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남중국해 전략이 이제 서해로 북상하고 있다. 이것은 개별 사건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해양 주권·경제 생명선·국가 전략체계 전체를 흔드는 구조 변화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와 국회는 서해를 단순한 외교 사안으로 취급하며, 위기의 축적을 ‘조용한 일상’으로 오해하고 있다. 지금 서해에서 벌어지는 일은 시끄럽지 않아서 더 위험한 것이며, 조용해서 더 빨리 진행되는 변화다.
최근 미국 헤리티지재단 스티븐 예이츠 연구원이 “한국이 남중국해를 깊이 연구해야 한다”고 조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중국해에서 일어났던 그 전략적 패턴이 서해에서 거의 동일한 속도로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이 서해에서 잃고 있는 것은 ‘구조물 한 개의 관리권’이 아니라, 국가의 전략적 공간 자체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순간 진짜 골든타임은 끝난다.
침묵은 안정 아닌 전략 붕괴의 신호
중국이 올해 초 서해 잠정조치수역(PMZ)에 폐 시추선을 개조한 철제 구조물을 무단 설치한 사건은 구조물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보 구조 전체를 흔드는 ‘전략적 지진계’에 가깝다.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수십년 동안 반복해 온 ‘기정사실화–군사화–영해화’ 전략을 서해에서도 그대로 실행하고 있다. 그 과정은 언제나 조용하고 단계적이며, 외교적 항의를 무시한 채 점진적으로 확대된다.
지금 서해의 고요함은 평화의 징표가 아니라, 우리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사이 중국이 사실상의 지배력을 굳혀가고 있는 위험한 침묵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항의성 메시지만 반복하고, 국회는 이를 국가 전략의 문제로 다루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전략 부재의 침묵이다.
중국 서해 전략은 남중국해 매뉴얼의 복사본
필자는 ‘서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남중국해에서 이미 검증된 전략의 재현’이라고 생각한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은 법적 근거가 없는 선(구단선)을 그어 주변국의 항행권과 조사권을 제한했고,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판결조차 무시했다. 인공섬을 만들고 군사시설을 구축하며 해군·해경·민병대를 동원해 사실상 남중국해 90% 이상을 자기 나라 바다처럼 만들었다.
지금 서해에서 중국이 보이는 움직임은 그 모든 과정과 유사한 패턴을 따른다. 구조물 설치는 ‘전진 거점 확보’를 의미하며, 지난 9월 한국의 조사선 추격과 활동 제한은 ‘영해 주장 실험’에 해당한다. 중국은 이미 서해에서 남중국해 방식의 1단계와 2단계에 착수했다. 우리나라가 이를 인식하지 못하면 3단계 군사화는 시간문제다.
필리핀의 실패는 반드시 피해야
필리핀은 중국의 점진적 남중국해 전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결국 자국 해역 안에 있는 ‘작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바위섬(스카버러 암초)’을 상실했다. 중국은 어민으로 위장한 민병대, 해경선, 무인기 등을 투입해 충돌 없이 점령하는 방식으로 남중국해를 장악했다.
필리핀은 국제 여론과 미국의 지원에만 의존하다 전략적 거점을 빼앗겼고, 그 이후에야 국제재판을 요청했지만 아무런 실효를 얻지 못했다. 지금 필리핀은 중국의 물대포 공격과 고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최소한의 해역만 유지하는 처지다.
만약 우리나라도 지금 대응을 미룬다면 필리핀처럼 뒤늦게 더 큰 사태를 맞을 것이다. 우리가 서해에서 보이는 소극적 태도는 필리핀의 과거 실수와 지나칠 만큼 닮아있다. 결론은 분명하다. 필리핀처럼 되지 않으려면 지금 막아야 한다.
서해는 한국의 경제·안보 생명선으로 DNA 모여 있는 곳
서해는 우리나라 경제와 안보의 생명혈관이다. LNG 도입선, 원유 운반선, 반도체·배터리 수출선이 모두 서해를 통과한다. 이는 단순한 항로가 아니라 경제의 심장 박동에 해당하는 동맥이다. 동시에 서해는 전쟁 발발 시 한·미·일 연합전력이 진입해야 하는 가장 첫 번째 작전 지역이기도 하다.
중국이 서해에서 지배력을 확보하면 우리의 경제 체력, 응전 능력, 외교적 자율성 모두가 제약된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서해 문제를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 가능성’ 정도로 축소하거나 단순 관리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런 태도가 지속되면 우리나라는 스스로의 전략적 공간을 중국에 넘기는 꼴이 된다. 서해는 바다가 아니라, 한국의 번영을 떠받치는 구조적 기둥인데, 그 기둥이 지금 흔들리고 있어 안타깝다.
