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몽키하우스’를 찾아가는 날엔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그래도 소요산 등반객은 꽤 많은 편이었다. 허나 그들 중에 옛 양공주 성병환자 수용소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겨우, 어느 모시옷을 정갈히 갖춰 입은 할머니가 가리켜 주는 곳으로 올라갔다.
언덕 하얀 집
거긴 격주로 각설이 패들이 공연하는 데라는데, 공일인지 몇몇 남녀가 탁자 앞에 앉아 토론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몽키하우스가 어디죠?”
“우린 원숭이 안 키워요.”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르기도 했고…이 부근이라던데….”
“글쎄요.”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백색이나 회색 건물은 없었다. 나뭇잎 사이로 높다랗고 거무칙칙한 벽의 뒷면만 보일 뿐이었다.
잡초를 헤치며 슬슬 돌아갔다. 그러자 갑자기 옆면과 정면이 누르스름하게 변색된 2층짜리 건물이 나타났다. 1970년대엔 흰색이었다는데 언젠가 연노란 색으로 덧칠한 듯싶었다.
페인트가 벗겨져 희끄무레한 본디 색이 드러나고 군데군데 세월의 곰팡이가 거무스레 낀 모양이었는데, 뒷벽이 왜 그렇게 검은지는 짐작되지 않았다.
페인트나 곰팡이라기보다 검은 비닐막을 쳐 놓은 것 같기도 했으나, 대체 왜 그랬을지 의문이 일었다.
건물 앞의 공터엔 잡초가 무성히 자라나 전체적으로 하나의 폐허였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입구 벽면에 출입금지 경고문이 동두천 경찰서장 명의로 붙어 있었다. 일단 들어섰다. 폐허의 공간에서나마 과거의 진실을 캐내야 했기에 현재의 경고를 잠시 무시했다.
하지만 70년대 경찰관의 엄포와 달리 현시대 경관의 경고는 분명 일리가 있었다. 어둑스레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내 스스로 위험 지역임을 느꼈던 것이다.
건물 일부가 언제 어디서 무너질지 모를 만큼 낡았고 실제로 천정의 합판이 찢겨진 채 간혹 무언가 툭툭 떨어져 내렸다.
발밑에선 계속 유리조각 밟히는 소리가 났고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풀썩풀썩 먼지가 일었다.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된 건물 내부는,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마치 수십 년 전에 숨진 거대한 괴물체의 내장 속 같았다.
네티즌이 올려놓은 동영상과 SBS <그것이 알고 싶다>팀이 찍어 방송한 화면을 이미 본 상태였으나 실제로 현장을 둘러보니 머리끝이 쭈뼛 설 지경이었다.
우선 밖에서 보기와 달리 방(room)이 엄청 많았다.
큰방, 작은방, 구석방…통로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줄느런히 늘어섰다. 그 속엔 폐물로 변해 버린 군용 담요, 핸드백, 화장품통, 찢어진 원피스, 깨어진 거울 따위가 먼지를 덮어쓴 채 나뒹굴어 있었다.
폐쇄되기 전까지 수용돼있었을 여자들의 모습과 삶이 언뜻언뜻 떠올랐다.
활명수 병과 잡지책이 보이길래 집어내 오물을 털고 살펴보았더니, 상표가 거의 지워졌거나 책장들이 완전히 들러붙은 상태라 펼쳐서 어떤 의미를 파악하긴 어려웠다.
‘시대를 착각하면 안 돼. 이 속엔 아마 70년대, 80년대, 90년대가 뒤섞어 있을 테니까….’ 생각하며 폭 좁은 가파른 시멘트 계단을 걸어 2층으로 올라갔다.
귀신이라도 나올 듯이 음산한 느낌이었다. 죄 아닌 죄로 갇힌 몸일지언정 여자들의 숙소라 그런지 황폐해진 수많은 방들엔 화장품과 거울의 누추한 잔해가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거울을 닦아서 혼령의 모습이나마 한번 새겨 볼까 하다가 옥상으로 올랐다.
하늘을 쳐다보며 심호흡을 했다. 잔뜩 흐리긴 했지만, 그곳은 쇠창살로 인해 갈기갈기 찢기지 않은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자유를 향해 날아가려던 무수한 여인들이 떨어져 죽거나 불구 신세가 된 곳이기도 했다.
