들이 깨끗해졌다.
마지막으로 국그릇을 들어 입가심을 한 그는 흰소리를 한 마디 늘어놓았다.
“구름아, 왜 백프로 쌀밥보다 보리 혼식이 맛있고 몸에도 더 좋은 줄 아니?”
“글쎄.”
“그건 음양 조화 때문이란다. 저 백발 누님의 지론이지. 쌀은 봄에 씨앗을 뿌려 가을 햇볕을 잔뜩 받고 익었으니 양이며, 보리는 한겨울 엄동설한을 찬 땅에서 돋아나 견뎠기에 음기가 강하니라. 잘 살펴보면 각각 생긴 모양새도 남녀의 심볼을 닮았으니, 섞어 먹는 게 천지의 이치에 맞느니라. 히히히…….”
“저 녀석이 또 헛소리를 늘어놓는구나. 다 처먹었으면 어서 꺼지거라.”
주방 쪽에서 백발 할매의 지청구가 터져나왔다.
“흥, 지난번처럼 또 보리밥풀과 쌀밥풀떼길 서로 붙여 음향 합궁 쇼를 한번 해보시지.”
칼국수를 먹던 한 여자의 말에 다른 여자들도 까르르 웃어댔다.
“누님, 잘 먹고 가요. 동생 것도 같이 달아 놓으세요.”
피에로가 일어서서 소리쳤다.
“이놈아, 갚지도 못하면서 무슨 큰소리여! 그래도 지옥에 가서라도 받으려고 장부에 꼭꼭 적어 두고 있으니께 걱정 말어. 허지만 니 동생이란 녀석은 오늘 밥을 참 맛있게 먹어서 한번만 공짜로 해줄 테니 그리 알어!”
“히히, 잘 계세요.”
그들은 밖으로 나와 눈발을 맞으며 걸었다. 흐린 빛을 띠고 흐르는 개천 앞에서 담배를 꺼내 피웠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개천 위에 내려앉는 눈발은 작은 나비들처럼 소리 없이 춤추다가 사라져 갔다.
“백발 할매의 나이가 꽤 들어 보이지?”
피에로가 물었다.
“응. 아마도 환갑 진갑을 지났을 것 같던데….”
“고생을 많이 해서 그렇지 그렇게까진 많지 않어.”
“그렇구나.”
“한이 많은 분이야.”
청운은 묵묵히 걸었다. 피에로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은퇴해서 희망집을 하고 있지만 예전엔 여기 기지촌에서 미군들에게 몸을 팔았대.”
“아, 그랬구나.”
동그란 연기
“그런데 더 놀랍고 슬픈 사실이 뭔지 아니?”
피에로는 눈을 돌려 청운의 눈을 바라보았다.
“뭔데 그래?”
“그 전엔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거야.”
“뭐?”
“열댓 살 봄에 고향 들녘에서 나물 캐다가 잡혀갔다더군.”
“그럴 리가 있어? 전혀 실감이 안 나는걸.”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