우리나라는 동고서저 지형 특성으로 대부분의 강이 서해로 흘러 나간다. 실핏줄처럼 이어진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강들이 서해로 연결돼있다는 것은 우리의 역사와 DNA가 서해에 모여 있다는 의미다. 서해를 중국에 넘겨서는 절대 안 된다.
대만해협·서해 운명은 하나로 연결
전문가들은 “대만해협의 현상 유지가 한국의 중대한 국가 이익”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중국이 대만을 장악하면 그 전략적 효과는 서해와 동중국해까지 확장된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포위망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국가 전략의 자율성은 급격히 축소된다. “대만 문제는 조심해야 한다”는 우리 정부 분위기가 여전히 강하지만, 이는 전략적 계산이 아니라, 두려움에 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중국은 우리의 침묵을 ‘한국은 이미 우리 영향권에 있다’는 신호로 해석할 것이고, 이는 서해 불안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 된다. 우리 정부는 대만해협의 안정과 서해의 안정이 긴밀히 연결돼있다는 점을 분명히 자각해야 한다.
미국·일본·호주는 전략 속도 ↑ 한국만 정체
일본은 다카이치 총리 체제에서 대만 유사시 군사 개입 가능성을 직접 언급하며 중국의 행동에 즉각 대응하는 전략체계를 갖췄다. 호주는 중국 군함이 태평양 연안까지 진출한 현상을 보고 해양 전략을 전면 재정비했다. 미국은 필리핀과의 공동작전을 강화하고 항행의 자유 작전을 확대하며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국내 정치 일정에 발목이 잡혀 이 같은 전략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는 서해 문제를 정쟁의 소재로 소모하고, 정부는 중국의 보복 가능성만 우려하며 전략 발표를 미루고 있다. 중국의 시간표는 빠르고, 우리의 시간표는 느리다. 이 속도 차이가 바로 서해 붕괴의 가장 치명적인 리스크다.
이재명정부가 중국과 가깝다는 여론이 있는 만큼, 서해 위기 대응의 핵심 관전 포인트는 ‘과연 중국에 단호할 수 있느냐’다. 국민이 궁금한 것은 단 하나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중국과의 거리·원칙·국가이익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다. 서해에서 그 원칙을 보여주지 못하면 외교·안보 전반의 신뢰도 흔들릴 수 있다.
서해 수호 전략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정부는 지금 ‘전쟁을 피하고 싶다’는 심리를 전략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회피는 전략이 아니다. 억제는 전쟁을 막는 기술이며, 억제는 원칙과 행동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서해 기정사실화 저지 원칙을 공식화하고, PMZ 관리체계를 우리 주도로 재편하며, 서해 전용 감시체계를 신속히 구축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직접 서해 전략회의를 정례 주재해 이 문제를 국가 전략의 최상위로 격상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정부는 한·미·일 협의체에서 서해 문제를 정식 의제로 올리고, 서해 현상 유지 입장을 명확히 주장해야 한다. 국회도 서해 전략 예산을 별도로 편성하고, 중국의 경제·관광·금융 보복에 대비한 사전 매뉴얼을 확정해야 한다. 국가가 움직여야 중국이 멈춘다.
동해서도 한국 주권이 시험대
최근에도 일본은 외교청서·교과서·해양조사 발표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국제사회에 ‘독도=분쟁 지역’이라는 인식을 쌓아가려는 장기 전략이다. 단발성 발언이 아니라 누적된 반복을 통해 한국의 여론과 정부 대응이 어느 순간 약해지는 틈을 노리는 방식이다.
결국 서해와 동해에서 각각 중국과 일본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한국의 주권을 흔드는 ‘조용한 영토전쟁’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실질 점유를, 일본은 분쟁화를 겨냥하며 한국의 전략적 침묵을 이용해 기정사실을 축적하고 있다.
이 상황을 개별 사건으로 분리해 다루면 오히려 위험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두 바다를 하나의 전략 지도 위에서 보고, 한국의 해양주권을 지키는 통합 대응체계를 재정립하는 일이다. 이것이 흔들리면 한국의 경제 동맥과 안보 기반은 동시에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서해·동해의 근본적 질문은?
지금 서해와 동해는 우리에게 동시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질문은 외교도, 군사도, 해양 관리도 아니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존재의 질문이다.
서해에서 중국은 조용한 기정사실화를 누적시키고, 동해에서 일본은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보이게 하는 전략을 반복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라,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을 잠식하는 이중 압박이다.
만약 한국이 지금처럼 대응을 미루고 정치적 계산만 되풀이한다면, 우리는 필리핀이 남중국해에서 겪었던 치명적 실수를 그대로 반복하게 될 것이다. 경고는 이미 시작됐고, 침식은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서해와 동해를 다시 국가 전략의 중심축으로 되돌릴 것인가, 아니면 주변국 이슈로 취급되며 또 다른 침식을 허용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선택당하는 시기에 들어섰다. 지금이야말로 그 기준점을 세워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