인터넷 동영상으로 볼 땐 좀 긴가민가 했는데, 실제로 가녘으로 가서 내려다보니 일반 건물과 달리 까마득이 높아 만약 뛰어내린다면 즉사 또는 중상을 입고 말 듯싶었다.
모시옷 정갈히 입은 할머니
가리켜 주는 곳으로 가보니…
‘나라 힘이 약해…… 어쩔 도리 없는 상황에서, 벼랑을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몸을 버린 경우도 있을 텐데…그녀들을 일률적으로 양갈보니 똥치니 화냥년으로 낙인 찍는 건 비겁한 짓이 아닐까? 여자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채 왕을 닮은 친일파 친중파 친미파 놈들은 희희낙락거리며 부귀영화를 누렸으면서….’
바람이 불자 저쪽 멀리 허연 감시초소를 둘러선 나무의 푸른 잎새들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런데 그중에서 좀 외떨어진 한 나무의 잎새는 유난히 파르르 떨어댔다. 무엇엔가 잔뜩 겁먹은 듯……
몸통과 이파리에 납빛이 감도는 게 은사시나무가 아닐지 짐작해 보았다.
을씨년스런 분위기 때문인지, 문득 그건 오래 전 이곳에 갇혀 고통당하거나 억울하게 죽은 여인들의 겁먹은 혼령이 스며든 게 아닌가 싶어 애처로웠다.
그리고 공터 여기저기 피어나 부슬비에 젖어 떠는 꽃들은 귀신의 원망이나 소망인 양 느껴져 한참 바라보았다.
‘아, 왜 이렇게 방치해 두는 걸까? 건물을 헐어내 버리기보다 잘 활용해 기념관을 만들고 작은 위령비라도 세운다면 어떨까.
하기야 신성한 한미혈맹을 위하여 미군이 이 땅에 주둔해 있는 동안엔 쉽지 않은 일이겠지. 그렇지만 과거의 치부라 할지라도 모른 척하기보다 진실되게 기억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 좋지 않을까?
의존과 종속 관계를 끝내고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존중할 때 참다운 한미동맹의 우정이 더욱 돈독해지지 않을까 싶은걸. 우리 스스로 자존감을 버리고 비굴하게 굴어서 그렇지, 성숙한 인간답게 당당해진다면 미국 사람들도 오히려 멋진 친구라며 존중해 줄 텐데……
다른 분야에서는 그런 저력을 많이 갖췄는데, 유독 국방 부문에선 왜 그리 미숙한 꺼병이처럼 의타심을 못 버리고 자꾸 어리광이나 부리려는 사람이 많은지 몰라….’
언제 다시 올지 몰라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본 후 건물 밖으로 나와, 혼령인 듯 떨고 있는 이름 모를 하얀 꽃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보지가 내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할머니의 구슬픈 절규가 떠오른다. 미군 기지촌 여성들의 고통과 상흔 그리고 수치심은 그녀들만의 것이 아니라 온 민족의 것이다.
동두천, 평택 등을 비롯한 미군 주둔지만 기지촌이 아니라 한국 땅 전체가 그런 상황이라고 말한다면 과연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미군이 이 땅에 주둔한 이후로 이른바 양공주, 양색시, 양갈보 등으로 불린 ‘미군 위안부’ 들의 비참한 삶을 그린 작품은 무척 많았다. 대부분 미군 부대 주변의 클럽을 무대로 술과 춤과 몸을 파는 여자들의 얘기였다.
물론 성병치료소를 단편적으로 언급한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동두천 몽키하우스를 본격적으로 탐사해 다룬 장편소설은 이 작품이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나라가 약해…
이 작품은 그 모든 이전 문제작들의 도움을 입어 씌어졌다.
그리고 고통스런 옛 기억을 떠올려 어렵사리 증언해 주신 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더불어, 그분들의 애달픈 삶을 살펴 정리하고 여생을 조금이나마 따뜻이 보살피려 애쓰는 의정부의 두레방, 동두천의 새움터, 평택의 햇살사회복지회의 도움에도 감사드린다.
[김영권 작가는?]
진주에서 태어나 인하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소’가 당선되고 <작가와비평> 원고 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대통령의 뒷모습> <선감도: 사라진 선감학원의 비극> <죄의 빙점 형제복지원> <자물쇠 속의 아이들: 어린 북파공작원의 비밀> <보리울의 달> 등이 있다.
























