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 K-문화는 전혀 다른 차원의 확장을 경험하고 있다.
K-팝과 K-드라마는 더 이상 해외 진출 콘텐츠가 아니라, 글로벌 플랫폼과 AI 추천 알고리즘 속에 기본값으로 편입된 세계 문화가 됐다. 넷플릭스, 유튜브, 틱톡, 스포티파이에서 한국 콘텐츠는 언어와 국경을 넘어 자동으로 번역되고 추천되며 소비되고 있다.
AI 자막과 더빙 기술, 데이터 기반 흥행 예측 시스템까지 더해지면서 K-문화는 이제 ‘수출품’이 아니라 글로벌 문화 인프라의 일부가 됐다.
그러나 이 거대한 확장과 동시에 한국 안의 문화는 반대로 위축되고 있다. 서울의 구 단위 문화원부터 지방의 군 단위 문화원까지 전국 곳곳에 걸린 ‘문화원’이라는 간판은 여전히 많지만, 그 안에서 지역의 이야기와 창작이 살아 움직이는 곳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세계는 AI를 통해 한국 문화를 실시간으로 소비하는데, 정작 한국 사회의 문화 토대는 점점 비어 가는 아이러니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전국에는 200곳이 넘는 문화원이 있다. 법적으로 이들은 지역 문화의 보존과 진흥, 주민 문화 향유 확대를 맡는 공공기관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많은 문화원은 ‘지역 문화의 엔진’이 아니라 ‘행사 대행기관’이나 ‘보조금 처리 창구’에 가까운 모습으로 운영되고 있다.
주민의 삶과 연결된 창작보다는 실적을 채우기 위한 공연과 축제가 반복되고, 그 결과는 보고서 속 숫자로만 남는다.
이 구조의 핵심 문제는 ‘프로젝트화된 문화’다. 중앙정부와 지자체 공모사업을 따내기 위해 문화는 기획서 속 키워드로 쪼개진다. 지역의 역사와 삶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난 이야기보다 심사위원에게 통할 법한 트렌디한 문구가 우선한다.
이 과정에서 문화는 축적되지 않고 매년 초기화된다. 올해의 문화는 내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며칠 전 필자는 최귀옥 도봉문화원장을 만났다. 그는 차 한 잔을 앞에 “우리도 지역 예술가들과 장기 프로젝트를 하고 싶은데 예산이 1년 단위라 3년짜리 기획을 세우면 감사에서 문제를 삼는다. 결국 안전한 행사만 하게 된다”고 토로했다.
이 말에는 제도의 벽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문화는 시간의 예술인데, 행정은 언제나 올해만 본다.
최 원장은 “젊은 창작자들이 문화원에 오지 않는다. 와도 6개월짜리 계약직이고, 기획을 제대로 해볼 틈도 없이 다음 공모 준비를 하다 떠난다”고도 설명했다. AI 시대의 콘텐츠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작자의 지속성인데, 지역 문화 시스템은 그 정반대의 조건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은 비단 도봉구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국 문화원의 공통된 병이다. 인력은 불안정하고, 예산은 단기며, 평가는 형식적이다. 문화원장은 문화인이 아니라 행정 관리자가 되고, 직원은 예술가가 아니라 서류 처리자가 된다. 이런 구조에서 지역 문화는 AI 시대의 콘텐츠 경쟁에 참여할 수조차 없다.
이 문제는 문화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필자는 최근 한국유스호스텔연맹 고석천 사무총장과도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고 사무총장은 “한국에는 100곳이 넘는 유스호스텔이 있지만, 청소년과 청년들조차 그 존재를 잘 모른다. 전 세계 연맹 회원국 중 한국만 연맹이 직영 운영을 하지 못한다. 직접 운영하며 쌓은 경험이 없으니, 정부와 지자체에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설계할 수 있는 힘도 없다”고 한탄했다.
