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을 경영하는 순간 233개의 형사 처벌 위험이 발생하는 나라.
한국 고용·노동 규제의 현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이는 단순한 숫자 문제가 아니라 한국 경제가 ‘왜 투자·고용·혁신이 동시에 위축되는가’를 설명하는 핵심 구조다. 문제는 이 기형적 제도를 정부도 국회도 바꿀 의지가 없다는 점이다.
규제를 고칠 때마다 ‘노동 보호 약화’라는 정치적 프레임이 앞서고, 산업 현장의 현실은 늘 뒤로 밀린다. 이제 이 구조를 직시하고 고쳐야 한다.
19일 한국경영자총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고용·노동 관련 25개 법률에는 형사 처벌 조항이 무려 357개나 존재한다. 그중 233개가 사업주를 직접 형사 피의자로 삼는 조항이다.
형사 처벌 조항이 가장 많은 법은 산업안전보건법(82개), 이어 근로기준법(72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31개) 순이다. 특히 근로기준법의 경우 68개(94%) 조항이 사업주를 대상으로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채용절차법·남녀고용평등법·고령자고용법·기간제법·근로자참여법·중대재해처벌법 등은 아예 사업주만을 형벌 수규자로 규정하고 있어, ‘사업주 편향적 형사 책임 구조’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노동자 보호라는 취지는 분명하지만, 사소한 절차적 실수까지 ‘징역형’으로 엮는 구조는 국제적으로 유례가 없다. 이는 한국에서 “사장이 되는 순간 형법 리스크가 자동 부과되는 현실”이 제도적으로 고착됐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구조는 기업 내부 의사결정 체계도 완전히 왜곡시킨다.
기업은 사업 확장보다 ‘위험 최소화’를 우선하고, 고용보다는 ‘직접고용 회피’를 선호하게 된다.
한국 경제가 활력을 잃는 원인을 법에만 돌릴 수는 없지만, 법이 기업의 기본적 행동 패턴을 위축시키고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한국은 사업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형사 리스크가 구조적으로 누적되는 나라가 됐다.
양벌 규정은 한국 노동법 전체를 관통하는 독특하고 위험한 구조다. 현장에서 단순 실수가 있어도, 관리자가 문서를 누락해도, 대표는 “몰랐다”는 사실과 관계없이 형사 책임을 진다. 이는 형법의 근간인 ‘책임주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한다.
고의나 중대 과실이 없음에도 ‘대표니까 처벌하는’ 구조는 세계 선진국 어디에서도 보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정부와 국회가 이 구조를 방치해 왔다는 점이다. 정부는 정권이 바뀌어도 양벌 규정의 전면 재검토를 시도하지 않고, 행정 역량 부족을 형사 규제 강화로 덮어왔다. 더불어민주당은 노동계 반발을 의식해 규제 정상화 논의를 사실상 차단했다.
국민의힘 역시 규제 개혁을 공약했지만 관료 조직의 저항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 결과 처벌 중심 규제가 누적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고용이 많을수록 형사 리스크가 커지는 나라’가 됐다.
반면 미국은 산업안전 규제를 강력하게 집행하면서도 대부분 과태료·행정명령 중심이며, 형사 처벌은 사망·중대 은폐·반복적 악의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영국 역시 기업살인법이 존재하지만 적용 기준이 명확하고 형벌 적용은 극히 제한적이다.
독일·프랑스 등 노동권이 강한 나라들도 규제 방식은 행정벌 중심이며 형벌은 최후의 수단이다.
OECD 주요국이 ‘행정제재 중심’으로 규제를 운영하는 것과 달리 한국만 ‘형벌 중심’에 머물러 있다는 점은 국제경쟁력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
한국은 경중을 막론하고 ‘절차 위반=형사 처벌’이라는 공식이 존재한다. 사소한 절차 실수까지도 형사 처벌로 이어지며, 사업주는 모든 법률의 잠재적 피의자가 된다. 세계가 산업 전환기에 규제 유연성을 높여 경쟁력을 확보하는 동안 한국만 형사 처벌 강도를 높이는 상황이다. 이는 규제 문제를 넘어 국가 경쟁력 문제다.
이 구조는 이미 고용 위축·외주화 확대·산업 전환 지연이라는 국가적 비용을 초래하고 있다. 형사 리스크가 기업 경영의 주요 변수로 떠오르면서 정규직 채용은 하이 리스크 결정이 됐고, 기업은 외주·프리랜서로 대체했다. 이는 노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취약계층 노동자에게 더 큰 피해를 준다.
‘노동 보호’를 내세운 규제가 오히려 ‘노동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역설이 발생한다.
스타트업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법무팀도 없는 창업자에게 수십개의 형사 조항이 부과되면 신사업 도전은 커녕 직원 채용조차 어려워진다. 제조업에서는 과도한 형사 처벌 구조가 탈한국화를 가속한다. 대만·말레이시아·베트남은 안전 규제를 강화하면서도 ‘형벌 최소화+행정제재 중심’ 모델로 전환해 글로벌 기업을 끌어들이고 있다.
한국이 경쟁에서 밀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의 위기는 기업의 탐욕이 아니라 정부와 국회의 책임 회피가 만들어낸 제도 실패다. 정부는 정책 집행 능력이 부족할 때마다 형사 규제를 강화해 문제를 덮었고, 국회는 노동계 반발이 두려워 규제 정상화 논의를 회피했다.
정치권은 ‘사업주 처벌 강화’를 손쉬운 포퓰리즘으로 소비했고, 관료제는 규정이 많을수록 책임이 분산되는 구조에 익숙해졌다.
그 사이 한국 기업은 ‘법을 먼저 걱정하는 경제’로 몰렸고, 혁신 속도는 떨어졌으며, 고용은 줄었다. 이는 단순한 규제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성장 정책의 구조적 실패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형벌의 양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규제 체계의 전면 재설계다. 형사 처벌은 생명·고의·중대 과실 사건에 한해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 사소한 절차적 실수나 현장의 작은 누락은 행정벌·시정명령 등 비형사적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양벌 규정은 고의·중대한 관리 책임이 없는 경우 대표 책임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법정형도 사안의 경중을 반영해 재설계하고, 신산업 환경에 맞는 규제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
정부와 국회가 이 구조를 바로잡을 의지가 없다면 한국의 고용·투자·산업전환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경제는 규제의 방향을 따라 움직이고, 규제가 오작동하면 투자와 고용은 멈춘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규제를 늘리는 정치가 아니라 규제를 현명하게 다루는 정책 능력이다.
한국은 기업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국가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기업과 함께 성장하는 국가로 전환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233개의 형사 처벌 조항을 짊어진 채 혁신과 고용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정책은 강해야 하지만 처벌은 신중해야 한다. 그 균형을 회복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스스로 만든 규제의 무게에 짓눌릴 것이다. 한국 경제를 살리는 첫 단계는 분명하다. 형벌 중심 노동 규제의 대전환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정부와 국회가 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