이어 “유스호스텔은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여행하고 토론하고 교류하며 문화를 몸으로 배우는 공공 플랫폼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청년 여행 바우처, 체험형 프로그램, 국제교류 캠프 같은 정책이 결합되지 않는 한, 이 공간 역시 문화원과 마찬가지로 껍데기만 남게 된다는 경고였다.
K-문화는 글로벌 플랫폼과 AI 알고리즘 위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BTS와 블랙핑크, 한국 드라마와 예능은 이제 인간의 취향이 아니라 AI 추천 시스템에 의해 전 세계로 배포된다. 그러나 이 시스템을 지배하는 것은 몇몇 대형 기획사와 글로벌 플랫폼 기업이다. 지역은 여전히 소비자일 뿐, 생산자로 진입하지 못한다.
AI 시대의 K-문화는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다. 하나는 서울과 글로벌 플랫폼이 만드는 고속도로형 K-문화고, 다른 하나는 지역과 일상에서 생성되지만 어디에도 연결되지 못하는 저속도로형 문화다. 이 간극이 커질수록, 한국 문화는 외형은 세계화되지만 내부는 비어 가게 된다.
우리는 K-문화를 너무 좁게 정의해 왔다. K-문화는 몇 개의 스타와 흥행 콘텐츠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총합이어야 한다. AI는 이 이야기들을 세계로 보내는 도구이지, 이야기를 대신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지역의 연극, 마을의 설화, 골목의 기억이 데이터가 되지 않으면, AI 시대의 K-문화는 결국 얇은 포맷만 남게 된다.
문화는 토양에서 자란다. AI는 그 토양에서 자란 이야기를 전 세계로 운반할 뿐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문화 토양, 즉 문화원과 지역 예술 생태계, 그리고 청소년 문화 공간들은 동시에 메말라 가고 있다. K-문화가 세계로 더 멀리 뻗어 갈수록, 그 뿌리는 오히려 더 약해지는 역설이 만들어지고 있다.
전국 문화원은 이 토양을 지키는 최전선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문화원 시스템은 중앙정부 보조금과 지자체 눈치를 보며 생존하는 구조에 묶여있다. 주민의 문화 수요를 발견하고 키우는 생산자가 아니라, 정책을 전달하는 하청 기관이 돼버렸다.
이제 K-문화의 방향을 다시 정해야 한다. AI 시대의 K-문화는 수출 산업이 아니라 공공 자산이어야 한다. 글로벌 플랫폼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일부가 지역 문화와 청소년 문화 공간으로 환류되고, 지역에서 축적된 이야기와 인재가 다시 세계로 연결되는 순환 구조가 필요하다.
문화원과 유스호스텔이 그 허브가 되지 못하면, K-문화는 결국 몇 개 기업의 브랜드로 축소된다.
최 원장과 고 사무총장의 말은 같은 결국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장에는 사람도, 열정도 있지만 제도가 그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어떤 AI 기술도 지역과 미래 세대의 문화를 살릴 수 없다.
문화원의 예산을 3년, 5년 단위의 블록 펀딩으로 전환하고, 핵심 기획자에게 장기계약을 보장해야 한다. 유스호스텔 역시 직영 운영과 체험·국제교류 프로그램을 결합해 청소년 문화의 거점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AI 시대의 문화 인프라는 공연장이 아니라, 지역과 세대의 이야기를 축적하는 데이터 허브여야 한다.
K-문화는 지금 세계의 무대에 서 있다. 그러나 그 무대 뒤에서 조명을 켜고 소품을 만드는 지역 문화와 청소년 문화가 무너지면, 주연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AI는 한국 문화를 더 멀리 보내 주지만, 그 문화가 비어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전국 문화원과 유스호스텔은 한국 문화의 기억 창고이자 실험실이어야 한다. 그것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AI 시대의 K-문화는 결국 수입된 포맷과 자본에 잠식될 것이다. 세계가 사랑하는 한국 문화는 결국 한국 안에서부터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화려한 글로벌 무대가 아니라, 조용한 동네 문화원과 청소년의 숙소일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